시작하면서
대개 창업과 수성에 관해서라면 통설처럼 퍼져있는 말이 ‘창업하는 것보다 수성이 어렵다.’와 같은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대체로 많은 분들이 일체의 사고 없이도, 혹은 찰나의 생각만으로도 이 말에 쉽게 동의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창업 자체도 어려우며 많은 위기를 감내하게 하는 일이지만 조직체를 운영하면서 운영상의 난점을 해결하고 피치자들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복잡한 통치술과 판단력을 요하는 수성은 그 난이도에 있어서 창업과는 맥이 아예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조직체를 국가로 대치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구체적인 국가 운영에 대한 논의로 전환됩니다.
국가의 안정적인 운영에서 가장 필요한 것들 중에는 국가의 행정을 최대의 효율로 조정, 이행할 수 있는 관료제, 내부의 갈등을 중재하는 사법 체계와 법률, 경제의 운영 방식-즉 관치 경제냐 자유 시장이냐, 국방의 조직 등이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현실에서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수행된 것이 오랫동안 세계사를 장식한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바로 이 국가를 운영하는 데는 서양과 동양을 막론하고-물론 동양, 특히 중국에서 조직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는데 좋은 능률을 보여주었습니다만 대체로 국가가 오랫동안 지속될수록 운영에서의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이 강해지는 양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가 중국, 조선 그리고 로마가 되겠습니다.[1]
물론 개인적으로는 중국과 조선에 관한 관심이 지대하므로 다루면 좋겠으나 이미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저로서는 다룰 수 없는 부분을 다루는 분들도 많고 여타의 다른 국가들에 관해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로서는 최선의 대안으로 로마를 다루는 것이 있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논의의 수준을 조금 높이기 위해 엄밀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쇠망의 과정을 통해서 흥미로운 점을 많이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로 11세기로부터 15세기에 이르는 비잔틴 시대 로마의 쇠망사를 다룸으로써 이 부분을 공유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과거 중구난방으로 연재했던 “비잔티움 쇠망사”의 개정판 연재가 되겠습니다.
이야기는 어디서 시작될 수 있을까요? 사람에 따라 쇠퇴에 대한 정의 그리고 쇠퇴의 시작점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대체로 어리석은 군주가 등장하면서부터 거대한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시작점을,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유지되어왔던 제국 체제가 모순의 누적에 따라 와해되기 시작하고 새로운 대안에 대한 요구가 대두하던 11세기 중반부터 15세기 중반에 걸치는 약 400년을 다루고자 합니다.
불안한 번영의 시대
6509년 12월 15일(1025년 12월 21일)[2] 오전 9시경. 9세기로부터 시작된 로마 제국의 세력 강화 작업에서 최고의 정점을 달성한 황제이며 외로운 늑대와도 같았던 바실리오스 2세, 불가록토노스[3] 황제(963-1025)는 향년 67세로 사망하였습니다.
후대에 한 시대의 끝이라고 흔히들 회자되었던 것과는 달리 이 사건 자체는 조용하게 지나갔으며 아무도 이 죽음이 새로운 난세의 시작이 될 것임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당시의 로마 제국은 어떠하였는지를 살펴본다면 가히 세계적인 강국이라 손꼽을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국토는 거의 150만 제곱킬로미터에 육박하였고 추산되는 인구 또한 1,500만 명을 넘나들었습니다. 중앙군은 상시 2만에서 3만을 두었고 지방군까지 총 30만 명을 운용하였으며 해군 3만을 상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연간 세수입은 중앙정부만 92-95% 정도의 순도를 가진 금화 600여만 개를 거둬들이는 정도였고 가외로 국고에 1,440만개의 금화를 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번영의 뒷면에는 모순 또한 점차 누적되는 현실이 있었습니다. 우선 950년대까지 엄격하게 억제되었던 대토지 귀족들이 군사 귀족 출신으로 만인지상의 황제를 역임한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963-969)의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제재가 풀리게 되자 지방에서의 토지 겸병을 강화해나갔습니다. 또한 860년대부터 거의 1세기 이상 확장을 계속해 온 군대에 투입되는 비용 또한 전체 국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위험할 정도로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8세기 이래로 경기가 활황을 맞고 이자율이 비교적 낮게 유지되면서 성장을 많이 경험하므로 물가가 자연스레 오르게 되었지요. 이와는 외따로 무역/거래의 화폐화(~3, 40%)가 상당 부분 진행되면서 화폐 유통의 부족이 문제가 되었는데 11세기 초까지는 경제의 성장이 두드러지면서 전자가 더욱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것 같습니다.
특히 국방에 투입되는 비용이 평화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줄어들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었으며 이 문제는 바실리오스 2세 말년기의 관료들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중앙군 3만과 중앙 해군 3만의 무장수준을 전시와 대등한 최고의 수준[4]으로 항시 유지를 하는 것-특히 1,500내지 4,000정도의 병력을 가진 특수 부대로 돌격에 특화되어 있는 클리바노포로스 부대는 기수와 말을 당대 최고 수준으로 무장시켰기 때문에 비효율적일 정도로 많은 비용을 소모하였습니다-은 이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인상시키는 수밖에 없었으므로 일반 신민들의 불만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우 억압적이고 전제적이었던 바실리오스 2세가 죽자마자 그의 특별한 법령[5]에 의해 무려 소송 기한이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많은 토지를 상실하거나 점유 토지 확대의 기회를 앗긴 귀족들은 선황의 동생이자 공동 황제였지만 나약하기 그지없는 콘스탄디노스 8세를 압박하였습니다.
이때야말로 관권과 귀족들간의 갈등이 전면전으로 비화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대부분의 군대가 황제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좀 더 담력이 있는 황제였다면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60대가 넘었고 애초에 좀 나약한 성격을 가졌던 콘스탄디노스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말았으며 동시에 선황이 제정하였던 미납 세금 대리 징수제인 알렐렌기온 세[6]까지 폐지시킴으로써 대귀족들과 경제적 권력을 지닌 자들의 위세는 격상되었습니다.
이와 달리 세금을 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구제책을 적용받았던 백성들과 항상 일정한 수입을 보장받던 국고는 위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자체의 경제적 기반이 계속 발전중이었으며 튼튼했기 때문에 대단한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이었으나 장차 겪게 될 시련을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는 했습니다.
한편 이렇게 모순이 누적되어가는 다소 불안한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지속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로마노스 2세의 차남이자 현명한 콘스탄디노스 7세의 손자이며 빛나는 바실리오스 2세의 동생인, 그러나 나약한 콘스탄디노스 8세가 판단과 결단이 절실한 이 시기의 첫 장을 열게 되었습니다.
주 석
[1] 그 외에도 많은 국가가 있는 것이 당연하나 여기서는 과감히 생략합니다.
[2] 로마 제국은 988년 이후 기원전 5509년 9월 1일을 천지창조의 기점으로 삼아 역년을 따지는우주 기원력(Etos Kosmou)을 사용하였습니다. 이후로는 혼동을 막기 위해 이 역년법과 현대의 역년법을 병행기재하겠습니다.
[3] 불가르 인의 학살자란 뜻입니다. 15,000명의 불가리아 포로를 모두 눈을 적출하고 100명당1명씩에게만 한쪽 눈을 남긴 채 한 눈을 가진 이들이 포로를 인솔하여 귀국하도록 했다는데서 연유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사건이 있었는지는 정사에 의해 판명되지 않으며 전설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실제로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 인들의 경제 상황을 고려하여 본국의 현금세가 아니라 현물세로 세금을 대체하도록 허용하는 등 사려 깊은 통치자의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습니다.
[4] 9세기 이래 대부분의 군인들은 두 벌 이상의 서로 다른 갑옷을 걸치고 그 위에 천으로 된 의복을 입곤 하였습니다.
[5] <가난한 자들을 희생시켜 재산을 축적한 부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위대한 황제 바실리오스의 새 법령(996)>에서는 토지 환급 소송의 경우 그 공소 시효를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 상향시켜버렸습니다.
[6] 가난한 신민이 세금을 납부하지 못한 만큼의 세액을 주변의 수도원이나 여유 있는 이들이 대신 납부하는 제도입니다. 재정 운영의 확실성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