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 경제사' 녹읍제의 성격과 그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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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서의 상태와 판독
"신라촌락문서"는 1933년 일본 정창원에 소장된 "화엄경론제칠질"을 수리할 때 우연히 발견되었다. 발견된 문서 2편에는 각 편에 2개 촌씩 총 4개 촌의 상황이 집계되어 있다.
그 4개 촌은 당현(當縣) 소속의 사해점촌(A촌)과 살하지촌(B촌), 군현과 촌명이 결실되어 이름을 알 수 없는 실명촌(C촌), 서원경 소속의 촌(D촌)이다. 이 문서 2편은 기재양식이나 필체가 완전히 똑같아 동일한 원문서에서 분해되었다고 여겨진다.
경질(經帙)로 재이용되기 전 촌락문서의 원상태는 일정한 크기의 저지(楮紙: 닥종이)를 여러 장 연접하여 만든 두루마리 문서였다.
현존하는 문서 2편은 연접·절단부위·문서내용 등으로 볼 때, 원문서 내에서 직접 이어져 있던 편들은 아니며, 그 사이에 적어도 1개 이상의 문서편이 더 있었다고 여겨진다.
2. 문서의 작성연대
1) 문서에 기록된 '연(年)'과 '일월(壹月)'
촌락문서 2편에는 모두 을미년에 연(烟)을 조사했다고 나온다. 종래에는 이 을미년을 755년(경덕왕14)이나 815년(헌덕왕7)으로 보았지만, 모두 뚜렷한 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행정문서에서는 일정시기에 특별한 글자를 엄격히 사용한 경우가 있다. 일례로 당현종의 천보 연간에 '연(年)' 대신 '재(載)'를 쓴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용법은 당시 신라에서도 그대로 썼다. "무진사종명"(745년, 경덕왕4)이나 안압지출토 '천보10재'목간(751년, 경덕왕10), "대방광불화엄경발문"(755년, 경덕왕14) 등이 그 예이다. 특히 "대방광불화엄경발문"에 따르면 755년을 '을미재'로 기록하고 있다.
만일 촌락문서의 을미년이 755년이라면 '을미재'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편 촌락문서의 D촌에는 '갑오년 일월(壹月)'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당의 측천무후가 영창 원년(689년) 11월(=子月)을 재초 원년 정월로, 12월을 납월(臘月), 다음 해(690년) 정월을 일월로 변경한 사실과 관련된다.
중국에서는 재초 원년(689년) 11월부터 구시 원년(700년) 10월까지의 기간 동안, 기존의 11월은 정월로, 12월은 납월로, 정월은 일월로 변경하였다. 이 기간에 작성된 중국 고문서에도 기존 정월은 모두 '일월'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촌락문서의 '갑오년 일월'의 '일월'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때, 갑오년은 694년(효소왕3)일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촌락문서의 작성 연대인 갑오년의 이듬해 을미년은 695년(효소왕4)으로 여겨진다.
2) "화엄경론"경질의 정창원 입고과정
정창원은 일본 나라시 동대사에 있는 보고다. 정창원 소장 유물은 기년명문이 없다 해도, 그 유물의 입고과정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유물의 목록작업은 소장 유물의 입고시기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화엄경론"경질이 보관된 정창원의 중창(中倉)에는 "대승잡경반야질" 2매 및 "소승잡경직성질" 1매 등이 함께 있다. 따라서 이 경전들의 유입시기와 "화염경론"경질의 유입시기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일체경"의 사경(寫經) 작업을 통해 만들어졌는데, 본디 하여법원(下如法院) 쌍창에 보관되어 있던 35궤가 950년에 정창원 남창으로 옮겨졌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강독의 편리를 위해 남창에서 외부로 빠져나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1117년 정창원 관련문서에 보이는 정창원 남창에 남아있던 일체경 8궤는 35궤 중 그때까지 빠져나가지 않았던 마지막 "일체경"이다. 한편 950년 이후 "일체경"이 외부로 반출되던 와중에, 1116년에는 남창의 중물(重物)이 북창이나 중창으로 옮겨졌다. 이 가운데 "일체경"경질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하여법원 쌍창에는 이러한 "일체경" 35궤 외에 '조동대사사(造東大寺司)'의 비품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 조동대사사 예하의 동대사사경소(寫經所)는 748년(천평20) 경부터 활동하였는데, "화엄경론제칠질"이 동대사사경소의 물품으로 보관되어 있다가, 훗날 하여법원의 쌍창으로 옮겨졌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이와 관련하여 752년(천평승보4) 6월 22일 일본에 온 신라 사절들이 동대사에 불경을 봉헌한 일이 있어 주목된다. 이때 신라 사절들이 기증한 불경은 "법화경"이었지만, 이는 "화엄경론" 및 그 경질 역시도 양국의 교류를 통해 동대사에 기증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3) "화엄경론"의 일본유입과 유통상황
"화엄경론"이라 불리는 책은 2종류이다. 북위의 영변(477~522)이 찬한 "화염경론"100권과 당의 이통현(635~730 or 646~740)이 찬한 "화엄경론"40권이 그것이다.
영변의 "화엄경론"100권은 "화엄경전기"에 '10질'로 완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촌락문서가 발견된 "화엄경론제칠질"은 영변의 "화엄경론"100권을 나누어 묶었던 경질 중 제7질로 이해된다.
즉 촌락문서가 있던 "화엄경론"은 영변이 찬한 것이다. 한편 이현통의 "화엄경론"은 804년에 입당하여 806년 귀국한 공해에 의해 들어왔으므로, 일본에서는 적어도 9세기가 되어야 이통현의 "화엄경론"40권이 소개되었다고 하겠다. 더욱이 정창원문서 가운데 9세기로 내려가는 것은 없다.
영변의 "화엄경론"이 일본에 유입된 시기를 정확히 알 순 없다. 단 740년(천평12)에 작성된 문서에 그 실체가 보이며, 나라시대 논소(論疏)류의 사경 작업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가 747~748년(천평19·20년)이란 점을 감안하면, 748년(천평12) 이전 어느 시기에 일본으로 영변의 "화엄경론"이 유입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740년에 처음 보이는 "화염경론"은 심상사본(審祥師本)이었다. '심상사'는 곧 승려 '심상'인데, 그는 당의 법장 문하에서 화엄학을 공부한 신라승, 또는 신라에 유학한 적이 있는 일본승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가 일본으로 건나간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740년에 동대사의 전신인 금종사에서 처음으로 "화엄경"을 강의했다고 하니, 그 이전일 것이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가지고 간 "일체경"에는 신라승들이 지은 불경주석서들이 1/3을 차지했다. 심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거나 사경된 경권들을 다수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은 사실이다.
심상이 소장했던 "화엄경론"65권을 묶었던 경질 7매는 '곡피질(穀皮帙)'이라 기록되었다. '곡피질'은 '곡피지로 만들어진 경질'을 의미하는데, 곡피는 닥종이의 재료는 저(楮)를 뜻한다.
"화엄경론제칠질" 의 촌락문서 역시 닥종이로 만들어졌기에, 심상이 소장한 "화엄경론"이 촌락문서가 재이용되었던 그것이라 하겠다. 심상은 늦어도 751년(천평승보3)에 죽었으므로, "화엄경론제칠질" 역시 751년 이전에 만들어졌다. 촌락문서에는 '서원경'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서원경이 설치된 시기는 685년(신문왕5)이다. 따라서 촌락문서의 작성연대는 '685~751년 사이의 을미년=695년(효소왕4)'이다.
3. 문서의 기재양식과 용도
1) 문서의 호구기재양식
촌락문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연인(烟人)=호구'에 관한 기록이다. 문서에서는 현 문서 작성 이후, 새로이 발생한 감소분을 정정 기록한 부분이 있는데, 이를 대개 '추기'라 부른다.
그런데 이 추기가 '연인'에만 국한되기에, 호구 항목은 다른 항목과 달리 3년이라는 문서작성의 주기와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파악된 셈이다. 한편 촌락문서에서 각 촌의 노비 수는 일반인과 구별 없이 각 연령등급 속에 합산되어 있다. 다시 말해 촌락문서에서 노비는 일반인과 대등한 상태로 합산된 것이다.
2) 촌락문서와 중국·일본 적장(籍帳)문서의 비교
현존하는 최고(最古) 호적인 702년의 "대보2년호적"은 크게 "미농국호적"과 "서해도제국호적"으로 나뉜다. "미농국호적"은 일본 최초의 율령인 689년의 "정어원령"에 입각하여 702년에 작성되었고, "서해도제국호적"은 702년 10월에 시행된 "대보령"에 입각하여 703년(대보3년) 말 이후에 작성되었다.
그런데 "정어원령"이 신라율령을 참고해서 편찬되었기 때문인지, 695년의 "신라촌락문서"와 702년의 "미농국호적"의 호구기재 양식에 유사한 점이 있다. 정수(丁數)의 다소를 기준으로 편성된 호등제, 남자를 먼저 기록한 뒤 여자를 기록한 인구집계, 호주보다도 정정(正丁)을 중심으로 한 호별 총계부분의 기재양식 등이 그것이다.
이는 "미농국호적"이 정정을 비롯한 성인남성의 노동력을 관리·통제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음을 보여주며, 나아가 당시 일본의 수취제가 인두세였다는 것과도 관련된다.
단 "미농국호적"은 촌락문서와 다른 점도 있다. 3년 사이에 증가 혹은 감소한 호구의 수치가 집계된 촌락문서와는 달리 현재 인구 수치만 집계된 점, 노비가 일반 호구와 구분되어 맨 마지막에 기록된 점 등이 그것이다.
촌락문서와 노비의 기재양식이 유사한 것은 서위의 "대통13년(=547년)문서"이다. 서위는 북위의 전통을 이어받아 양천 모두에게 동일한 액수의 토지를 지급하고, 또 노비에게도 양인의 50~80% 정도되는 세금을 거두었다.
692년 이래 시작된 일본의 반전수수제(班田收授制=균전제)에서도 처음에는 노비에게 양인의 1/3 수준으로 토지를 반급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실행되었는지 의문이고, 그마저도 723년(양로7)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대통13년문서"를 모본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서해도제국호적"이 노비기재에 있어선 판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결국 양인과 노비를 분리하지 않고 섞어 기록한 서위의 호별(戶別)기록부는 양인과 노비 모두가 수취 대상이었던 데에 원인이 있다.
노비에게 토지를 지급하지 않았고, 따라서 노비에게 수취도 하지 않던 당의 호적에서는 노비가 호구 부분 맨 마지막에 기재되어 양인과 구분되었음은 이를 반증한다.
한편 당 계장(計帳)의 호구기재 양식은 서위나 고대 일본의 그것과 달리 '구(舊)'와 '신(新)'으로 구분되어 있어 촌락문서의 호구기재 양식과 매우 상통하다.
호적이 각 호구에 대한 신분·연령을 확정하여 민을 국가의 통치권 안으로 장악하는 데 이용되었다면, 계장은 매년 작성되어 그 해의 재정수지를 확정하는 데 이용된 문서이다. 이러한 당의 계장 양식은 현존하는 고대 일본의 계장 양식과도 대체로 일치한다.
지금까지 검토한 서위·당·고대 일본의 호적 및 계장 양식을 참고하면, 촌락문서의 호구 항목은 전체적으로 각 연령등급이 자세히 집계되어 있는 일본 "미농국호적"의 총계부와 유사하지만, 호구 집계를 일정 시기에 따라 갱신하고 있다는 데에서 수취문서로 활용된 계장 양식도 차용되어 있다. 결국 촌락문서의 호구 항목에는 호적의 '호구총계부'와 '촌별 계장'이라는 두 성격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한편 균전제를 실시했던 서위의 문서에는 각 호의 수전액(受田額)이나 소가 있는데, 이를 촌락문서의 연수유전답과 비슷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런데 서위 문서에 소가 기록된 것은 북위 이래 각 호 소유의 경우(耕牛)에게 토지가 지급되어 조조(調租)가 수취된 것과 관련된다.
당에서는 소에 대한 토지 지급 및 수취가 폐기되었기에, 계장과 호적에 소가 기록되지 않았다. 즉 서위의 문서에서 호구 다음에 소가 기록된 것은 소에 대한 수취, 곧 소를 소유한 '호'에 대한 수취를 위해서이다.
촌락문서에는 호구 다음에 소가 있지만, 그 앞에 말이 있는 점부터 서위 문서와 크게 다르다. 서위와 달리 소의 크기나 수전(受田) 여부가 고려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촌락문서의 우마 항목은 수취보다는 각 촌이 보유한 '우마의 총수'를 관리하기 위해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즉 촌락문서의 우마는 수취보다는 '촌에 대한 행정적 지배'와 관련된 항목이다.
또한 서위 문서의 '응수전(應受田)' 항목과 촌락문서의 연수유전답 항목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다. 서위의 응수전액은 계자엥 기록된 각 호의 수전액을 집계한 것이다.
그런데 촌락문서에도 연수유전답의 총액이 기록되어 있어, 그것만으로는 촌락문서에 등재된 각 연의 수전액을 집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A촌의 연수유답 안에는 '촌주위답'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촌주는 A촌에 거주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즉 촌주는 A촌이 아니라 '당현' 소속의 촌이나 현치(縣治)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연수유전답은 촌락문서에 등재된 '연'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촌'과 관련된 항목이라 하겠다.
요컨대 서위의 계장과 촌락문서는 행정단위별로 호구·말·전토 등의 수치가 집계되어 있지만, 서위 계장이 여러 항목들은 호구에 대한 수취라는 단일한 성격으로 수렴되는 데 비해, 촌락문서에서는 호구에 대한 수취 뿐 아니라, 촌에 대한 전반적인 행정적 지배를 위한 여러 항목들이 복합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촌락문서의 이런 복합적인 성격은 촌락문서의 호구 항목이 호적의 총계부 및 계장의 양식을 포괄한 데서도 뒷받침된다.
3) 문서의 용도
촌락문서의 용도에 대해서는 우선적으로 신라가 모든 촌락에 대해 이러한 형식의 문서를 만들었는지가 의문이다. 촌락문서에는 '당현'·서원경 등 행정단위를 달리하는 촌들이 1인의 필체로 일괄 정리되어 있다.
문서상의 상태로 볼 때, 촌락문서는 당현과 서원경을 행정적으로 총괄할 수 있는 웅천주(=웅주) 혹은 중앙에서 작성하였을 것이다. 나아가 촌락문서에는 을미년(=695년)에 촌의 호구를 조사한 사람들을 '공등(公等)'이라는 3인칭으로 부르고 있고(A촌), 또 감소부분의 우마 항목에는 모두 '아뢰다(白)'는 형식으로 보고되었다.
이러한 문투로 볼 때, 하위 행정단위에서 보고된 1차적인 문건이 있었고, 촌락문서는 이를 기초로 하여 재작성되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현 소속의 A·B촌, 소속 불명의 C촌, 서원경 소속의 D촌 사이에 세부항목의 용어가 다른 점은 촌락문서 작성자가 참고한 1차적 문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 1차적 문건은 '현'을 단위로 하여 군현제를 통해 웅천주나 중앙에 보고되었고, 웅천주나 중앙에서는 이 문건을 기초로 촌락문서를 재작성하였다고 여겨진다.
당이나 고대 일본의 광역 행정단위인 주(州)나 국(國)이 중앙에 보내는 행정문서를도 신라처럼 대체로 군현제에 의해 하부단위에서 수합된 문서들에 기초하여 작성된다. 행정의 편의를 위해 하부단위 문서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그 앞에 상위 행정단위 전체를 통계처리한 '목록'만을 덧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촌락문서 역시 중국이나 고대 일본처럼 하부단위에서 보고된 1차적인 문건 앞에 목록류를 첨부하는 방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촌락문서 작성의 대상이 된 촌락들은 주(州) 예하의 모든 일반적 촌이 아니라, '특별한 촌'이었을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웅천주나 중앙에서 특별한 촌만을 골라 이를 일괄적으로 재정리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와 관련하여 서원경 소속의 D촌이 주목된다. 서원경은 왕경처럼 6부 행정조직이 갖추어져 있었기에, D촌은 이 부(部)·리(里) 주변의 자연촌으로서 서원경의 행정적 지배를 받던 촌락으로 여겨진다.
만일 촌락문서가 웅천주 예하의 전체 군현과 촌을 일괄적으로 정리한 문서였다면, D촌에 앞서서 소경의 부·리 조직이 먼저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현'이라는 용어로 볼 때, 촌락문서의 D촌은 서원경 관할 하의 맨 처음 기록이다. 그러므로 D촌은 서원경 소속의 촌 가운데서도 선별된 '특별한 촌'이다.
한편 촌락문서의 A촌에는 '내시령답'이 기록되어 있고, C촌에도 '전 내시령'이 잣나무의 식수를 감독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즉 촌락문서에 기록된 촌들은 '내시령'과 공통적으로 관련된 촌락들이라 하겠다. 내시령의 실체를 구명한다면, 촌락문서의 용도를 해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 다케다는 '내시령=내성의 장관인 내성사신'으로 본 뒤, 촌락문서를 '내성의 녹읍대장'으로 파악하였다. 그런데 이 견해의 출발점은 촌락문서의 작성연대를 815년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촌락문서는 녹읍혁파 뒤인 695년에 작성되었으므로, 이 문서를 녹읍대장으로 이해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강진철·김기흥은 '내시령=내성에서 각 촌락의 수취를 위해 파견한 사령'으로 여기고, 촌락문서의 촌을 왕실직할촌으로 명명하였다. 그런데 내시령이 내성과 관련된 관인이라는 증거가 없으므로, 보다 다각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촌락문서 각 촌의 우마 보유 수가 후대의 일반적인 촌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점, 전답에서 논이 차지하는 비율도 후대에 비해 월등하다는 점 등을 보면, 촌락문서의 촌은 왕실에 의해 특별히 선정되고, 경영된 지역으로서 '왕실직할촌'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이상의 면들을 종합하면, 촌락문서의 촌은 군현제적 지배를 전제로 하여 내성의 지배가 관철되는 특수한 촌락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내시령은 직명상 내성과 관련된 관인으로 여겨진다.
촌락문서의 촌들이 특수한 촌락임을 알려주는 사례는 이외에도 더 있다. 첫째, 각 촌의 둘레를 기록하여 촌역(村域)을 표시한 것이다. 신라나 그 후대 왕조들에서 왕도·성곽·도서를 제외하고 둘레의 보수(步數)로 촌역을 나타낸 경우는 희박하므로, 이는 특수한 처우를 받고 있음을 말한다.
둘째, A촌에 거주하지 않는 촌주에게 A촌의 토지가 촌주위답으로 지급된 것이나, 관모전답이 일정한 비율(=3%)로 각 촌에 할당된 점을 볼 때, 각 촌의 토지는 국가에 의해 일차적으로 지배당하였음을 말한다.
셋째, 경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던 D촌의 호들이 가장 부유한 A보다도 많은 노비를 보유하였는데, 이는 D촌의 노비를 실제로 보유한 'D촌에 등재되지 않은 노비주'가 존재하였음을 말한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촌락문서의 노비가 양인과 대등하게 합산된 것은 노비도 수취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촌락문서이 노비는 무엇 때문에 수취 대상이 되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고대 일본의 왕실 이궁들이 소재한 촌들에 거주한 '촌노비'들이 양인과 동일한 액수로 '관노비 구분전'을 받아 경작하였고, 왕실토지의 일상적 관리와 생산물의 보관 및 운반 등에 종사한 사실이 주목된다.
신라의 경우도 김유신·김인문에게 사여한 '본피궁'(=신라왕실의 이궁)의 전장 및 노복이 그와 유사한 예가 아닐까 한다.
한편 촌락문서의 촌역 표시는 해인사의 결계장(結界場)이나 통도사 농장의 영역을 표시하는 문건 속에 계승되고 있다. 따라서 촌락문서의 촌역을 표시한 '周○步'는 각 촌이 지배하는 권역을 표시한 것이라기보다는, 통도사의 영역 표시처럼 군현으로부터 독립된 신라왕실이 지배하는 배타적인 권역을 표시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본다면, 양인과 대등하게 기록되어있는 촌락문서의 노비는 왕실 소유로 이해되며, 각 촌의 전답 역시 왕실의 강한 지배 아래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추론에 근거하자면, 내성이 통할한 신라왕실의 재정적 기초는 토지라기보다는 '촌 단위'로 설정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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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래 755년 혹은 815년으로 여겨지던 "신라촌락문서"가 695년에 작성되었다는 윤선태 선생의 놀라운 주장은 이제 통설의 지위를 확보하기에 이른 탁견이라 하겠습니다.
윤선태 선생은 촌락문서의 연월 표기 및 "화엄경론제칠질"의 유통과정을 통해 문서가 695년작임을 논증하고 있는데, 사실 후자는 빠져도 좋을 만큼, 전자에서 이미 향방이 갈렸다고 생각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윤선태 선생이 연월을 통해 695년작임을 주장하는 과정을 보면, 종래 학계에서 인지하고 있던 자료들을 인용했다는 점입니다. 우리 곁에 늘 있어 중요성을 간과하기 쉬운 문자자료, 그것을 간과하지 않고 면밀히 살펴보아 과감한 추론을 사실로 인정받게 한 윤선태 선생의 연구자로서의 자세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찬탄하고 싶습니다.
흔히들 중국과 일본에 비해 한국고대사는 저주라 불릴 만큼 사료가 적다고 하지만, 과연 이 없는 사료만이라도 곱씹어보고 되새김질해본 이가 얼마나 되는지 스스로에게, 나아가 여러분에게 감히 여쭙습니다.
이 분의 정치적 성향이나 개인적 취향, 나아가 인간적 면모와 무관하게 분명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