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는 측은지심을 더러, 아이가 우물에 빠졌을 때 사람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마음이라 하였다.
나는 자정에서 새벽 사이에 산책을 즐기는 버릇이 있다.
물론 내가 백수이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여하튼 오늘 새벽.
한 시경이었다.
항상 가던 코스로 발길을 내딛고 있는데, 웬 아가씨 한 명이 보도 블럭 위에 앉아 몸을 못 가누고 있었다.
새학기가 시작되고 오늘은 휴일밤인지라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있다.
더군다나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았다.
보는 순간 측은지심이 일어 '도와줄까?'란 생각이 들었다가, 그래도 제정신이 아닌 건 아닌 것 같아 일단 산책을 계속했다.
내가 산책을 하는 시간은 삼십여 분.
산책이 끝나고서도 이 아가씨가 여기서 헤맨다면 도와주리라 살짝 다짐을 해 보았다.
산책 내 눈에 이 아가씨가 눈에 밟혔다.
내 오롯한 산책은 이 아가씨로 인해 약간의 걱정을 동반한 채 불완전하게 막을 내렸다.
돌아오는 길.
차라리 이 아가씨가 없길 바랐다.
안전하게 귀가할 정도의 정신이 되었길 바랐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떡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걸 어떡해야 하나?'
아직 주위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닌다.
괜히 지나가는 행인 주제에 손 내밀었다가 범죄자 취급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이건 변명이지만, '그래, 한 번 더 다녀와도 이 상태면 그 때 도와주자.'란 생각으로 다시 길을 내쳤다.
다시 나선 산책이지만 기분이 좋을리가 없다.
어쨌건 비정상적인 상태로, 연약한 여인네가, 길바닥에 혼자 있는 것 아닌가?
개방적 공간은 개인의 자율적 행동을 용인하지만, 그만큼 타의적 행동이 작용하는 공간이다.
뭔 개소리냐면, 어쨌거나 범죄의 가능성이 사람을 위협한다는 말이다.
주위에 죄다 남자들만이 돌아다닌다는 사실도 불안감을 한층 더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나를 쳐다보는 그네들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다시 이십분 여가 지나고.
그 자리를 찾았더니 아가씨는 사라진 뒤다.
마음 속엔 차라리 잘 되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어쩔 수 없는 찝찝함이 남는다.
그 아가씨가 안전하게 귀가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또한 이 아가씨가 범죄와 접촉했다는 보장도 없다.
때문에 안도하고 불안해 한다.
나는 왜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는가?
그것은 주위 사람의 시선에 반응하는 내 소심한 성격 탓도 분명있다.
하지만 그러한 성격을 가일층 증가시켜 주는 것이 이 사회의 현실이란 것이다.
내가 그 아가씨에게 손을 내밀었다면?
그 아가씨 스스로도 그 친절에 대해 고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이 남자가 어떤 나쁜 마음을 먹고 접근하고 있는 것이라 불안해하지 않을까?
지나가던 사람들은?
내 더럽혀진 시선만큼 사람들의 시선도 매한가지란 생각이 든다.
측은지심.
사람이면 당연히 가지는 마음.
우물에 빠진 아이가 있으면 건저내야 한다.
그것이 양심이 아닌가?
오늘 난 우물에 빠진 아이를 보고도 지나쳤다.
두번을 지나쳤다.
난 과연 양심적인 행동을 했던가?
아니다.
모두 변명이다.
그것이 호의라면, 그리고 친절이라면,
차라리 경찰을 불러서라도 그 아가씨를 도와야했다.
나는 범죄의 가능성에 던져진 한 처자를 외면했다.
나는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마음이 아픈 새벽이군요.
용기를 조금만 더 내었더라면, 이런 찝찝함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을 건데.
부디 그 아가씨가 안전히 집으로 귀가하셨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