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정제는 일을 막무가내로 처리하지 않고 확실하게 의견을 모으기 위해 호부에서 논의하도록 하며 신중을 기했습니다. 호부에서는 이유균의 의견이 옳을듯 하다고 그들의 의견을 밝혔는데, 호부의 승낙이 나왔음에도 옹정제는 또다시 문제를 더 검토하도록 했습니다. 1무(畝 : 토지를 재는 단위)의 크기는 일정한가? 질이 떨어지는 토지에 대해 동일한 세금을 매기는것은 부담이 크지 않는가?토지를 파는 사람이 매입자를 대신하여 토지세를 납부하면서 정세를 내는 일도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신중을 기한 것입니다. 이유균은 논의에 논의를 걸쳐 토지를 상중하 3등급으로 매겨 차등적으로 징세하도록 해 불공평함을 없앴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때서야 옹정제는 이유균을 칭찬하고, 바로 다음 해부터 이 정책을 시행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만 이유균은 걱정이 많았습니다. "부자들이 이 제도를 반대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방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는 걱정하지마라. 소신껏 시행하라." 그리하여 이유균이 있는 직예성이 이 일이 시행되었고, 황병도 산동성에서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곧 청나라 전역으로 제도가 시행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정은제(地丁銀制)입니다. 하지만 우려는 현실이었습니다. 기득권 층이 반대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절강성에서 지주들은 순무를 찾아가 매우 거친 태도로 항의하여, 절강 순무 법해(法海)는 겁에 질려 정책의 실행을 미루고 맙니다. 1726년 전당현에서 치루어진 향시에 참가한 천여명의 응시생들은 지정은제 시행을 터무니 없다고 비난하며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상인들을 위협하여 파시를 하라고 협박했습니다. 파시는 상인들이 국가의 정책이나 지방관의 횡포에 반대하여 모든 장사를 그만두고 파업을 벌이는것으로서, 예전부터 관리에게는 파시를 당하는게 최대의 치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 당시 지방의 지배자들은 향신이었습니다. 그들은 중국의 과거에 합격하고 임관하지 않은 채 향촌에서 살고 있는 자 또는 향촌의 퇴직관리나 유력인사 등의 인물들로,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실질적인 향촌의 지배자였습니다. 향신들은 관과 연계하여 온갖 불법행위를 벌이며 정책의 시행을 막았습니다. 그들은 정세도 면제를 받았고, 사실상의 행정 권력의 일부를 점유하고, 지방 관리들조차 함부로 그들에게 손을 대지 못하고, 향신들은 관료 사회에 개입을 할 정도로 그들의 입지는 어마어마했던 것입니다. 1727년, 직예 동광현의 현령 정삼재는 이들의 기세에 질린 나머지,
"이곳의 악랄한 향신들이 각종 구실로 관을 위협하여 지세를 내지 않고 백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라고 보고했습니다. 옹정제가 개혁을 시행하려고 한다면, 이 향신들을 모두 적으로 돌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옹정제는 기꺼이 그렇게 했습니다. 향신들의 기세에 밀리기는 커녕, 오히려 옹정제는 지방 관리들에게 "눈치를 보며 폐딴을 혁파하지 않거나, 탄핵, 비방을 할시에는 중벌을 내릴 것이다." 라고 경고하여 정책을 밀고 나갔습니다. 또한 향신에 대한 면제는 오직 그 향신 개인에게만 있다는것을 천명하면서, 만약 그 이상의 탈세 행위를 한다면 향신들도 모두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모든 사민이 부역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생원들도 백성들과 똑같이 부역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남 축현이라는 지역의 지현 장가표는 "생원들도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부역을 담당해야 한다" 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즉시 생원들과 향신들에게 엄청난 공격을 받았습니다. 생원들은 장가표가 과거 평민에게 돈을 빌린적 있다는 개인적인 사실까지 끄집어 내려서 그를 비난했는데, 진상을 파악한 옹정제는 역으로 그 생원들에게 처벌을 내렸습니다. 향신들은 옹정제의 정책에 자기내들끼리 똘똘 뭉쳐 조직적인 반대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산동성의 향신들은 거의 대부분이 한꺼번에 지세를 납부하지 않으면서 지방관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지세를 내면 대장부가 아니다." 라는 말까지 나돌며 반발이 극심했습니다. 이에 옹정제는 산동의 진사, 거인, 수재, 감생 등
1천 4백여 명의 공명을 모두 박탈 하는 초강경 정책으로 일관했습니다. 산동 뿐만 아니라 호광 지역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있었고, 계주에서는 지세를 얼른 내놓으라고 향신들을 재촉한 진순예라는 관리가 역으로 향신들에게 엄청난 공격을 받고 탄핵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비난과 욕에도 불구하고 옹정제는 진순예를 처벌하지 않고 그를 응원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소신 있는 지방관리들은 큰 힘을 얻어 온갖 위협을 무름쓰고 정책을 밀고 나가게 됩니다. 한편 옹정제는 동시에 즉위 후 3,4년동안 무려 1천만냥에 가까운 지세를 면제해주거나 탕감해주어 백성들의 큰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빈민 구제 정책도 펼치자 백성들은 옹정제의 정책을 크게 지지하며, 오히려 이번에는 자신들이 직접 나서 지정은제를 반대하는 향신들과 대립하는 용기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각지에서 향신들과 가난한 농민들이 충돌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이위 궁지에 몰린 향신들은 발잘적으로 대응하며, 향시를 거부하고 답안지를 찢어버리는가 하면 소작인을 발로 차서 죽이거나 지현을 협박하고 온갖 거짓죄를 꾸며내어 익명으로 상소를 올려 옹정제의 정책을 지지하는 측근들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옹정제의 측근들 역시 그들이 모시는 상관 만큼이나, 악명 따위에는 아랑 곧하지 않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게중에서도 이위는 향신 측의 대규모 시위집회를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개 패듯이 두들기며 쫒아버렸습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막장에 가까운 일이나 ─ 시위를 두들겨서 진압했으니 ─ 그 당시에는 오히려 시위를 일으킨 계층이 기득권이라는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당연히 이위는 온갖 중상모략에 향신들의 비난을 한번에 받았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이 할 일만 했습니다. 엄청나게 단호한 정책들려 결국 향신들의 기세도 점점 수그러들었습니다. 결정적으로 향시를 거부하는 왕손, 범호라는 감생 두명을 아예 처형하기까지 하자, 향신들도 결국 겁을 먹고 다시는 소동을 일으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지정은제는 드디어 전중국에서 시행되기에 이릅니다. 효과는 바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땅이 없는 농민들은 더 이상 지세의 부담에 짓눌리며 도망갈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들이 모두 호구조사에 집계됨과 동시에, 고구마 등의 작물이 전해지고 평화가 유지됨에 따라 청나라의 인구는 경이적인 수준으로 증가 추세를 겪게 됩니다. 20년, 30년 사이에 천만, 이천만 씩 인구가 엄청난 수치로 증가하며, 그에 더불어 국가의 부도 급증했습니다. 50~60년 사이에 1억명의 인구가 증가하는등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 힘든 수준의 인구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그 대신 옹정제는 오랜 시간 동안 악명을 떨쳤고, 각종 출처가 불분명한 음험한 소문이나 악질적인 면모로 이야기가 전해져왔습니다. 옹정제가 이룬 업적들은 건륭제에게 포커스가 맞추어졌고, 강희제를 시해했다는 소문이 퍼져 패륜아라는 면모가 강조되는가 하면 유독 형제들에 대한 숙청이 강조되어 잔인하고 나쁜 군주로 내몰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재평가가 이루어진 뒤입니다. 펌 from 매그니토 in 디시인사이드 삼국지갤러리 ============================================================================================ 아..역시 옹정제 느님은 좀 쩌는 듯;;;; 요즘 바쁘다보니 역게에 방문도 잘 못하고 있고 글도 못 읽고 있습니다. 그저 펌글 하나 던져놓고 다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