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비잔틴-페체네그 전쟁 Total War (3)
게시물ID : history_49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0
조회수 : 94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7/06 08:19:45
지난 글 입니다. : 비잔틴-페체네그 전쟁 Total War (2) (파란 글자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지난했던 1050년은 지나가고 1051년이 다가왔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콘스탄디노스 황제는 동방군 사령관들에게 언질을 넣어 유럽으로 군대를 이송시킬 것을 지시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체네그 인들이 다시 남하해서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약탈하자 제국 정부는 그동안 모은 군대를 규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군대는 용병으로 고용된 프랑크 및 바랑기안 동맹군(포에데라티)에 황제가 검은 산과 카르카로스 등의 텔루크 테마에서 동원한 2만여 명의 궁기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군대의 총지휘관으로 ‘용병지휘관(Ethnarches)’에 제수한 브린니오스가 임명되었습니다. 이 군대는 페체네그를 상대로 파견되었으며 이미 전선에 뛰어들었던 ‘바랑기안 지휘관’(Akolouthos)인 미하일의 군대와 합류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미하일은 브린니오스보다 일찍 파견되었으며 페체네그 군과 전면전을 피하고 적의 진공을 방해하라는 명령을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소규모 접전이 계속 이어져서 미하일의 군대는 골로이(Goloe)에서 마주친 페체네그 군을 전멸시켰고 토플리초스에서 마주친 페체네그 군 파견대를 패배시켰으며 이후 브린니오스의 군과 합류했습니다. 페체네그 군의 남하와 미하일의 활약상 전선이 다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와중에 제국 정부는 분열책을 시도했습니다. 황제는 감옥에 갇혔던 케겐을 석방해 페체네그 군에 화의를 청하면서 분열시킨 후 일부를 제국측으로 끌어들일 계책을 마련했습니다. 케겐이 페체네그 족 가운데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케겐은 페체네그 인들로부터 안전을 보장하는 맹세를 받고 제국의 대사로 파견되었습니다만 도착하자마자 살해되고 그 시신은 토막나버렸습니다. 페체네그 인들도 케겐이 오면 어떠한 일이 생길지 대략 예상할 수 있었기에 ‘제국 대사’이자 ‘로마의 귀족’이며 동시에 ‘페체네그 족의 신망을 얻은 사령관’으로서의 케겐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고 결국 그 종결은 파국으로 끝났습니다. 한편 페체네그의 파견대가 콘스탄디누폴리 근교의 카타시르타이란 마을까지 진격해 들어오자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고인이 된 조이 황후의 침실 관리인이었던 환관이며 현자로 불리는 요안니스에게 일군을 맡겼습니다. 요안니스는 페체네그 인들이 대량으로 음주한 뒤 술에 곯아떨어진 틈을 타서 야간 기습을 감행해 그들을 학살하고 그 수급을 수레에 실어 황제에게 헌상했습니다. 소소한 전투에서의 작은 승리 얼마 후, 마침내 오랫동안 제국 정부와 황제가 고대해왔던 대승의 소식이 전해져왔습니다. 브린니오스와 미하일의 연합군은 자신들의 군대가 두려워 트라키아에서 마케도니아로 주둔지를 옮긴 페체네그 군의 위치를 파악했습니다. 미하일과 브린니오스는 밤중에 몰래 아드리아누폴리를 출발하여 군대와 함께 카리우폴리에 도착했으며 주력군을 피하라는 황제의 명과 달리 회전을 통해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곧 연합군은 페체네그 군이 행군하고 있을 때 돌격해 들어갔으며 렌타키온 산까지 이들을 추격하며 무거운 손실을 입혔습니다. 전면전에서 이 정도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전쟁 발발 후 처음이었습니다. 당연히 전황은 순식간에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미하일은 하이모스 산맥 이남의 시데라 지역에서 페체네그 군을 몇 차례 더 격파했으며 페체네그 인들이 카리우폴리 회전 이후 그 예봉이 확실히 무뎌짐에 따라 마침내 하이모스 산맥 이남의 지역은 페체네그 군의 약탈이 근절되었습니다. 이 승리가 얼마나 의미가 큰 것이었는지는 이후 기록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카리우폴리 회전 이후 2년간(1051-1052) 페체네그와 관련된 어떠한 기록도 기록되지 않았던 것이죠. 그리고 1053년에 다시 나타난 페체네그 관련 기사는 시데라 이북의 페체네그를 정복하라는 황제의 명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국의 역습(?) 2년이 지난 1053년, 콘스탄디노스 황제는 이제 마지막 한 번 더 페체네그 군과 싸워 전쟁을 종식하기를 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다시금 동방과 서방의 모든 지역에서 군대를 동원했고 이 군대를 카리우폴리의 영웅, 미하일에게 맡겼습니다. 또한 불가리아의 행정관인 바실리오스도 불가리아 군을 동원해 페체네그 원정에 참전했습니다. 하이모스 산맥을 건넌 제국군은 대 프리슬라프 근교에서 숙영했으며 이후의 작전에 대한 회의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어쩐 일인지 일제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보급품이 그만 다 떨어지도록 공격이 연기되자 군대는 순식간에 흔들렸고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를 조장한 것은 이 원정에 참전한 불가리아 행정관 바실리오스였습니다. 그는 안 그래도 바실리오스는 비밀리에 미하일을 꼴보기도 싫다고 말한 바 있었습니다.(...) 거기다 황제의 사람인 미하일이 원정을 성공으로 이끌면 전쟁의 승리를 직접 일군 셈이 되고 큰 영광을 얻을 것이기에 이에 질투를 멈추지 않아 끊임없이 전투를 거부했으며 페체네그를 공격하지 말라는 황제의 명을 이유로 대며 자신의 작전이야말로 공공선에 입각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동시에 나중에 군대에 혼란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계속해서 후퇴하자고 졸라댑니다.(...) 지휘부가 혼선을 빚으면서 원정군 전체가 흔들리자 페체네그 군 총지휘관인 티라크 왕은 로마군이 대 프리슬라프의 포위를 풀고 후퇴할 것임을 예측해냈으며 군대를 파견해 로마군의 퇴로를 미리 장악하고 매복하게 했습니다. 결국 상당수 내지 대다수의 로마군이 궤멸당했으며 원정에서 최고의 X맨으로 자리매김했던 바실리오스도 퇴각이 확정되자마자 자신의 명마에 올라타 잽싸게 도주하다가 도랑에서 낙마한 후 몇 명의 페체네그 군에 둘러싸여 살해당하면서 데뷔전을 끝으로 은퇴했습니다.(...) 한편 미하일은 많은 군사들이 사로잡히거나 학살당하는 와중에서도 패잔병들을 통솔하며 아드리아누폴리로 귀환하였습니다. 천려일실이라더니(...) 이러한 비참한 말로의 와중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장군도 있었으니 그가 바로 25년 뒤에 제위를 찬탈하게 되는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였습니다. 역사가 아틸리아티스가 니키포로스 3세에게 헌정한 칭송문에 의하면 당시 니키포로스 장군은 전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지휘부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군대를 질서정연하게 후퇴시켰습니다. 장군은 강을 따라 행군하면서 끊임없이 정찰대를 파견하며 안전을 확보했습니다. 사령관의 말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을 때도 장군은 자신의 검과 방패를 들고 도보로 걸었습니다. 나중에 세 마리의 말을 발견했을 때도 니키포로스는 자기만 탈출하는 것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의 힘줄을 끊어버리는 행동을 통해 자신의 군대와 함께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점까지 계속 싸웠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군대는 11일간 영웅적으로 항전하며 남하했고 마침내 아드리아누폴리에 도착했습니다. 니키포로스가 보여준 인내와 용맹에 페체네그 인들조차도 존경심을 보였다고 언급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회심의 원정이 또다시 어설프게 마무리되니 콘스탄디노스 황제는 다시 실의에 빠졌습니다. 이제 황제는 재차 새로이 국민군과 용병을 모아 ‘페체네그 인종’을 모조리 쓸어버릴 때까지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첩자를 통해서 티라크 왕과 그 지휘부로 전해졌으며 그렇지 않아도 보타니아티스가 후퇴 과정에서 보여준 광경에 깊은 인상을 받은 페체네그 지휘부는 그만 물러날 것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콘스탄디누폴리로 파견된 페체네그 대사가 평화를 구함으로써 양국은 30년간의 평화에 합의하였습니다. 역사가 아틸리아티스는 황제가 더 이상 군대를 파견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많은 재화와 명예를 페체네그 지휘부에 선사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했다고 서술했으나 페체네그 대사의 발언을 직접 기록한 스킬리치스, 그리고 새로운 군대를 모았다는 스킬리치스, 글리카스의 기록이 좀 더 신빙성이 있습니다. 한편 구체적인 평화조약의 안은 확인할 수 없으나 일단 양쪽간의 포로 송환과 페체네그 족의 도나우 강 이북으로의 후퇴 정도는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렇게 제 1차 페체네그 전쟁은 간헐적으로 계속되면서 약 7년 만에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로 종결되었습니다. 이 전쟁을 거치면서 국가의 많은 재부가 끊임없이 소모되었습니다. 그 직접적인 증거로 황제 즉위 무렵과 초기 무렵에 80%대 후반에서 90%대 초반의 순도를 유지하던 ‘기준 금화’가 전쟁 기간 동안 계속해서 순도가 낮아졌으며 1054년의 마지막 순도 저하가 일어난 후 약 70%대 초, 중반선에 고정되었습니다. 재정적으로나 국가 전체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나 점차 위기가 도래하고 있었고 이를 넘기기 위해서는 지출을 줄이면서 재정을 개혁하는 방법을 통해 경제 회복을 추구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디노스 9세 황제는 1055년 1월에 사망하면서 그 과제는 후대의 황제들에게 인계되었고 콘스탄디노스 10세, 이사키오스 1세, 미하일 7세 등이 여러 방법을 통해 경제 회복을 시도했으나 불안정한 국방 정책, 국제 정세의 급변과 내부 군벌의 준동 등에 의해 파행을 지속하였고 마침내 기존 체제는 1070년대와 1080년대에 완전히 붕괴되었고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대략적으로 역사적 의미를 찾아보면 제 1차 페체네그 전쟁의 의의는 이러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페체네그 족과의 혈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장 1059년에 헝가리-페체네그가 연합해 제국을 침공하자 이사키오스 1세가 이들을 물리치게 되고 1086년 12월에는 페체네그가 다시 도나우 강을 넘어 쳐들어오면서 6년에 걸친 제 3차 페체네그 전쟁이 발생했고, 1121년에 마지막 4차 페체네그 전쟁이 비잔틴 제국의 승리로 종결됨에 따라 70년에 걸친 비잔틴-페체네그 전쟁은 마침내 완전히 끝나게 됩니다. 즉 이 글이 끝나기에는 아직 멀었다는 것이죠.(...)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