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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 경제사' 녹읍제의 성격과 그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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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Lemon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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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198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7/05 21:49:21
지난 글 : '한국 고대 경제사' 신라 중고기 결부제의 시행과 그 기능 (파란 글자를 클릭하셔도 이상한 나라로 안 갑니다. 안심하고 누르셔도 됩니다.) 1. 녹읍제의 성격 1) 관료전(官僚田)과 촌주위답(村主位畓) (1) 공전(公田)과 사전(私田) "신라촌락문서"를 살펴보면, '촌주위답'은 '연수유전답' 안에 포괄되지만, '내시령답'과 '촌관모전답'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내시령답과 촌관모전답은 연수유전답과 소유관계가 다르다. 연수유전답은 왕토사상에 근거하여 농민들의 토지는 모두 왕이 수여한 토지라는 관념이 반영된 토지지목이다. 이에 비해 722년(성덕왕21)에 백성들에게 지급된 정전(丁田)은 조세수취 확대를 도모하기 위해 일회적으로 지급된 토지이기에 연수유전답과 성격이 다르다. "봉암사지증대사탑비"를 보면 경문왕의 누이 단의장옹주가 867년(경문왕7)에 그녀의 읍사(邑司) 안에 위치한 안락사에 토지와 노비를 희사하자, 879년 지증대사도 자신의 소유지(=我田)를 안락사에 희사하였다고 한다. 또 "개선사석등기"에 891년(진성왕5) 개선사의 승려 입운이 땅을 매입한 사례나, "매계집"에 890년~894년 사이에 해인사가 전지를 매입한 사실이 나와있는 점 등을 감안하면, 개인 소유지, 이른바 아전(我田)은 소유주 임의대로 매매하는 것에 커다란 제한이 없었음을 시사한다. 반면 "대숭복사비"를 보면 798년(소성왕1) 원성왕의 능묘를 조성할 땅이 공전(公田)이 아니었기에 그 값을 지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 땅이 공전이라면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신라의 공전(公田)은 국가나 국가기관이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토지, 즉 국·공유지를 말한다. (-> 신라의 정전이 실제 백성들에게 지급된 것인지, 아니면 백성들이 소유한 이른바 민전을 국가가 공인해준 조치에 불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관련 논문의 요약글에서 대략 설명을 했다고 여겨지므로 부언하지 않겠습니다만, 별다른 근거나 각주도 제시하지 않고 큰 주안점을 단정해버리는 태도는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2) 관료전과 촌주위답의 성격 연수유전답은 백성들의 '아전=사전(私田)'이므로, 연수유전답에 포괄되지 않은 내시령답은 공전(公田)이라 하겠다. 내시령은 내성(內省)에서 조조(租調)의 수취와 그것을 운반하기 위해 파견된 하급관리, 즉 '내성의 사령'으로 여겨진다. 즉 내시령은 관리이므로, 내시령답은 문무관료전이다. 종래에는 687년(신문왕7)에 지급된 문무관료전이란 당이나 고대 일본에서 관료에게 지급한 직전(=직분전)의 일종으로 이해해왔다. 위진남북조시대나 수당대, 나아가 고대 일본의 율령국가시기 직전은 녹봉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관리들에게 분급되었다. 고대 일본의 경우 직분전은 농민들에게 경작케 하여 그로부터 임조(賃租: 수확물의 1/5)를 받거나, 국가로부터 녹력(祿力)으로 지급받은 사력(事力)을 활용하였다. 당에서 직전은 그것이 소재하는 해당 주현의 지방관이 농민들을 동원하여 경작케 하거나, 관리가 전인(人+田/人)에게 직전을 경작케 하고 지자(地子)를 징수하는 방식이었다. 신라 역시 당이나 고대 일본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역역의 대역(代役)으로 인정해준 사력(事力)의 노동력이나 농민들의 요역노동에 기초하여 문무관료전이 경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687년에 국·공유지(=공전)를 문무관료전(∋내시령답)으로 분급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통일전쟁이 끝난 이후, 국가가 황폐한 땅이나 진전화된 토지를 개간하기 위해 관리들에게 문무관료전을 지급했을 것이다. 또 비교적 적은 액수를 세조(歲租)로 받던 하급관리들의 경제적 대우를 개선하기 위한 의도로 문무관료전을 지급하기도 했을 것이다. 촌락문서에 연수유전답에 포괄되지 않는 토지지목으로 '촌관모전답'이 있다. 여기서 생산된 곡물은 촌의 자체 운영비에 충당되었을 텐데, 촌관모전답은 각 촌의 총 전답면적 가운데 3% 정도를 점유하고 있다. 촌관모전답은 촌의 총 전답면적 가운데 일정 비율을 설정한 토지지목이기에 역시 공전이라 하겠다. 내시령답·관모전답과 달리 촌주위답은 연수유전답에 포함되어있다. 따라서 그것은 사전이고, 촌주의 소유지를 촌주위답으로 설정한 것 같다. 문무관료전인 내시령답이 연수유전답에 포함되지 않았고, 촌주위답이 연수유전답에 포함된 것을 볼 때, 촌주위답은 관료전의 일부가 아니며, 나아가 촌주가 관료전을 지급받는 관리가 아님을 말한다. 따라서 촌주는 녹읍이나 녹봉의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색복지에 촌주 계층을 4~5두품에 준하여 대우했다고 한 것을 보면, 촌주들이 관료전이나 녹읍을 받지는 못했지만 어떠한 경제적 대가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촌주는 자신의 토지, 즉 촌주위답의 조세를 면제받은 것이 아닐까 한다. 2) 세제와 녹읍의 지급 내용 (1) 수조권설의 문제점 종래 녹읍의 수취 내용에 대해서는 ①조세 및 역역, 공부까지 모두를 망라(김철준, 강진철), ②조세를 수취할 수 있는 수조권에 국한(박시형, 이경식, 이인재, 강봉룡, 김기섭), ③조세 수취를 제외한 역역의 징발권, 공부의 수취권, 우마에 대한 지배권(요시다, 다케다, 기무라)이라는 견해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가운데 ③설은 촌락문서를 815년에 제작된 문서라 하여, 녹읍관련 문서로 본 데서 논의가 출발한다. 하지만 최근 촌락문서가 695년에 제작되었다는 견해도 발표되었고, 늦게 잡아도 755년의 산물로 보인다. 695년이든 755년이든 당시 신라에서 녹읍은 혁파된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녹읍관련 문서로 본 ③설은 문제가 있다. 일단 여기서는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제기된 수조권설(=②설)을 검토한다. 수조권설을 체계적으로 주장한 학자는 북한의 박시형이다. 박시형은 녹읍을 문무관료전(=직전제)과 등치시키고, 그것은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관료들에게 대행시킨 제도라 하였다. 이 견해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문무관료전이 수조지의 성격을 지녔을 뿐 아니라, 그것과 녹읍이 동일한 제도로 등치될 수 있는지를 검증해야 한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문무관료전은 국·공유지(=공전)를 관리들에게 분급한 직전이며, 관리들은 국가로부터 녹력(祿力)으로 지급받은 사력(事力)을 활용하는 방식 등으로 경영했다. 다시 말해 공전을 지급한 문무관료전을 수조지로 이해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나아가 문무관료전을 부세를 수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녹읍과 등치시키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남한에서 수조권설을 체계적으로 주장한 이는 이경식이다. 그는 문무관료전 지급을 일회적인 토지 분급으로 보아, 박시형처럼 직전으로 보는 견해에 반대한다. 그리고 녹봉과 녹읍이 서로 대치되는 보수제로서, 녹읍은 일정한 면적의 토지, 즉 수조지를 지급한 것이며, 녹읍주(=관리)는 수확량의 1/10에 해당하는 전조를 거두어 녹봉으로 충당했다고 하였다. 녹읍을 수조지 분급으로 이해한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고려시대 전시과처럼 일정한 면적 단위, 즉 결부 단위로 토지를 분급한 것임을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799년(소성왕1) 청주 거로현을 학생녹읍으로 삼은 것이나, 고려 초기에 군현 단위로 녹읍이 지급된 점을 보면, 신라에서는 일정한 면적 단위가 아니라 군현 단위로 녹읍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소유권의 귀속처에 따른 공·사전 개념이 쓰인 사례는 많지만, 수조권의 귀속처에 따른 공·사전 관련 자료는 없다는 것도 참고가 된다. 녹읍이라는 어의 자체도 토지 자체의 분급이라기보다는, 고을(邑)을 녹으로 지급한다는 의미이다. '수조권설'의 기본 전제는 통일신라시기에 결부 수에 근거하여 전조(田租)를 부과하는 내용의 세제를 실시했다고 이해한 점에 있다. "고려사"식화지에는 태조 왕건이 궁예가 구제(舊制)를 따르지 않았다고 하면서, 1경(頃)의 토지에서 조세 6석(碩)을 거두라고 함과 아울러, 십일세를 시행하라고 언급하였다. 이를 종합하면 고려 태조대에 토지의 결부 수에 따라 수확량의 1/10에 해당하는 전조를 징수하는 제도가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통일신라시기의 수조권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이때의 '구제=통일신라의 법제'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동일한 내용을 전하는 "고려사절요"에서는 이를 '천하통법'이라 하였고, 고려 공민왕대의 백문보는 십일세를 한대의 제도라 하였다. 이를 보건대, 태조 왕건이 언급한 구제, 즉 천하통법을 통일신라의 세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2) 총체적 수취권설 비판 김철준과 강진철 등은 식읍과 마찬가지로 녹읍에도 총체적 수취권이 부여되었다고 보았다. 최근 박찬흥은 "고려사"태조원년 8월 신해조에 나오는 '봉토를 나누어 준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을 들어, 이를 주대의 채읍과 연관시켜 녹읍주에게 조용조의 수취군을 부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태조 왕건이 이처럼 언급하고 나누어 준 것은 금은 그릇이나 비단침구, 곡식 등이었다. 즉 포상 내역에 봉토의 지급이 보이지 않으므로, 이는 상투적인 어법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봉토를 나누어 준다'는 표현을 근거로 녹읍의 지배 내용이 총체적 수취권이었다고 유추한 견해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한편 신라시대의 녹읍 지배 내용이 식읍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이해하고, 녹읍의 수취내용이 조용조 전반에 대하여 수취할 수 있는 권리였다고 이해하기도 하는데,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녹읍과 식읍의 동일성 여부이다. 532년(법흥왕19) 금관국왕 김구해(=구형왕)에게 본국을 식읍으로 내린 것을 보면, 신라는 김구해에게 본국(=금관가야국)을 식읍으로 하사하면서 옛 지배권을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이를 통해 중고기에 식읍주에게 식읍지에서 부세를 징수할 수 있는 권리 뿐 아니라, 역역을 징발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식읍은 왕족이나 큰 공을 세운 귀족에게 하사한 특별 포상의 의미를, 녹읍은 관리에게 직무수행의 대가로 지급한 급여의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식읍주의 수취 내용이 녹읍주의 그것보다 더 포괄적이라 하겠다. (3) 녹읍의 지급 내용과 그 변천 이전까지 군·현 단위로 지급되던 식읍은 656년(태종무열왕3) 김인문에게 식읍 300호를 지급한 이후 봉호 수 단위로 지급된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사례가 주목된다. 춘추전국시대~한대 초기까지 식읍을 수여받은 제후들은 식읍지에서 포괄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한경제 무렵 오초칠국의 난 이후 식읍 지배권은 조세를 수취하는 권한에 한정된다. 이어 위진남북조시대에는 봉호 단위로 식읍을 지급했는데, 이때 지정된 봉호 수 가운데 일부에서만 조세를 수취할 수 있었다. 수·당대에는 지정된 봉호 수를 실봉(實封)과 허봉(虛封)으로 나누고, 실봉에서만 조세를 수취하도록 하였다. 중국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식읍지배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더 강화되어 식읍주의 실질적인 지배권이 점차 축소되었다. 이를 보건대, 신라에서도 봉호 수를 기준으로 식읍을 수여하면서 식읍주의 식읍지배에 대한 국가권력의 통제가 보다 강화되었다고 여겨진다. 이때 국가는 아마 지정된 봉호에서 부세 등을 수취할 수 있는 권한만을 식읍주에게 주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중대 무열왕대부터 식읍주의 지배 내용에 변화가 생겼다면, 녹읍 역시 변동이 생겼을 것이다. 689년(신문왕9) 녹읍을 혁파하고 관리들에게 '축년사조(逐年賜租)=해마다 조(租)를 녹봉으로 사여'하였다. 성덕왕대 김유신의 처를 부인으로 봉하고 매년 조 1000석을 지급케 한 것이 그 예이다. 또 정창원에 소장된 "좌파리가반부속문서"에는 관리들에게 12월의 월봉으로 쌀 2석을 지급하였음이 보인다. 당시 관리들에게 지급된 세조(歲租)나 월봉(月俸)이 곡물 지급이라면, 녹읍의 혁파 이전과 부활 이후의 수취내용 역시 곡물 징수에 한정된다고 볼 수 있다. "보림사보조선사탑비"를 보면, 859년 장사현의 지방관이던 김언경이 녹읍을 '청봉(淸俸: 녹봉)'이라 표현하고 있다. 김언경의 녹읍을 굳이 청봉(=녹봉)으로 표현한 것은, 당시 그의 녹읍지에서 수취한 것이 곡물에 한정되어 녹봉과 별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식읍제의 변화양상을 감안하면, 녹읍에서 곡물만을 징수하게 된 것은 아마 무열왕대부터가 아닐까 한다. 무열왕대 이전에는 곡물 뿐 아니라 다른 수취물도 징수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었을 것이다. 그와 함께 중고기 신라가 정남을 중심으로 하는 가호 단위로 균액의 조(租)와 조(調)를 부과하는 세제를 실시한 점, 중고기의 수취체계가 중대보다 미흡했을 것이란 점, 녹읍주의 지배 내용이 식읍의 그것보다 제한적이었을 것이란 점 등을 감안하면, 중고기에는 녹읍민에게서 노동력의 징발, 즉 역역의 징발 외에 가호 단위로 균액의 조(租)와 조(調), 즉 인세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를 녹봉 대신 지급받았다고 보인다. 물론 이때 인세를 거두거나 운반에 필요한 요역의 징발권도 녹읍주에게 부가적으로 부여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중고기에는 인세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를 지급하다가 중대에 이르러 조(租), 즉 곡물만을 수취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녹읍주는 어떻게 부세 가운데서 조(租)만을 분리하여 수취할 수 있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통일신라기에 호등제를 기반으로 각 촌마다 계연(計烟) 수를 책정하고 있던 점이 주목된다. 계연 수가 각 촌마다 설정되었을 것이므로, 현(縣) 안의 여러 촌을 분할하여 녹읍으로 수여하는 것도 가능하였을 것이며, 이때 녹읍주는 계연 수에 근거하여 자신이 수취할 곡물량을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이다. 2. 녹읍제의 변천과 그 배경 1) 녹읍의 혁파와 그 배경 (1) 연구동향과 문제점 신라의 급여제도는 '녹읍→축년사조(=세조)→월봉→녹읍'의 순으로 변화하였다. 녹읍은 689년(신문왕9)에 혁파되었는데, 그 배경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다. 강진철은 인민을 사적으로 지배하는 과거의 토지지배 질서를 부정하고, 토지와 인민을 국가의 지배 아래 두기 위함이라 하였고, 이희관은 녹읍주들이 녹읍을 통하여 지배력을 확대·강화하려 하자, 국가가 녹읍을 혁파한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종래의 견해는 통일 후 신라정부가 농민에 대한 지배력을 왜 강화시키려고 했는지가 설명되지 않아 문제가 있다. (2) 신라정부의 지배체제 안정책 통일전쟁이 끝난 뒤 신라정부는 피폐해진 농토와 농업생산 기반을 다시 개간하거나 복구시키고, 농민들의 부세와 요역 부담을 줄여주었다. 촌락사회와 농민들의 경제가 안정되자, 신라정부는 촌락이나 농민, 전국의 토지에 대한 국가권력의 통제를 보다 강화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중대에 촌락 및 지방사회에 대한 국가권력의 통제력이 한층 강화된 양상을 보여주는 자료가 "신라촌락문서"이다. 이를 보면 신라정부는 허가 없이 촌락민이 이동하는 것을 제재하였고, 촌락의 통치대상 전반을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통제는 '주-군-현'으로 이어지는 중대 지방통치체제의 확립과도 관련된다. (3) 녹봉제도의 개혁 매년 곡물을 녹봉으로 지급하는 세조제(歲租制)의 시행은 정부재정이 충실할 때에 가능하였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백제 전 지역과 고구려의 일부를 영토로 편입하면서 재정수입이 획기적으로 증대하였다. 663년(문무왕3)에는 국가의 재정수입이 늘어나 (남산)신성의 창고에 곡물을 모두 저장할 수 없어, 신성 안에 장창(長倉)을 설치하여 우창이라 불렀다. 이와 더불어 문무왕대에는 조세 수입과 창고의 관리 및 출납업무를 담당하는 창부의 인원을 대폭 증원하였다. 국가의 재정수입이 늘어나자, 신라정부는 농민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급여제도 개편, 즉 진골귀족들이 조세 수취를 매개로 민을 사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녹읍제를 폐지하려 하였다. 좌·우사록관을 중심으로 급여제도의 개편을 준비한 다음, 687년(신문왕7) 먼저 관리들에게 문무관료전을 지급하고, 이어 689년(신문왕9) 진골귀족들에게 녹읍의 지급을 중단하고 세조를 지급하였다. 이에 따라 진골귀족들의 녹읍지배를 매개로 하는 사적인 지배는 부정되고, 국가권력이 부세 수취를 매개로 모든 농민들을 직접 지배할 수 있는 지배관계가 성립되었다. 요컨대 녹읍 혁파 이후 무열왕계 왕실은 전제적 왕권을 확립한 데 비해, 진골귀족들은 국왕에게서 매년 세조를 급여로 지급받는 관료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띠게 되었다. 2) 재정궁핍과 녹읍의 부활 (1) 연구동향과 문제점 757년(경덕왕16) 신라정부는 월봉제를 폐지하고 관리들에게 다시 녹읍을 지급하였다. 종래 이에 대해서 여러 연구자가 견해를 피력하였다. 강진철은 구귀족들이 왕권과 신흥귀족세력을 누르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녹읍을 부활했다고 보았는데, 경덕왕대에 왕권이 약화되었음을 입증하기 곤란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희관은 진골귀족세력을 전제왕권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누고, 그에 따른 이해관계에 입각하여 녹읍의 부활 배경을 살폈는데, 녹읍의 혁파 배경은 국가의 대농민지배 강화라는 시각에서 다루었으면서도, 녹읍의 부활 배경은 그러한 시각에서 다루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강진철은 촌락사회에서 공동체적 관계가 분해되지 않아 '호' 단위의 경작수체(반전수수의 전국적인 시행)가 정착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율령체제의 재정구조를 확립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에 녹읍제를 실시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정작 신라에서 율령적 토지지배(=반전수수제)를 실시했는지에 대한 해명이 결여되어 문제가 있고, 더욱이 성산산성 목간을 통하여 4세기부터 읍락공동체의 해체가 진행되어 가호 단위로 부세를 부과하였음을 알 수 있으므로, 논리적 기반이 무너진 셈이다. 김기흥은 녹읍 부활 당시에 왕권이 위축된 증거가 없다고 하면서, 정확한 경제력 파악에 근거하여 마련된 계연 수치를 매개로 관리들의 녹봉에 해당하는 수조권을 각 지역과 연계시켜 분급하는 것이 행정적 번거로움을 덜 수 있기 때문에 녹읍을 부활시켰다고 보았다. 이 견해는 나름 설득을 가진다. 다만 녹읍이 부활된 지 10여 년이 지난 뒤에 지배체제가 동요된 것에 대한 설명이 궁색하다. 더욱이 이러한 조치가 이루어지려면 전국의 농민과 토지에 대한 계량적 파악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 조치가 이루어졌는지도 의문이다. 그런데 앞서도 이야기하였듯이 재정부족이 초래되면 세조의 지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고려후기에 관리들에게 녹봉을 제대로 지급할 수 없게 되자, 국가에서 대신 토지를 분급하는 녹과전 제도를 실시했던 일이나, 중국의 후한 말~삼국시대에 녹봉을 지급할 재원이 부족하여 공전(=직전)을 지급한 것이 그 일례이다. (2) 재정의 궁핍 성덕왕대에는 자주 자연재해가 발생하였다. 성덕왕대에는 정부의 적극적인 대처로 농민들의 유랑이나 도적화 현상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었지만, 이미 중대 초기와 같은 안정상과는 달랐다. 성덕왕이 자주 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수습했던 것은 농민의 불안한 동향과 관련된다. 당에서는 8세기를 전후하여 흉년과 가뭄·기근이 잦았으며 농민들의 도산도 잦았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당과 일본 역시 토지소유 집중화 현상이 심해짐에 따라 농민들의 도산이 급증하였다. 이때 당과 일본의 율령국가에서는 도산한 농민들에 대한 검괄사업(檢括事業)을 전개하거나, 촌락으로 돌아온 농민들에게 토지를 다시 분급해주어 안착시키거나, 또는 도망하여 정착한 지역에 그대로 안치시키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성덕왕대의 시책도 크게 다르지 않다. 722년(성덕왕21)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한 일이나, 성덕왕대 말기부터 진행된 패강 이남 지역의 개척은 수취원 확보와 직결된다. 하지만 경덕왕대에도 가뭄과 기근 및 전염병으로 인해 농민들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농민들의 도산으로 세입이 감소된 상태에서 불사에 소요되는 비용 등 재정지출이 증대되자, 재정의 궁핍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8세기 초의 상황을 보여주는 "좌파리가반부속문서"에 이미 관리들의 월봉을 체불한 사례가 보인다. 이에 따라 정치적인 위기상황 역시 도래했을 것이다. (3) 녹읍의 부활과 그 의미 756년(경덕왕15) 상대등 김사인이 시국 정치의 잘잘못을 극론한 이듬 해인 757년(경덕왕16) 3월 월봉이 없어지고 녹읍이 부활하였다. 녹읍은 일정한 지역에서 조(租: 곡물)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를 녹봉 대신 지급한 것이므로, 그것을 부활시키면 중앙재정의 지출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더욱이 녹읍을 부활시키면, 귀족관료들이 녹읍지에 가신 등을 보내 수조하게 되므로, 신라정부 입장에서는 조세 징수에 따른 여러 가지 행정적 지출도 막을 수 있었다. 혁파 이전의 녹읍은 진골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고위층을 대상으로 지급되었다. 하지만 부활된 녹읍은 하급관리들에게도 지급된 것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799년(소성왕1) 국학의 학생들에게 녹읍을 지급한 사례가 보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녹읍을 지급했다면, 진골관리 뿐 아니라 하급관리들에게도 녹읍을 지급했다고 볼 수 있다. "보림사보조선사탑비"에 859년 장사현의 소수(=현의 책임자)인 김언경이 청봉(=녹봉=녹읍)을 받은 것이 그 직접적인 예이다. 3) 녹읍지배의 성격과 그 변천 (1) 녹읍제의 시행 시기 중고기에 녹읍은 관리에게 인세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를 지급한 것이므로, 두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녹읍이 관리들에게 급여로 지급된 것이므로, 녹읍제의 시행은 관리들을 일원적으로 편제하는 관등체계의 정비를 전제로 한다. 다른 하나는 녹읍이 관리에게 인세의 수취권을 지급한 것이므로, 신라가 영역 내의 모든 농민에게 직접 부세를 수취할 수 있는 조세체계의 정비를 전제한다. 530년대에 부(部)의 성격이 단위정치체에서 왕경의 행정구역단위로 바뀌었는데, 이는 6부의 지배층이 국왕으로부터 관등을 수여받는 직업과 궤를 같이 하여 진행되었다. 이 결과 6부집단은의 지배층들은 왕권 중심의 일원적인 17관등체계에 편제되었다. 국가로부터 관리가 관등을 수여받으면, 응당 그에 따르는 녹이 있어야 하고, 그러한 면에서 보수체계의 일환으로 녹읍이 지급된 것이 아닐까 한다. 더욱이 신라가 복속 소국이나 읍락을 주 혹은 군·촌으로 재편하고, 거기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본격적으로 지배한 것은 530년대로 여겨진다. 따라서 양자를 종합하면, 관등제가 정비되고 지방관 파견을 통한 지방통치가 궤도에 오른 530년대부터 인세의 수취권인 녹읍을 지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2) 녹읍의 지급 기준 "삼국사기"색복지에 나오는 의관규정에 따르면 대아찬 이상의 관등 소지자는 그들이 관직을 제수받았는가에 무관하게 관리로 인정해주었음에 비해, 아찬 이하의 관등 소지자는 특정 관직을 제수받은 경우에만 관리로 인정해주었다. 고대 일본의 경우 3위 이상(=1그룹), 4~5위(=2그룹), 6위 이하(=3그룹)로 관위(=관등) 그룹을 3등분한 뒤, 2그룹은 3그룹이 받는 보수에 +a, 1그룹은 2그룹이 받는 보수에 +a를 받았다. 신라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따라서 대아찬과 그 이상의 관등을 소지한 관리들에게는 관등에 따라 세조와 녹읍을 지급하고, 만일 관등을 보유하면서 특정 관직을 받은 관리들에게는 관직에 상응하여 별도의 세조나 녹읍을 지급하였으며, 아찬 이하의 관등 소지자에게는 관직을 받은 자에 한하여 관직에 따라 세조나 녹읍을 지급한 것이 아닐까 한다. 대사나 나마(=내말)이 12월 월봉으로 똑같이 2석을 지급받았음을 전하는 "좌파리가반부속문서"는 아찬 이하 관리들이 관등의 서열이 아니라 관직을 기준으로 월봉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생각하면, 문무왕대에 강수의 관등을 사찬으로 올리면서 세조 역시 증봉시킨 것이 문제가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는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3) 중고기 녹읍지배의 성격 "삼국사기"열기열전을 보면, 중고기에 진골들이 사적인 관계에 있는 인물들을 관리로 천거하던 관행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열기가 김유신과의 연고를 기반으로 김유신의 아들인 김삼광에게 태수직을 요청하고 있는 사실을 고려하면, 진골귀족과 하급관리들은 대를 이어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이처럼 진골이 사적인 관계에 있는 가신이나 노비 등을 녹읍지에 보내 수취하고, 또 녹읍의 수취에 천거한 지방관의 도움을 받았다고 여겨지므로, 진골귀족의 녹읍지배는 단순히 부세를 징수하는 것에 그쳤다고 보기 힘들다. 다시 말해 원칙과 실질이 다르게 흐를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국왕은 녹읍에 대한 일정한 통제를 가하려 하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무열왕대 녹읍의 수취내용을 부세에서 조(=곡물)의 수취로 국한시킨 것, 그리고 아예 녹읍을 혁파한 것은 그 예이다. (4) 하대 녹읍지배의 성격 신라정부의 적극적인 대처에도 불구하고 8세기 중반 무렵이면 지배층에 의한 토지집적의 만연, 빈번한 자연재해 등으로 농민들의 도산이나 유망이 급증하였다. 당의 경우도 비슷한 위기가 왔다. 특히 안사의 난은 당의 기존 수취체제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타격이었다. 이에 당은 인정에게 조용조를 부과하던 종래 방식을 벗어나, 780년에 지세, 즉 전토의 무(畝) 수에 따라 세율을 달리 적용하는 양세법을 실시하였다. 다시 말해 8세기 중엽 이후 찾아온 위기상황 속에서 당은 인호세보다 토지세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세제를 개편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는 왜 토지세의 비중을 높이는 세제 개편을 단행하지 못했을까? 결부 수에 따라 1/10에 해당하는 전조를 수취하면, 자연히 진골귀족들의 사유지도 과세대상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 토지세 중심의 세제 개편은 진골 귀족들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방향으로 귀결되므로, 당연히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당시 토지의 생산성은 무척 낮았던 것도 토지세가 가지는 매력을 경감시켰다. 결국 당시 집권세력은 녹읍을 부활시켜 조세수취 권한을 지배층에게 떠 넘기는 방향으로 재정궁핌의 위기를 타개하려 하였다. ============================================================================================== 종합적으로 보자면, 신라 전시대를 관통하는 경제사의 얽히고 설킨 문제들을 정연하게 풀어낸 역작임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사실 이만한 깊이와 넓이를 가진 글을 쓴다는 건, 전덕재 선생처럼 신라 사회경제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매진해 온 연구자가 아니라면 힘들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크게 문제삼을 부분을 찾기보다는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는 선에서 그치고자 합니다. 우선 전덕재 선생은 이전 논문에서 통일신라기에도 수조권 지배는 실현되지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토지에 무게를 두어 수취체계가 전개되면, 자연스레 토지의 비척도가 문제되므로 전품이 나타나는데, 통일신라기에는 전품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게 주요 논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중대, 더 좁히면 무열왕대 무렵부터 녹읍의 성격에 변화가 생겨 단지 조(租: 곡물)만을 수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전덕재 선생으로서는 이것이 고려시대와 같은 수조권 분급과는 다르다고 여길 것 같습니다. 다만 곡물만을 수취할 경우, 각 토지의 비척도에 따라 녹읍에서 수취할 수 있는 곡물의 양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분명 신라 중앙권력은 이를 보완할 대책을 강구하였을 텐데, 사료상으로는 그 흔적을 찾기가 힘듭니다. 따라서 녹읍은 성립 이래 혁파될 때까지 어느 정도 고정된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음으로 이 의문은 앞의 그것과 연계되는데, 만일 녹읍이 무열왕대에도 변하지 않고 시종 나름의 고정된 모습, 즉 부세 전반의 수취 양상을 유지했다면, 경덕왕대 부활된 녹읍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가 문제입니다. 이는 조금 더 사료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보림사보조선사탑비"에 859년 무렵 장사현 소수(=현의 책임자)가 받은 '청봉(=녹봉)'을 녹읍으로 본 견해에도 재고의 여지가 있습니다. 전덕재 선생은 녹읍 혁파 이후 전 관료에게 세조, 그 뒤 일정 시기가 지나면 월봉을 지급하다가 757년 이래 모든 관료가 녹읍을 받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혁파 이전의 녹읍이 고위인사들에게 지급된 점을 감안하면, 부활 이후의 녹읍도 그렇게 볼 여지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전덕재 선생은 799년 학생녹읍을 근거로 부활된 녹읍은 하급관리에게도 당연히 지급되었을 것이라 하는데, 국학의 학생들이 과연 당시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에 대한 면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비록 관등과 관직이 없다 해도 국학 학생들이 가지는 위상이 하급관리보다 클 가능성, 혹은 당시 일시적으로 국학에 모종의 조치가 취해져야 했을 가능성 역시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덕재 선생은 아찬 이하 관인들의 경우, 녹읍이나 세조는 관직을 받은 자에 한하여 주어졌다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강수가 사찬으로 관등이 올라가면서 세조 역시 증봉된 사례를 예외적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전자는 전덕재 선생의 추론이고, 후자는 명백한 과거의 기술이라는 점입니다. 관직이 아니라 관등에 따라 증봉된 사례가 사료상 엄연히 존재함에도, 과연 이를 예외적인 조치로 여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아스럽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떤 의견들이신지요? 감히 고견을 여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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