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몽양 여운형 선생의 명예회복과 예우를 위해
대통령이 되기 전 부터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때 까지
아주 오랫동안 노력해 온,
그러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당 대통령 예비 경선 후보 시절이었던
2002년,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사업회’가 주도한
'몽양 선생 독립유공자 서훈 청원 서명운동'에 참여,
서명합니다.
하지만 선생에 대한 서훈은
빗발친 훈격 논란으로 인해 이뤄지지 못했죠.
이후... 2004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평가'를 시사한 이후,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가 서훈 명단에서 제외되어 왔던
사회주의 운동가들에 대한 발굴조사에 착수합니다.
그러나...
몽양 선생에 대한 서훈은
2002년 훈격논란으로 거부된 데 이어,
2004년에도 국가보훈처의 결정으로 취소됩니다.
'몽양여운형선생추모사업회'에서 서훈을 신청했지만
국가보훈처가
몽양 선생의 사회주의 운동 전력을 문제삼아
독립유공자 서훈 심사에서 탈락시킨 것이지요.
당시 여익구 몽양추모사업회 사무총장의 언론사 인터뷰 :
“대통령과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 마저
몽양 선생의 서훈을 적극 청원하는 마당에
보훈처의 그런 결정은 이해할 수 없다”
2004년 8월 25일
독립유공자-유족 초청 청와대 오찬 당시 노무현 대통령 :
"우리 독립운동사는 아직 제대로 발굴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정부가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좌우대립의 비극적인 역사 때문에
독립운동사 한 쪽이 일부러 묻혀지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불과 4∼5년의 기간에 30만명이
정부로부터 레지스탕스로 공인받고 포상을 다 받았는데
우리는 의병시기까지 따지면
50∼60년이 훌쩍 넘는 침탈의 역사를 겪어왔는데도
아직 독립유공자로 1만명 밖에 포상하지 못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내년이 광복 60돌인데,
60돌이 다 되도록 포상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은
유공자와 후손에게 참으로 미안한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체제 속에서
과거 독립운동 시기 선열들이 가졌던 이념과 사상이
어떤 평가를 받든 간에 역사는 역사인 만큼
있는 사실대로 밝혀져야 합니다.
좌우대립의 역사 때문에
묻어두었던 역사를 발굴하고 포상하겠습니다.
반민특위의 역사를 읽는 많은 젊은 사람들이
가슴 속에 불이 나고, 피가 거꾸로 도는 경험을 다 한번씩 합니다.
거꾸로 살아온 사람들이 득세하고,
그 사람들이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냉소하는 역사가 계속되는 한 한국에 미래가 없습니다.
자기 나라와 공동체를 배반한 사람에게 적어도
새로 시작되는 사회에서 득세하지는 못할 수준으로
규제하는 정도의 청산은 꼭 있어야 합니다.
다른 나라들의 역사를 보면
다들 그렇게 했는데 한국은 못했습니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서 할래야 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과거사 규명 보다 경제살리기에 주력하라'는 여론이 상당한데,
경제를 핑계로 국가적인 사업을 회피하려는 기도가
또 용납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든 나라가 역사를 바르게 규명하면서 경제가 발전해 갔고
그렇게 한 나라들이 경제를 더 잘하고 있지요.
과거사 진상규명은 결코 경제에 지장이 되지 않습니다."
노 대통령이 저렇듯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결과,
2005년 정부는
광복 60주년을 기념하며
삼일절, 광복절, 순국선열의 날 등 세 번에 걸쳐
130명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포함
500여 명의 국가유공자와 독립운동가에게 훈장을 수여합니다.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에 대해서는
역대 최대 규모의 서훈 추서이기도 했습니다..
이 때,
좌파(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대표격인
몽양 여운형 선생에게도
서훈 2급인 대통령장을 추서했거고요.
당시 국가보훈처의 서훈심사 배경에 대한 설명 :
“좌우 이념대립을 극복하는 차원에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서훈 수여를 적극 반영하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에 따른 것”
원래는
여운형 선생에게
1급 훈장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하려 했으나
2급인 '대통령장'을 추서하게 됐는데
국가보훈처 서훈심사위원회에서
극우세력의 반발 등.. 사회적 파장을 고려,
'사회주의자'에 대한 서훈 훈격을
한등급씩 낮추기로 결정한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정에 당시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사업회'와
유족, 진보 진영 등은
"선생의 공적을 감안할 때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이 아닌
대통령장이 추서되는 것은 선생에 대한 모욕"이라며
강하게 반발합니다.
보훈처 공적심사위원회는
좌우의 상당한 반발여론 때문에
몽양 선생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과 대통령장(2등급) 중
어떤 훈장을 수여할 것인가를 놓고
막판까지 난상토론을 벌였다고 합니다.
신용하 공적심사위원장의 당시 기자회견 발언 :
"몽양 선생처럼 1심과 2심, 합동심을 통해
3차례에 걸친 논의 끝에 훈격을 결정한 것은 전무후무하다"
그로 부터 3년 후.....
2008년 참여정부의 마지막 날.
노무현 대통령은
여운형 선생에 대한 훈장의 격을
최고 등급으로 높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급)을 다시 추서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한 인물이
건국훈장을 두 번 받는 것도 초유의 일...
몽양을 오랫동안 존경했고,
몽양이 암살 당해 부재했던 대한민국을
안타까워 해오던 한 사람으로서...
노무현 대통령이 저렇게 까지 노력해서
여운형 선생에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최고의 예우를 다해 준 점에
너무나 고맙고, 가슴이 저립니다.
두 분 모두 존경하고 감사합니다.
2001년 11월 8일
노무현의 안동시민학교특강
[21세기 한국의 시대정신과 지도자] 특강 내용 중 일부 :
"해방이 되었을 때 한국은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세워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경제를 발전시켜 나가야 했습니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제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르고
친일파들이 득세해서 그들의 과거를 미화했습니다.
왜곡된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왜 이리 되었습니까?
분열 때문이었습니다. 남북간의 분단, 그리고
남한 내부의 좌-우익의 대립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소련을 등에 업고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세력과
미국을 등에 업고 자본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세력이
극한적으로 대립하는 사이에서
공산주의나 자본주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민족의 통일과 자주독립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던
중도통합세력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습니다.
김구, 여운형, 김규식……
통합세력은 모조리 패배해 버리고 분열세력들이 각기 득세했습니다.
그 뒤
미국을 등에 업은 남한의 정부는
반공을 자기 존립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빨갱이 대충 다 잡고 나서는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반공이념을 사용했습니다.
그 틈에 가장 솜씨가 좋은 사람들이
일제 때 독립운동가 잡던 친일파들이었죠.
직접 칼 들고 잡으러 다녔던 순사 출신들 뿐 아니라
일제관료로서 식민지에 복무했던 사람들이
나라의 주도권을 쥐고 역사를 왜곡해 나간 것이
한국의 현대사였습니다.
남한이 정부를 세운 것을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그때 소위 좌우합작·민족통합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목숨을 던지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노력이 우리 민족사에서 어떤 의미에선
정신적 정통성을 이루고 있고
그것을 계승하는 것이 정통입니다.
이는 바로 김구 선생의 노선이기도 합니다.
난 김구 선생의 노선을 따라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김구선생의 노선은 존경하고
노무현이 김구선생의 노선을 따르면 불안하고,
난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