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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페체네그 전쟁 Total War (1)
게시물ID : history_49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5
조회수 : 1425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07/04 09:12:55
지난 글 일지도 모릅니다. : 비잔틴-러시아 전쟁: 최대, 최후 바이킹 전쟁 (파란 글자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통상 비잔틴-로마 제국에 있어서 11세기 중반은 대체로 평온한 시기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만 실제로는 번영과 평화의 와중에서도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때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들은 한 번에 한 개만 발발한 것이 아니라 몇 차례의 대규모 반란과 더불어 때에 따라서는 동시에 3개 전선에서 발생할 정도로 예측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는 만 단위 이상 병력이 동원된 전투만 수십여 차례에 달한다고 평할 수 있을 정도로 전쟁이 빈번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이며 격렬한 전투가 연속되었고 가히 총력전(Total War) 상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양쪽의 투쟁 세력 모두에게 부담을 안겨 준 전쟁이 제 1차 페체네그 전쟁(1046.12 또는 1047.1~1053)이었습니다.[1] 우선은 1차 페체네그 전쟁이 벌어지기까지의 간략한 상황을 개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1066년 무렵의 대략적 정세(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진은 Paradox사의 Crusader Kings Ⅱ 페체네그 족과 로마인들이 처음 접촉한 것은 상당히 이른 시기였습니다. 10세기의 47년간을 재위한 콘스탄디노스 7세(912-959)는 후계자인 로마노스 2세(959-962)에게 정치를 교육시키기 위해 저술한 『제국 행정에 관하여De adminstrado imperio』 중에서 페체네그의 각 부족들의 분류를 설명하면서 이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은 지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공물을 주어 혹시나 있을지 모를 충돌을 가급적 피하라는 것이었지요.[2] 하지만 콘스탄디노스 7세가 살던 10세기 초중반의 시대와 달리 10세기 중후반에는 전반적인 국제질서가 다시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평화로운 국가로 탈바꿈했으며 로마 제국의 북방 완충지대로 존재했던 1차 불가리아 제국이 루스의 지도자 스뱌토슬라프에 의해 일단 붕괴되었으며 요안니스 1세 황제가 이에 반격하는 와중에 완전히 로마 제국에 합병되어버렸습니다. 이제 로마 제국이 스스로 북방 경계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물론 974년과 1018년의 불가리아 합병 이후에도 한동안은 대체로 평화를 유지하였지만 그것은 위태로운 균형이었습니다. 페체네그 인들이 11세기에 처음으로 약탈 행위로 기록에 등장한 것은 1027년이었습니다. 일부 페체네그 군이 도나우 강을 넘어 쳐들어온 것이었는데 로마노스 4세(1068-1071)의 아버지이자 시르미온의 행정관이었던 콘스탄디노스 디오기네스가 즉각 이를 물리치고 조용히 도나우 강을 넘어 돌아가도록 한, 그 공로로 불가리아의 공작에 임명된 것이 첫 번째 기록입니다.[2] 이 때 잡혀간 포로들은 1년 후인 1028년 사채 빚 혹은 공적인 의무 불이행 때문에 수감된 이들을 방면하는 와중에 정부에서 몸값을 지불하고 송환되었습니다. 페체네그 인들은 4년 후인 1032년에 다시 도나우 강을 넘어 쳐들어왔으나 기록을 남길 정도로 특기할 만한 영향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1034년에 도나우 강을 넘은 페체네그 인들은 방위선의 틈을 따라 불가리아를 지나 테살로니카에 이르는 지역에서 약탈을 하였습니다. 이듬해인 1035년에도 특기 사항은 없으나 일련의 페체네그 인이 도나우 강이 결빙된 틈을 노려 광범위한 지역에서 약탈을 하였다고 합니다. 매우 심각한 충돌이 일어난 것은 1036년이었습니다. 이 한 해에 페체네그 인들은 세 차례나 로마의 영토로 밀고 들어왔으며 많은 포로뿐만 아니라 5명의 장군까지 사로잡아 돌아갔습니다. 로마 측에서는 다행히도 페체네그 인들은 이후 10년간 추가 행동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다만 1043년경 도나우 강 유역에서 어려운 전투 끝에 케겐(kegen)이라고 하는 지도자가 오구즈 족을 격퇴시켰다는 기록으로 보건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던 상황인 까닭인 듯합니다.[3] 로마 제국은 그 동안 미하일 4세(1034-1041) 시기에 걸쳐서 여러 차례의 격렬한 반란과 재해로 혼란스러웠으며 미하일 5세 정부가 끝내 시민들의 대대적인 봉기를 막아내지 못하고 물러나자 최소한 그 전 정부들보다는 안정을 가져왔고 균형을 잡은 콘스탄디노스 9세(1043-1055) 정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1046년 페체네그 족은 격렬한 내분을 거쳐 새로운 전쟁으로 끌려들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오구즈 족과의 전쟁에서 맹활약한 지도자 케겐은 그 전쟁 동안 은신하고 있었던 최고 지도자 티라크가 자신을 질시하여 살해하려는 음모를 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장군이 너무 뛰어나다보면 유목민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갈등관계가 여기서도 발생한 것이죠. 케겐은 벨레마르니스와 파구마니스 두 부족의 지지를 얻어 반란을 일으켰으나 티라크와 나머지 11개 부족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한동안 주변을 배회하던 케겐은 로마 황제에게 귀의할 결심을 굳히게 됩니다. 그리하여 1045년 2만 명의 지지자를 거느린 케겐은 드리스트라에 도착했으며 근처의 섬으로 물러간 다음 지역 행정관인 미하일에게 서신을 보내어 귀의하여 활약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미하일은 케겐에게 생필품을 전량 지급해주었으며 케겐은 안전하게 콘스탄디누폴리로 이동했습니다. 황제는 페체네그 지도자를 친절하게 맞아주었으며 케겐은 스스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함과 동시에 자신의 지지자들 또한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이제 케겐은 로마식 귀족인 파트리키오스이자 도나우 강에 위치한 항구 3개와 많은 배후지를 획득하고 로마인들의 동맹이 되었습니다. 포에데라티의 오랜 전통이 다시 발휘되었습니다. 그러나 케겐과 그 백성들을 받아들인 순간 페체네그 족과 로마인들은 이미 전쟁에 바짝 다가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로마 정부도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티라크의 군대가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나우 강에 함대를 파견해 두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1046년 페체네그 군 1,000명, 그리고 이후에는 2,000명이 도나우 강을 수차례 건너며 약탈 행각을 벌이자 케겐의 군대가 즉각 이에 맞서 격퇴시켰으며 티라크의 군대를 공격했습니다. 보복전의 성격이었던 탓에 남자들은 살해되고 여자들은 노예가 되고 아이들은 로마인들에게 팔리는 처지가 되었지요. 마침내 티라크의 인내심도 바닥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티라크가 보낸 대사는 페체네그와 로마의 오랜 동맹을 상기시키며 만약 황제가 반역자를 추방하지 않을시 전면전도 불사하겠음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케겐을 ‘부당한 취급을 받은 망명자’로 인식한 황제는 이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나는 나에게 온 사람에게 배신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그에게 대해 음모를 꾸민 이들에 대한 저항을 멈추게 하지도 않을 것이오.”
콘스탄디노스 황제가 페체네그 대사에게 한 말[4]
그리고 아무리 동맹의 탈을 썼다 하더라도 페체네그 인들이 근년에 벌인 약탈 행각은 상당히 심각했기 때문에 진지한 논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습니다.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달은 콘스탄디노스 황제는 케겐에게 연락을 취하여 도나우 강변의 제방을 부지런히 방비하도록 지시했으며 어떤 적이든지 나타나면 즉각 자신에게 알려주어 서부 중앙군이 행정관 미하일과 연계하여 페체네그의 도강 시도를 저지할 수 있도록 하라고 언질을 주었습니다. 또한 제국 함대 소속 1백 척(10,000-12,000명)의 함대가 도나우 강에 주둔하기 시작했습니다.[5] 그러한 상황이니 이 도나우 강이 마르거나 얼지 않는 한 적이 도나우 강을 넘는 일은 요원해보였습니다. 그런데 도나우 강처럼 큰 강이 쉽게 얼겠어요? 기껏해야 조금 얼거나 말겠지요. 한편 부정적인 결과를 받아든 티라크는 당연히 격노하였으며 당장 총력전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페체네그 군 수만 명(8만 정도로 볼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이 앞장서고 전 페체네그 민족 80만 명[6]이 도나우 강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1046년 12월과 1047년 1월의 겨울은 매우 혹독하여 도나우 강이 꽁꽁 얼어버렸던 차였습니다. 결국 이렇게 도나우 강 방어선은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티라크의 ‘국가’ 전체는 도나우 강 남쪽의 로마 영토에 정착하였으며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영토에 있던 로마 장군들은 페체네그 인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통합할 것을 요청해왔으며 긴급 지원 요청을 받은 콘스탄디노스 황제는 즉각 아드리아누폴리 공작인 아리아니티스와 불가리아 행정관인 바실리오스에게 휘하의 군대를 소집하여 케겐과 디라키온 공작 미하일의 군대와 합류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들은 다가오는 침략에 대비해 자신들의 군세를 합쳐야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해 보였으므로 동부군에도 소환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로마 장군들이 이 대응 불가능해 보이는 대군을 상대로 협동을 서두르고 있을 때 티라크의 군에서 탈주한 탈영병이 엄청난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수많은 페체네그 인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음식과 물로 인한 풍토병으로 추정되는 이 병으로 수십만의 페체네그 ‘국가’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으며 케겐은 곧바로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용맹함에 용기를 얻은 로마군도 공세로 전환했습니다. 수천 명의 페체네그 군이 순식간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케겐은 ‘독사는 아직 그 꼬리를 움직일 수 없는 겨울에 죽여야 한다’는 이민족 속담까지 인용하면서 성인 페체네그 포로들을 모두 학살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야만인스럽고 불경건스러우며 로마인들의 관대함이 없는 주장으로 간주되어 거절되었습니다. 황제와 불가리아 행정관 바실리오스는 이 포로들이 무장을 해제한 후 오랜 전쟁 때문에 인구가 적은 불가리아에 정착한다면 제국에 큰 유익이 될 것이라며 포로들을 무장해제 시킨 후 작은 단위의 수로 나누어 세르디카 평야와 나이수스, 에우차폴리 등에 정착시켰습니다. 이미 페체네그 국가 자체가 전투 직후 붕괴된 후였으므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외에 귀족 등의 지배층 150명과 티라크도 각자 귀족 작위를 받고 로마 귀족 사회에 통합되었습니다. 1047년 페체네그의 정착 추정(클릭하면 커집니다) 에우차폴리가 어딘지 몰라 동쪽 한계는 후대 사료를 참고해 임의로 수정했습니다. 약 2년이 지난 1049년, 이 무렵의 제국은 동방의 셀축 튀르크와 전쟁을 벌이느라 분주했습니다. 1048년 9월 18일, 카페트론 전투에서 셀축의 대군을 물리치긴 했지만 1049년에는 셀축의 토그룰 벡이 직접 군세를 거느리고 쳐들어온 상황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콘스탄디노스 황제는 정착한 페체네그 인 중 15,000명을 선별하여 페체네그 귀족인 4명의 장군에게 지휘를 맡긴 다음 콘스탄디노스 하드로발노스란 이가 이베리아[7]까지 페체네그 군을 안내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15,000명과 4명의 장군은 황제가 선물로 제공한 말을 타고 토그룰 벡의 군세를 향해 진군하다가 겨우 다마트리스 궁전[8]에 이르렀을 때 회의를 열어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주인인 로마 황제를 위해 동료 튀르크 인들과 싸우러 먼 곳에 가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카탈림 장군의 찬동을 얻은 페체네그 군은 불가리아의 본거지로 돌아가기 위해 우선 길잡이인 콘스탄디노스부터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다마트리스 황궁 건물 3층에 숨어 참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감시자를 따돌린 후 페체네그 군은 서둘러 성 타라시오스 수도원이 위치한 해안으로 움직였습니다. 이들이 수도를 무사히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배를 이용해 나가는 것뿐이었는데 당연히 당장 1만 5천이나 되는 병사들이 탈 배를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카탈림과 그의 병사들은 말에 박차를 가하여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넜습니다(?)[9] 해협을 건넌 페체네그 군은 곧장 세르디카로 향했습니다. 아드리아누폴리 공작인 콘스탄디노스 아리아니티스는 자신의 마케도니아 군대를 모아, 이들을 추격하였으며 야 이 반란군 노무 XX들아! 로비초까지 추격해 셀티라는 페체네그 지휘관의 숙영지를 유린하였습니다. 셀티는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여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페체네그 인들의 국가가 빠르게 재건될 것임은 분명해졌습니다. 이하는 주석입니다.// [1] 페체네그 전쟁은 통상 세 차례의 대규모 전쟁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1차전은 1046 - 1053년 사이에 치러진 전쟁이고 그 후 30년 평화조약이 준수된 이후에 1086년 12월에 다시 양자 사이에 발발한 것이 2차 페체네그 전쟁 그리고 1121년에 마지막으로 벌어졌던 것이 3차 페체네그 전쟁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2] 실제로 이런 정책이 지켜졌는지에 대해선 자세한 기록을 본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10세기 중후반까지는 불가리아 제국이 완충지대 역할을 했기 때문에 큰 의의가 있는 정책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3] 페체네그 인들은 차후에 쿠만 인들에 의해 크게 밀리게 됩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아니었고요. [4] 조나라스 연대기 17권 26장 11절. [5] 지금까지의 역사적 사실들과 이후의 사실들은 조나라스 연대기와 스킬리체스 연대기에서 거의 전부 참고한 것입니다. [6] 80만이란 수치가 워낙 크기 때문에 과장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사실이라 하더라도 페체네그 족 단일의 수치가 아니라 주변 여러 민족들이 같이 섞여 들어갔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7] 이 이베리아는 히스파니아가 있는 이베리아 반도가 아니라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 사카르토벨로 세력이 접하는 지역입니다. 대략 아니(Ani) 시를 포함하는 오늘날 터키 동북부 지역에 해당합니다. [8] 어딘지는 정확하게 모릅니다만 콘스탄디누폴리에 가까운 소아시아 해안 근교에 있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9] 이 사건은 스킬리체스 연대기에 언급되고 있는데 보스포로스 해협이 그 정도로 얕을 순 없다보니 다만 잘못 와전된 소문인 듯합니다. 분명한 것은 페체네그 군 1만 5천이 어떤 방법으로든 보스포로스(오늘날 아나돌루 히사르가 위치한, 옛 성 타라시오스 수도원 지점)에서 유럽으로 넘어왔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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