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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경제사' 백제의 식읍제에 대한 일고찰 1. 결부제의 시행 결(結)·부(負)·속(束) 단위로 토지의 면적을 나타내는 결부제는 중국이나 일본에 없는 한국의 독특한 제도이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따르면 452년(송문제 원가29년)에 금관가야의 김질왕이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후사를 창건하고, 그 주변 토지 10결을 공양비용으로 충당케 했다. 그런데 문무왕의 어머니 문명왕후의 가계에 대해 착오가 있는 등 "가락국기"가 사료로서의 큰 결함을 가지고 있는 점은 감안하면, 가야에서 결부제를 시행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한편 "삼국사기"김유신열전에는 663년(문무왕3)에 김유신에게 500결의 밭을 하사했다고 나온다. 이 기록은 믿을 만 하므로, 늦어도 문무왕대에 결부제를 시행했다고 여겨진다. 고대 중국이나 일본에서 토지면적의 기본단위는 각기 무(畝)와 대(代=로시)였다.
먼저 고대 중국의 '무'는 인력으로 농사를 지을 때 하룻동안 경작할 수 있는 면적단위에서 기원하였다. 처음에는 그 면적이 일정치 않았다가 점차 일정한 지적(地積)을 가리키게 되는데, 서주시대에 100보(步)를 1무(畝)로 한다는 원칙이 세워졌다. 이후 춘추전국시대에는 철제농기구와 우경의 보급으로 하룻동안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이 늘어나 전국시대에 240보를 1무로 하는 새로운 규정이 정비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고대 일본의 '대'는 이삭이 붙어있는 벼 1묶음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면적에서 기원하였다. 이 역시 대륙으로부터 도량형제가 도입되자, 1대(代)의 면적을 고(구)려척 방(方) 6척을 1보(步)로 한 5보의 면적에 가깝게 고정시켰다. 이후 646년 정월에 반포한 다이카개신을 계기로 당제를 도용하여 1보의 면적을 고(구)려척 방 5척으로 축소 조정하였다. 한국 결부제의 기원을 고대 중국의 '무(畝)'와 결부시키는 종래의 견해에는 문제가 있다. 결부제의 근간인 '부(負)'는 '한 짐', '속(束)'이 '한 묶음'이라는 뜻이다. 이는 부·속이 곡물의 소출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며, 다시 말해 고대 일본의 '대'와 상통한다.
신라의 경우도 고대 일본과 마찬가지로 토지면적의 기본단위는 벼 한 묶음(束)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면적을 지칭하는 '속(束)'이었다고 보인다. 그런데 고대 일본의 경우 처음에는 소출량에 근거하여 산출된 토지면적의 단위를 가리키는 '대'가 차츰 일정한 면적으로 굳어져 1대를 5보라 하는 경향을 보였다. 신라의 경우 '부'나 '속'과는 달리 '결'은 어의상 소출량과는 무관한 단위이다. 신라 역시
처음에는 벼 1묶음을 생산할 수 있는 면적을 1속, 10속을 1부라고 규정했다가, 차츰 그 면적이 일정하게 굳어져 보(步)에 의해 그 면적을 표시하였고, 그와 함께 100부를 어의상 소출량과 무관한 1결로 한다는 규정을 만든 것이 아닐까 한다. "삼국유사"대산오만진신에 따르면, 705년(성덕왕4)에 임야지나 밤나무 밭, 건물 대지 등의 면적을 결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시 1결이 이미 일정한 면적을 가리키는 단위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결·부·속을 일정한 지적단위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이미 국가 차원에서 표준 양전척을 기초로 양전을 행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결부제의 확립 시기를 추측하려면, 국가 차원에서 양전을 처음 실시한 시점을 살펴봐야 한다. 2. 결부제의 시행 시기와 사회적 기능 1) 결부제와 인세(人稅)의 수취 중고기 부세 수취의 관행을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는 성산산성 출토 목간들이다. 이들 가운데 '피'를 가리키는 '패(稗)'자가 새겨져 있는 목간들을 검토해 보면, 판독에 별다른 이견이나 문제가 없는 것들은
'지명+인명+稗'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이 목간들은 곡물의 일종인 피를 담은 자루에 부찰된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여기 기록된 인명은 그것을 납부한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다. 신라국가에서 개인 별로 피를 징수하여 그것을 성산산성에 주둔하던 군인이나 말의 식량으로 보냈고, 산성에서 피를 모두 소비한 다음, 목간을 일괄적으로 폐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목간들을 보면 개인이 부담한 피의 양이 모두 1석으로 동일하다. 목간에 씌어진 인명은 정남인지 가호를 대표하는 호주를 가리키는지 불분명하지만, 통일신라시대에 공연을 단위로 과세한 점을 염두에 두면, 목간에 기술된 인명은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즉
성산산성 목간들은 신라중고기에 가호단위로 균액의 곡물을 징수하였음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하여 "수서"고려전의 기록이 주목된다. 이에 따르면 인세(人稅)로 포 5필과 곡식 5석을 내며, 3등호제를 실시하여 (상등)호는 곡식 1석, 차(등)호는 7두, 하(등)호는 5두를 냈다고 한다. "주서"고려전에서는 과세량이 가호의 빈부를 따라 차등을 운다고 하였으므로, "수서"의 인세 역시 가호 단위로 부과했다고 보인다.
고구려에서 가호 단위로 납부하던 부세를 '인세'로 명명한 이유는 가호의 대표인 호주 개인 별로 균액의 부세를 과세하였던 전통 때문이다. 즉 고구려도 신라중고기와 마찬가지로 호주로 추정되는 개인이 각기 균일한 양을 납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문제는 신라에서 조(調)의 명목에 해당하는 견(絹)이나 포의 경우도 가호마다 균액을 부과했는지의 여부인데, 고구려에서 곡식뿐 아니라 포의 경우도 인세로서 가호마다 균일하게 거두었음을 감안하면, 신라의 경우도 고구려와 비슷했을 것이다.
요컨대 신라중고기에는 가호의 토지소유 규모와 무관하게 조세를 징수하였다. 이는 전결 수에 근거하여 조세를 징수하지 않았던 사실과 관계가 깊다. 2) 읍락 내의 계층분화와 결부제의 시행
신라중고기에는 토지의 소유주체가 뚜렷이 부각되었다. 그것은 662년(문무왕2) 평양 근처의 당군에게 식량을 전해주고 돌아온 김인문과 김유신에게 본피궁의 재화와 전장·노복을 포상한 일, 대략 진평왕대의 사건을 전한다고 여겨지는 "삼국유사"효소왕죽지랑조에 '익선전(=아찬 익선의 밭)'이라는 용례가 보이는 점, 664년(문무왕4) 개인의 토지를 사원에 시납하는 것을 금지시킨 일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사실은 국가가 양전을 행하여 토지의 소유 주체를 정밀하게 파악하였음을 말한다. 국가 주도의 양전 및 토지 소유 주체의 파악과 연관된 금석문은 550년대에 작성된 "단양적성비"이다. 여기에는 '적성전사법'이 나오는데, 대략 적성 점령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적성전사법에 따라 어떤 재산을 은전으로 하사하였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전사법이란 은전 형식으로 재산을 하사하는 근거법으로 기능했다고 여겨진다. 이 전사(人+田/舍)는 전사(田舍)와도 통하는데, '농부(=농가)' 혹은 '토지에 딸린 가옥=전장(田莊)'이란 뜻이다. 그런데 통일신라기에 '전장'에 관한 사료가 나타나는 걸 보면, 후자를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전사법이란 토지와 그에 딸린 건물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사항을 규정한 법조항이라 하겠다. 전사법이 기능했다면, 6세기 중반 신라에서는 당연히 토지의 소유권을 둘러싼 제반 사항에 대한 법조항도 운영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전사법을 제정한 시기에 관해서는 일단 율령이 반포된 520년 무렵을 주목할 수 있다. 단 520년 무렵부터 국가 차원에서 양전이 실시되고 토지의 소유 주체를 명확히 할 필요성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고찰이 필요하다. 3세기 고구려에서 진대법이 시행된 것은 당시 농업생산력 발달로 계층 간 갈등이 심화되어, 국가가 개입하여 소농민들의 생산기반을 보호하고, 지배층의 지나친 사적 기반 확대를 제어하기 위해서였다.
신라 역시 4~6세기에 철제농기구와 우경의 보급에 따라 읍락 안에서 계층분화가 진전되었다. 그에 따라 신라 역시 나름의 해결책을 강구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지방의 복속소국이나 읍락집단을 해체한 다음, 그곳을 영역화하여 국가권력의 통제를 보다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신라국가는 생산기반에서 유리된 계층을 다시 토지에 긴박시키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계층분화를 억제시키려 하였다. 5세기 말 소지왕대의 일이 그 일례이다.
이 시책, 즉 귀농정책의 내용에는 빈농층에게 토지를 분급해주는 일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춘추시대 중기 이후 계층분화를 심화시킨 주 원인이 토지점유의 지나친 불균형이었기에, 각국에서 토지국유제에 입각한 수전(授田)제도를 실시한 것이 참고된다.
아마 이 무렵에 양전사업도 진행되었고, 6세기 전반 전사법이 정비되는 기초 자료로도 활용되었을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의 양전을 기초로 6세기 전반에 전사법을 정비했다면, 이 무렵을 전후하여 곡물의 소출량을 기준으로 토지의 양을 헤아리던
'부'와 '속' 또한 토지의 비척과 무관하게 일정한 지적으로 고정시켜 '보(步)'에 의해 그 면적을 표시하였고, 이를 기초로 '100부=1결'로 정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추정된다. 아마 이때에 1속의 척도를 양전척으로 삼아 토지를 측량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이를 바탕으로 국가 차원에서 결부제를 공식적으로 시행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앞서 중고기에 가호마다 균액의 부세를 부과하는 세제를 시행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측면은 중고기에 전결 수가 조세 수취의 직접적인 기준자료로서 활용되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그렇다는 결부제 실시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생각컨대
신라국가는 지배층의 사적인 지배기반 확대를 제어하고 호구의 증대를 모색하기 위해 결부제를 실시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3. 맺음말-통일신라시기 조세의 징수 방식과 관련하여- 앞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결부제의 시행을 전조(田租)의 징수를 위한 기본 전제로 이해하기는 곤란하며, 신라중고기에는 가호마다 균액의 곡물을 부과하는 세제를 실시하였다. 고려시대의 경우 전결 수에 근거하여 전조를 징수하였다. 단 동일한 면적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양은 토지의 비척도에 따라 차이가 났으므로, 고려조정에서는 전품을 나누어 그에 따라 과세량에 차등을 두었다. 이후 고려후기에 이르면 토지의 비척도에 따라 양전척을 달리하여 토지면적을 측량하는 방식으로 변경하였는데, 이러한 양상은 조선시대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통일신라시대는 고려 이전이므로 전결 수에 근거하여 조세를 징수했다면, 반드시 전품에 따라 과세량을 조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그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료는 전무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중국처럼 균전을 나누어주고, 인정을 단위로 균액의 조(租)를 부과하였을 가능성도 적다. 오히려
통일신라시기에는 자산의 다과에 근거하여 설정된 호등을 근거로 곡물, 즉 조(租)를 부과했을 가능성이 높다. 균전제를 실시하지 않았던 중국의 여러 왕조에서 호등에 근거하여 조를 부과한 사실, 당대에 균전제가 적용되지 않던 지역에서 가호마다의 경제적 형편이나 호등에 근거하여 조를 부과한 점이 이러한 추정을 보완해준다.
호등제에 근거하여 조세를 징수하면, 토지의 사정(=전품)이나 토지의 비척도, 경작작물 등에 따라 세율을 조정할 필요가 없다. 통일신라기에 전품에 따른 세율조정 관련 사료가 전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전덕재 선생의 다른 대부분의 글과 마찬가지로 문헌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짜임새를 갖추어 잘 쓴 역작입니다. 다만 신라중고기에 결부제를 실시했다고 하면서도, 그 주된 기능을 조세 수취가 아닌 지배층의 사적기반 확대 억제용으로 본 점에 대해서는 의아스럽습니다. 물론 전혀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만, 양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결부제를 실시하면서 그것과 직결된 조세 수취에 대해서는 기존의 균액과세를 유지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목간이라는 1차 사료가 엄존한다는 점, 나아가 7세기 고구려의 상황 등을 감안하면, 신라중고기에 균액과세가 실시되었다는 것은 일단 사실로 인정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결부제의 실시를 더 늦춰잡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사료상 결부제가 확실히 실시되었음을 보여주는 건 문무왕대인데, 그렇다면 중대나 혹은 중고기 말에 이르러서야 결부제가 실시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