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선 대통령 후보까지 거론되었다지만 사실 4년 전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했을 때 박원순을 아는 시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렴풋이 시민단체 활동가라는 걸 아는 정도였는데 과연 그런 이력이 시장 출마까지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선 의문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분위기는 출마 당시 5%라는 지지율에도 나타났다. 이런 박원순에게 50% 지지율의 안철수가 양보하자 '도대체 박원순이 누군데?' 하는 궁금증과 함께 그의 지지율은 치솟았다.
박원순은 한국 시민운동의 스티브잡스다. 90년대 이후 한국 시민운동의 혁신은 대부분 박원순에게서 나왔다. 80년대 민중단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민운동을 획기적으로 전환시킨 대표적 시민단체 참여연대, 한국 기부문화의 혁신을 이룬 아름다운재단, 재활용품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시민단체로선 꿈꾸기 힘들었던 전국적 브랜드화에 성공한 아름다운 가게, 이들 단체를 창설하고 혁신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박원순이다. 90년대 이후 시민운동의 역사는 박원순이 없다면 아예 펜을 들 수 없다.
참여연대는 소액주주운동과 고발로 재벌회장들을 벌벌 떨게 했고 그들 중 몇명은 감옥에도 보냈다. 2000년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던 국회의원 낙선운동과 지금은 일상적인 시위문화가 된 1인시위도 참여연대가 주도하고 개발한 것이다. 아름다운재단이 2008년 한 해 모금한 금액은 무려 135억이다. 2002년 시작한 아름다운가게는 전국 100개 매장과 300여명의 상근간사로 성장했고 롤모델이었던 영국 옥스팜이 지금은 오히려 아름다운가게를 배우려 한다.
이쯤되면 서울시장 후보를 선뜻 양보한 안철수의 무한신뢰와 양보를 요구한 박원순의 당당함이 어떻게 나온 건지 이해가 된다. 안철수만큼 대중적으로 각인되진 않았지만 박원순은 안철수 못지않게 우리 사회에 공적 기여가 큰 인물이다. 안철수가 it업계에 백신을 뿌리는 동안 박원순은 우리나라 정치와 사회 각 분야에 백신을 뿌렸다. 지지율로 봤을 땐 도저히 불가능한 양보였지만 박원순과 안철수 두 사람의 서로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신뢰가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박원순의 공적 활약은 시민단체만이 아니다. 박원순은 대표적 시민활동가 이전에 대표적 인권변호사였다. 박원순에게 시민단체는 공적활동의 시즌2다. 80년대 인권변호사 박원순의 활약은 시민단체 활동가 박원순만큼 눈부셨다. 부천서성고문사건, 박종철치사사건, 미문화원사건, 우조교성희롱사건 등 한국 인권사에 길이남을 재판들에서 변호인으로 나섰고 많은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냈다.
이렇게 볼 때 서울시장은 박원순에게 시즌3에 해당된다. 정권에 맞서 싸운 게 시즌1이고 민주화 후 권력을 감시한 시민단체 활동이 시즌2, 투쟁과 감시의 대상인 정부의 행정에 직접 뛰어든 게 시즌3다. 인권변호사로서 맹렬한 투쟁과 시민단체 활동가로서 대중과의 접접을 고민한 후 이제 자치단체장으로서의 실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한 분야에서도 성공하기 힘든데 매 시즌마다 성공 정도가 아니라 혁신을 이루는 박원수의 능력은 놀랍다. 이렇게 역동적이고 혁신적이면서 성공적인 삶에는 어떤 바탕이 있는 걸까?
박원순은 독종이다. 고등학교 입시 때는 3개월 동안 양말을 안 갈아신었다. 수업시간 중 선생님이 농담을 하면 박원순은 그 전 시간 수업을 리뷰하며 한치의 시간도 흘려보내지 않았다. 100점을 맞기 위해 200공부한다는 박원순은 스스로도 '집중의 힘'이 있다고 얘기하는데 이 힘이 경기고, 서울대, 인권변호사, 시민단체를 거쳐 서울시까지 지치지 않고 이어졌다.
거기다 박원순은 체계화의 달인이다. 경제학 개론 한 과목 시험을 치는데 미시경제론, 거시경제론 등 관련 경제학을 모두 공부했다고 한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이지 않은 지식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행과 독서에서 얻은 자료는 반드시 파일로 정리하는데 이렇게 정리된 체계적 자료들은 3개의 시즌을 보내는 동안 박원순에게 아이디어의 원천이 되었다.
체계화와 독종만이라면 박원순은 그저 대기업의 독종 경영진이나 독종 공무원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박원순이 독종 인권변호사, 독종 시민활동가가 되는데엔 인생의 과정에서 그 방향으로의 터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 터치는 우연한 해프닝에서 시작되었다. 1학년이던 1975년 우연히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긴급조치위반으로 제명당하게 된 것이다. 그날 박원순은 이화여대생과의 미팅이 있었다. 만약 약속대로 미팅에 나갔다면 제적당하지 않았을 거고 박원순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4개월 복역 후 학교에 복학하지 못한 박원순은 그후 운동권과 주로 교류하게 되었다.
박원순을 만든 두번째 터치는 고 조영래 변호사이다. 박원순은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조영래 변호사를 꼽는다. 박원순이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도 조영래 변호사의 권유였다. 시민단체 활동에 뛰어든 계기도 조영래 변호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외국으로 가서 견문을 좀 넓혀보는 건 어때" 라는 권유였다. 조영래 변호사의 권유로 박원순은 1991년 한국을 떠나 런던, 보스턴, 뉴욕 등을 돌며 엄청난 분량의 자료와 정보를 습득했다.
학자들의 지식은 그냥 책 속에만 있으면 먼지 속에 파뭍혀 있는 것일 뿐이잖아요. 변호사는 법률과 소송의 기술자들이긴 한데 소재가 있어야 가공을 하지요. 운동가들은 시민들을 동원한다든지 사회의 어젠다를 만들어가는 전문가이기는 하지만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할지는 모르잖아요. 그런데 이 삼자가 결합하면서 학자들의 죽어있는 지식을 변호사들이 소송이라든지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끌어내고 운동가들이 그것을 사회적 어젠다로 만들어내고 국민을 동원하고 그래서 이것을 하나의 구체적인 캠페인으로 연결하는 일들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 지승호의 박원순 인터뷰 중에서
스티브잡스는 새로운 기술을 창조한 게 아니라 기존의 기술을 융합시키고 직관적으로 연결시켜 애플의 성공을 이끌었다. 박원순도 아무리 훌륭하고 능력이 뛰어난 학자와 변호사, 운동가가 있어도 이 세 요소를 결합시킬 수 없으면 무용지물이라고 한다. 스티브잡스는 기술보다 디자인을 중시했다. 박원순이 스스로를 소셜디자이너라고 칭하는 것을 보면 박원순과 스티브잡스 두 사람은 세상을 보는 시각에 있어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것 같다.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이사가 서울시 공무원에게 "박원순 시장은 일을 즐긴다는데 당신도 즐기고 있"냐고 묻자 한 공무원이 이렇게 대답했다. "서울시민들에게는 참 좋은 시장입니다. 세금이 아깝지 않죠. 하지만 저희 공무원들은 참 고달파요"
서울시 공무원들의 고달픔은 이미 서울시장 선거 때 예상이 되었다. 당시 박원순 후보는 유세 중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사람 좋은 줄로만 알면 큰 코 다친다." "제가 시장이 되면 서울시 공무원들은 각오해야 할 것." "전 정말 꼼꼼하고 치밀하게 챙기는 사람이다."
박원순이 취임하면서 고달파진 쪽은 또 있다. 지하철 9호선 투자사인 맥쿼리는 2012년 4월 기본 요금 500원 기습인상을 시도하다 박원순 시장의 경고에 운임인상을 보류했다. 향후 서울시는 협상을 통해 서울시에 불리한 계약을 뜯어고쳤다. 13%이던 사업자 수익률을 4.86%로 낮춰 3조2천억언의 서울시 재정을 절감했다. 결국 맥쿼리는 9호선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고달픔에서 벗어난 공무원도 있다. 지금까지 서울시는 약 7000명의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시켰다. 이제 청소노동자들은 공무직 신분증을 달고 자유롭게 시청을 출입이 가능하다. 정규직이 되면서 임금도 16% 인상되었다. 그러나 서울시의 비용은 오히려 53억 절감되었다. 용역회사에 주는 이윤과 관리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서울시장에 취임한 박원순의 가장 큰 난제는 뉴타운이었다. 박원순은 현장시장실까지 운영하며 이 일에 매달렸다. 시장이 직접 나서서 sh공사의 부채로 남아있는 집을 파는데 나섰다. 안팔린 집 600세대가 두 달만에 싹 해결되기도 했다. 그 결과 2012년 구청 신년 하례회에서 대부분 마주쳤던 뉴타운 시위가 2013년에는 싹 사라지게 되었다.
또 하나의 난제는 서울시 채무였다. 고건 시장 때 6조원이던 서울시 부채가 이명박 오세훈 두 시장을 거치면서 20조원으로 늘어났다. 하루 이자만 20억 원을 내야 했다. 박원순 시장은 가까운 곳의 해외출장 때는 이코노미석과 중저가 호텔을 이용하는 등 재정절감의 의지를 보였다. 그 결과 서울시는 취임 후부터 2013년 연말까지 2조6천여억원의 채무를 줄였다. 그러나 복지예산은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오세훈 시장 때 23퍼센트였던 복지예산은 2013년 30퍼센트까지 늘어났다.
보수언론조차 칭찬하는 박원순의 업적이 있다. 바로 서울시정 평가에서 1위에 오른 올빼미 버스다. 서울시 참여마당에 한 시민이 올린 글이 발단이 되어 시작된 사업은 서울시 공무원들이 관련 업계의 이해와 반발을 적극 조정하고 빅데이터 분석이라는 기발한 발상이 더해지면서 시작할 수 있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100일 동안 63만명이 이용했고 서비스에 폭발적 호응을 보냈다.
서울시 지표 중 가장 눈길이 가는 대목은 자살율이다. 6년간 증가했던 자살율이 2012년 처음을 감소해 전국 17시도 중 가장 낮아졌다. 서울시는 2020년까지 서울시 자살률을 절반으로 낮춘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이런 목표의 영향도 있겠지만 서울시정의 전반적인 변화가 자살율에 영향을 끼친 걸로 보인다. 자살율 감소폭이 11.5%로 컸고 이 추세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볼 때 그렇다. 서울시 자살률 6년만에 감소, 전국에서 가장 낮아
그러나 이런 시민친화적인 사업과 성과에도 박원순 시장에 대한 우려가 있다. 뭔가 인상적인 사업을 남겨야 여론에 어필할 수 있다는 요구다. 이런 질문에 박원순은 이렇게 답한다.
저는 시민들이 저를 시장으로 뽑은 것은 궤도를 벗어난 시정을 정상으로 회복하고 합리적이고도 균형잡힌 시각으로 시정을 돌보라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아무 것도 안한 시장"이 아니라 "모든 것을 제대로 챙기는 시장"이 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쉴새없이 서울시의 현안과 작은 것 하나 하나 놓치지 않고 깐깐하게 따지고 고치고 보완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서울시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올바른 비전과 그 비전을 달성하는 구체적 정책 컨텐츠를 마련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박원순은 자신을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라 위대한 지도자들이 헝클어뜨린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또 자신이 이상주의자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분야에 주저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꼼꼼하게 실무를 챙기면서 현실에만 머물지 않는 박원순이 펼치는 시정이라면 서울시가 앞으로도 새로운 것들을 많이 시도할 수 있을 듯하다. 그 새로운 소셜디자인은 서울시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주목할 것이다. 스티브잡스의 애플 신제품을 기다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