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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술라 미술(히베르노-색슨 미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下
게시물ID : history_488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3
조회수 : 3478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2/06/30 08:51:49
지난 글 : 인술라 미술(히베르노-색슨 미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中 4. 인술라 미술의 대표적인 사례 a) 린디스판 복음서(Lindisfarne Gospels) 린디스판 복음서는 우리에게 이 시대 양식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위에서 예시도 거의 린디스판 복음서로 든 이유도 그것이 가장 유명하기 때문이다. 린디스판 복음서는 같은 이름의 수도원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으며, 715년 린디스판 수도원의 주교인 이드프리스(Eadfrith)가 작성한 것으로 여겨지며, 875년 바이킹의 침략으로 이 지역이 약탈당한 뒤 린디스판에서 모시고 있던 성 커스버트의 유해와 함께 더럼으로 옮겨져 보관되었다. 이어 16세기 헨리 8세가 국교회를 선포함에 따라 린디스판 복음서는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팔리게 되었으며, 이 중 대부분은 헨리 8세의 대신이었던 로버트 커튼 경이 매입했다. 이어 가보로 전승되어오다가, 1753년 대영 박물관이 개관하자 가장 첫번째 전시물로 기증되어 지금까지 대영 박물관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삽화 대부분이 위의 예시로 쓰였기 때문에 켈스의 서나 더로우의 서와는 달리 여기에는 위에 실리지 않은 예시만 싣겠다. 린디스판 복음서의 사도 요한. 린디스판 복음서의 '카펫 페이지'. 십자가를 형상화하여 기하학적 문양을 넣었다. b) 켈스의 서(Book of Kells) 린디스판 복음서와 함께 인술라 양식의 대표 주자. 한 때 '콜룸바의 서'라고 불리기도 했던, 아일랜드의 대표적인 복음서이다. 작자는 불명이고, 작성된 장소도 불명이며, 작성된 시기는 대략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으로 보는 견해가 대부분이다. 켈스의 서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뛰어난 인술라 양식의 대표격으로서, 인술라 양식의 여러 자료 중 가장 발전된 양식을 보이고 있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매우 화려하며 색채 감각이 뛰어나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금하지 못하게 한다. 알 수 없는 때로부터 켈스의 교회에서 계속 보관되어오다가,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이 아일랜드를 침공했을 때 더블린으로 옮겨졌다. 왕정 복고 시대에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 컬리지로 옮겨진 이후, 다른 대학에 대여할 때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이 곳에 보관되어있다. 켈스의 서에 나타난 당시 교회 건축의 모습. 바실리카 양식을 형상화하고 있다. 켈스의 서에 나타난 요한과 여러가지 기하학적 구조. 켈스의 서 중 마테오 복음서 표지. 켈스의 서에 나타난 4명의 복음서 저자. 11시부터 차례대로 마테오, 마르코, 루카, 요한. 켈스의 서에 있는 '성모자상'. 성모자상은 비잔티움 제국에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모티브. '켈스의 서' 중 사도 요한. 옥좌에 앉은 모습과 주변의 기하학적 문양이 특징적이다. 켈스의 서 본문 부분. 본문에도 이처럼 뛰어난 장식이 가미되어있다. c) 더로우의 서(The Book of Durrow) 더로우의 서는 가장 초기의 인술라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더로우의 서는 위의 두 복음서보다 일찍 작성되었는데, 아마 족히 6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더로우의 서는 당시 노섬브리아의 미술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아마 이 더로우의 서가 위에 예시로 든 두 복음서 장식의 모티브가 되었을 것이다. 제작 장소 역시 불명인데, 심지어 이너 헤브리디스 제도까지 거론될 정도로 이 문서에 대한 역사는 베일에 싸여 있다. 아마 바이킹의 습격을 당한 이후로 노섬브리아에 있는 더로우 수도원으로 옮겨졌을 수도 있다. 더로우의 서, 카펫 페이지. 더로우의 서는 주로 이렇게 카펫 페이지 중 유명한 것이 많다. '카펫 페이지'란, 복음서 하나가 끝났을 때 복음서와 복음서를 구분해주는 표지를 말한다. '승리자 다윗'. 더로우의 서에서는 드문 인물상. 다윗이지만, 영락없는 로마노-브리튼인이다. 더로우의 서에 있는 카펫 페이지. 5. 맺음말. 사실 인술랴 양식이라는 것은 이 시기에 브리타니아 제도에서 일어난 일련의 미술 활동을 종합하는 말이기 때문이 반드시 어떤 민족의 양식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켈트족의 미술이라는 것이 보다 더 적합한 정의일 것이다. 당시 서양 미술을 선도하고 있었던 비잔티움 미술과는 다르게, 인술라 미술은 장식이나 조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고위층의 전유물로만 향유되었다는 한계점을 갖는다. 따라서, 이러한 인술라 미술은 당시 고위 족장들이나 관료들이 거주하는 곳에 주로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으며, 이어 중세가 되어 기독교 미술이 확고한 우위를 보이면서 점점 쇠퇴를 거듭해 사라져간다. 시골로 갈수록 인술라 미술 양식을 찾아보기 어려우며, 심지어 당시 시골이었던 곳 중 몇몇은 인술라 미술이 수 세기동안 고위층의 미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을 아예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인술라 미술의 근본적인 한계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술라 미술의 뛰어난 양식은 당시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제국에도 충분히 어필하여 심지어 독일에서 인술라 양식의 성경을 모사하여 성경을 만들기도 했다.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에서 모방된 인술라 양식 성경. 조금 투박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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