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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
게시물ID : panic_488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렐링
추천 : 21
조회수 : 555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09/12/22 22:07:35


어두운 밤길을 빠르게 달리는 한사람.

그녀의 높은 구두굽이 바닥과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쫓는 조심스럽고 소리없는 발걸음.

쫓기는 여자의 이름은 유정이었다.

유정이 이렇게 쫓기기 시작한 것은 일주일 전부터였다.

그녀가 회사에서 퇴근하는 시간은 10시.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걸어가다보면 어느샌가 그가 나타나 따라왔다.


유정은 숨을 헐떡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도포, 검은 신, 검은 갓…….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저승사자라는 그 인물이었다.


미끄러지듯 걸어오는 그 속도는 느린 것 같으면서도 뛰고 있는 유정을 따라잡기에 충분했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유정의 가슴 속에서부터 울려나왔다.

저 뒤에서 나를 쫓아오는 저승사자는 진짜 저승사자일까, 아니면 단순히 사람이 분장한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유정은 계속 달렸다.
진짜 사람이든 아니든, 저 저승사자는 유정에게 해를 끼칠 것만 같았다.


"하아, 하아……. 여, 열쇠!"

유정은 현관 문 앞에 다다르자마자 미친듯이 핸드백을 뒤져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한 저승사자의 손을 가까스로 피하며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문을 잠근 유정은 구두를 신은채로 거실에 뛰어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떨리는 눈으로 문을 쳐다보던 그녀는 밖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않자,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현관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구두를 벗어 신발장에 넣고있을 때, "스윽-"하는 소리가 유정의 고막으로 전해졌다.

"꺄악!"

그 소리에 너무 놀란 유정은 구두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뒤로 벌렁 넘어졌다.



소리의 근원을 알아본 유정은 맥이 풀려 허탈하게 웃었다.


"아……. 아하하, 편지였구나."




일주일이라는 사간동안 매일 밤마다 유정의 뒤를 쫓아오던 저승사자는 유정이 집에 들어가면 행동을 멈추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무짓도 하지 않았지만, 쫓긴다는 그 자체가 두려워 유정은 퇴근하고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새벽이 되면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라도 하는지, 유정이 집근처에 도착하면 변함없이 그가 나타났다.



유정이 항상 가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뛰어가도, 그는 그녀를 쉽게 따라왔다.




"그 저승사자는 우체부였나?"

소원이라도 빌 듯이 유정이 미소를 지으며 편지봉투를 뜯었다.



'네가 죽는 날까지 앞으로 3일'


유정의 손을 떠난 검은색 카드가 요란스럽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그 저승사자는 도대체……."

유정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주워들었다.


그가 진짜 저승사자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버린 그녀에게 남은 결론은 스토커라는 것이었다.

유정은 휴대폰을 들고 '112'를 눌렀다.


그러나 곧 그녀는 한숨을 쉬며 종료버튼을 눌렀다.

경찰서에는 이미 이틀 전에 신고를 한 적이 있었다.



경찰은 유정의 집 앞에서 사라지는 저승사자를 쫓아갔다.


잠시후 유정에게 돌아와 그가 전한 말을 어이없는 말이었다.

저승사자는 분장을 한 배우이며, 그는 숨겨져있는 카메라로 촬영를 하고있다는 것이었다.

유정은 그럴리가 없다며 부정했지만. 촬영허가증도 갖고있더라는 경찰의 말까지 듣고는 그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멍하니 휴대폰을 들고있던 유정은 굳은 얼굴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피곤한 듯한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휴대전화를 통해 흘러나왔다.


"과장님 저에요, 김유정……."

유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어, 왜?"

"저, 몸이 안 좋아서 며칠 쉬려구요."


유정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고 그녀가 심각하다는 생각을 한 남자는 알겠다고 말하며 휴가를 내주었다.




유정은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씻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유정은 한낮이 될 때까지 잠을 잤다.


모처럼 낸 휴가였지만, 그녀는 3일동안 아무데도 나가지 않기로 했다.


위험하게 밖을 돌아다니느니, 집 안에만 틀어박혀 그 날을 넘기자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유정은 점점 두려워지기만 했다.

어떻게 안 건지, 저승사자는 유정이 퇴근해서 집에 오는 시간인 10시에 그녀의 집 현관문 아래로 편지를 넣고 돌아갔다.


'네가 죽는 날까지 앞으로 2일.'


유정은 카드를 꾸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이 사람은 내가 회사를 나가지 않는 것도 알고있어……."


유정은 카드를 버린 쓰레기통을 노려보았다.



따르르릉.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화들짝 놀란 유정은 작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여, 여보세요……."

유정은 온 신경을 귀에 집중했다.


"유정아! 많이 아프니? 아침에 회사에 전화했더니 네가 아파서 휴가를 냈다고 해서……."


전화를 한 사람은 다름아닌 유정의 애인이었다.


"현우오빠!"

유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다.


"왜, 왜그래?! 많이 아파?"

유정의 갑작스러운 울음에 당황한 현우는 괜찮냐며 그녀를 걱정했다.


잠시후 통화를 끝낸 유정은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커다란 가방에 옷을 챙겨넣기 시작했다.


나갈 준비를 모두 마친 유정은 거실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잠시 외출하고 돌아오면 이곳은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녀를 맞아줄 것이다.


유정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집을 나섰다.




딩동-


"열두시입니다."

초인종을 누름과 동시에 유정의 가방 안에서 휴대폰 알림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어디선가 희미하게 뻐꾸기시계의 뻐꾹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요즘에도 뻐꾸기시계를 갖고있나?'

이런 생각을 하며 유정은 초인종을 다시 눌렀다.



잠시후 자다일어난 듯한 얼굴을 한 현우가 문을 열었다.

"아, 유정아……. 미안, 기다리다 잠들었나봐."


유정은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있는 현우가 얄미웠지만, 그래도 같이 있어줄 사람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일단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자세히 설명해줘. 택시타고 오느라 피곤할텐데 침대에서 자. 난 소파에서 잘테니까."


현우가 유정의 짐을 방으로 옮기면서 말했다.

유정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현우는 유정과 함께 있어주기 위해 3일간 휴가를 냈다.

상사와 통화하고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유정은 잠시나마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 하루종일 놀자."

현우가 휴대폰 폴더를 닫으며 아이처럼 웃었다.



둘은 마트에 다녀와 맛있는 것도 만들어 먹고, 게임도 하고 DVD도 봤다.



"아, 물이 없네. 유정아, 마실 것 좀 사올게."


게임을 하고 있던 유정은 여전히 컴퓨터에 시선을 고정한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나가고 몇 분 뒤 유정은 금방 게임이 질려버렸다.


웹서핑을 하기 시작한 그녀의 시선을 끄는 인터넷 뉴스가 있었다.

유정은 멍하니 기사를 읽어내려갔다.



"여자친구가 바람을 핀다는 생각에 스토킹을 하고, 끝내 살해……."

유정의 눈이 커졌다.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 그녀는 갑자기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깜짝놀라, 황급히 컴퓨터를 껐다.


"뭐야? 뭔데 그렇게 후다닥 끄는거야?"

검은 비닐봉지를 흔들며 현우가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유정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그녀를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며, 현우는 "야동이라도 봤어?"하고 농담을 했다.

하지만 유정은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조금전의 그 기사를 본 이상, 현우라고 해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저, 저기……. 오빠, 혹시--"

유정의 조심스런 말은 갑자기 울린 "열시입니다"라는 휴대폰 알림음에 묻혀버렸다.


"응? 뭐?"

현우가 물었다.

그 때 현관쪽에서 낡은 쇠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고, 문의 우편물 출입구 아래로 작은 편지봉투가 떨어졌다.


"저건……."

유정은 떨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그것을 뜯어보았다.


낯설지 않은 검은색 카드와 그 속의 메세지.


'네가 죽는 날까지 앞으로 1일. 내일 이 시간에 마중을 나오겠다.'


다리에 힘이 풀린 유정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유정아! 왜그래, 그게 뭔데?"

현우가 다가와 유정의 어깨를 감쌌다.

유정은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건네주었다.


"이틀 전부터 10시마다 나한테 오는 카드야. 날 내일 죽일거야……."

겁에 질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던 현우는 한숨을 쉬며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 카드에 적힌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무서워하지마. 내가 같이 있어줄게."


유정은 잠시나마 현우를 의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채 계속 울었다.

하지만 현우의 말에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다음날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또 하루를 즐겁게 보냈지만, 전혀 즐길수가 없었다.

시간이 다른날보다 더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어느새 카드에 써있는 약속시간인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계가 9시 10분을 가리키는 것을 보며 유정은 안절부절 못했다.


그녀와 함께 소파에 앉아있던 현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자."


그가 유정의 손을 잡아끌자, 유정은 어리둥절한 얼굴도 따라나섰다.


"어디 가는건데?"

현우의 차에 타서 안전벨트를 매며 유정이 물었지만, 현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유정도 곧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저승사자가 현우의 집도 알고있으니 장소를 옮기려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차는 20분을 넘게 계속 달리기만 했다.

왠지 점점 낯익은 가게들이 늘어서있는, 익숙한 도로를 달리고있다는 생각이 든 유정은 현우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봐온 그의 얼굴 중에서 제일 심각해보이는 얼굴로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제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진지해보였다.



이윽고 차가 어느 골목에서 멈춰섰고, 유정은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집이 캄캄한 어둠속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들어가."

현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왜 여기로 온 거야?"


유정의 물음에 현우는 침묵으로 답했다.

그의 이상함에 유정은 조금씩 불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정은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불빛이 들어오지 않아 암흑 속이었다.

유정은 문을 열면서 바닥으로 떨어진 명함을 주워들었다.
가끔씩 유흥업소 같은 곳에서 이런 명함을 문틈에 끼워놓고 가곤 했다.


'파티플래너 이은종. 결혼에서 돌잔치까지 모든 이벤트를 맡겨주세요.'


유정은 씁쓸하게 웃었다.

'결혼이라……. 현우오빠하고 하고싶었는데.'


그녀는 현우의 손이 어깨에 닿는 것을 느끼고 몸을 움츠렸다.


"유정아, 넌 오늘 죽을거야."


그의 말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똑똑.


갑자기 현관 밖에서 노크소리가 전해져왔다.


"김유정씨 계신가요?"

문밖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유정은 현우를 밀치고 문을 열었다.



"앗!"

유정은 너무 놀란 나머지 뒤로 벌렁 넘어졌다.



그 저승사자가 문 밖에 서 있었다. 두 손에는 작은 상자를 든채.



"이거 받으십시오."

그는 상자를 유정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유정은 식은땀을 흘리며 현우와 저승사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뜯어봐. 뭐가 들었는지 나도 궁금하다."

현우가 씩 웃으며 재촉했다.




유정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작은 분홍색 하트모양 케이크가 들어있었다.

생크림이 발라진 윗면에는 초콜릿으로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한사람이 죽고 두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


유정은 멍하니 그것을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한사람이 죽고 두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




그녀의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유정이 뒤를 돌아보자, 어색하게 웃고있는 현우가 눈에 들어왔다.



"유정아, 나랑 결혼해줄래?"


그의 손에 들려있는 작은 반지가 케이스 안에서 반짝 빛났다.





끝. 09. 09. 22 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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