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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경제사' 백제의 식읍제에 대한 일고찰
게시물ID : history_488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10
조회수 : 132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06/28 18:48:13
지난 글 : '한국고대경제사' 신라의 역녹과 직전-녹읍연구의 진전을 위하여- 1. 식읍제의 실시 1) 식읍관계 자료 검토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식읍에 관한 기사는 657년(의자왕17) 왕이 아들 41명을 좌평에 임명하고 각기 식읍을 내렸다는 것이 유일하다. 한편 "흑치상지묘지명"을 보면 그의 조상이 흑치지역에 봉함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식읍이 아닐까 한다. 중요한 점은 흑치상지의 증조·조부·부친이 모두 달솔의 관등을 지닌 것인데, 흑치상지의 조상들은 증조대부터 달솔 관등을 지녔던 것 같다. 흑치상지 가문은 본래 왕족이었다. 그럼에도 증조대부터 대대로 달솔을 지내게 되는 변화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왕성인 부여씨 대신 흑치지역에 봉해진 이후 흑치씨를 쓰게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단 한 가문의 격 변화는 급작스레 일어나지 않기에 흑치지역에 분봉되면서 곧바로 변화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아마 먼저 흑치지역에 분봉을 받은 뒤 몇 세대가 지나 흑치씨로 칭했던 것 같은데, 흑치상지의 고조보다는 윗대인 6대조나 그 이상의 조상대로 여겨진다. "흑치상지묘지명"에 따르면 흑치상지는 60세에 죽었는데, "신당서"에 따르면 그는 689년 10월에 죽었다. 따라서 흑치상지가 630년(무왕31)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대동지지"에는 계백의 이름은 승(升)이며 계백은 성씨인데 백제의 왕성과 동성이라 하였다. 따라서 계백씨 역시 흑치씨와 마찬가지로 본래는 백제왕성인 부여씨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왕족으로 부여씨인 이 가문이 언제 계백씨를 칭했던 걸까? 그와 관련하여 고대에 '계백현'(=오늘날의 행주)이란 지명이 있었음이 유의된다. 즉 계백현은 왕족 출신으로서 부여씨이던 계백씨 조상의 봉지(=식읍지)였던 셈이다. 계백현 지역을 계백씨 가문이 식읍으로 삼은 구체적 시기를 알기는 어렵다. 2) 식읍제의 실시 중국의 식읍제는 진한대에 왕족과 공신들을 우대하여 지배자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중앙집권체제 확립의 일환으로 안출되었다. 따라서 백제 역시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식읍제 실시 시기가 맞물릴 것이다. 근초고왕대는 이른바 '고이계'로부터 '초고계'로 왕위상속을 확정지은 시기이고, 왕비족은 진씨 세력과 연대하여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기도 하였으며, "일본서기"인덕41년조(수정기년으로는 근초고왕 8년인 353년에 해당)에 따르면 처음으로 국군강장(國郡疆場)을 나누었고, 왕인을 왜에 파견하여 "논어"와 "천자문"을 전수해주기도 하였으며, 무엇보다 영역확장에 힘을 쓴 시기였다. 그에 따라 왕권이 비약적으로 신장되었다고 여겨지는데 369년(근초고왕24)에 군대를 사열하면서 황색 깃발을 사용한 것은 그 반증이다. 황색은 중앙의 색이며 전통적으로 중국의 황제 뿐 아니라 국왕들이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는 근초고왕이 귀족들보다 초월적인 존재임을 과시한 것이다. 요컨대 백제에서 중앙집권체제가 성립된 시기는 대략 근초고왕대로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초월적 존재가 된 근초고왕은 같은 해에 전장에서 공로를 세운 장사들에게 노획한 포로들을 분배해 주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근초고왕은 내정이나 외정에서 특별한 공로를 세운 고위 귀족들에게도 은사를 베풀었을 것 같은데, 그 가운데 식읍도 포함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2. 왕·후호제(王·侯號制)와 식읍 1) 왕·후호제의 실시 "송서"백제전 및 "위서"백제전을 보면 개로왕대에 왕·후호제가 실시되었음을 보여줌며, "남제서"백제전에 나오는 여러 왕·후의 존재는 백제가 웅진천도 이후에도 왕·후제를 실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왕·후호제가 실시된 시기적 상한을 알려주는 문자자료로는 "칠지도명문"이 있다. 369년(근초고왕24, 동진 태화4년)에 제작되어, 372년(근초고왕27)에 왜왕에게 전해졌다고 여겨지는 칠지도를 살펴보면, 백제가 왜왕을 '후욍(侯王)'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근초고왕이 먼저 자신의 신하들에게 후왕의 칭호를 주었고, 이를 왜국왕에게까지 확대한 것이 아닐까 한다. (-> 칠지도의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5세기 초반 전지왕대의 산물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른바 왕후제의 실시를 조금 늦춰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백제 측에서 왜왕을 후왕으로 여겼다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백제 측의 입장이지, 왜 측에서 이에 수긍하였다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2) 왕·후호제와 식읍 중국 사서에 나타나는 왕·후의 칭호 가운데 좌현왕·우현왕을 제외하면 모두 왕·후호 앞에 지명을 관칭하고 있다. 종래에는 이들을 웅진백제기의 대표적인 지방행정관인 담로와 연결시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왕이나 후가 백제의 지방관으로 나오는 예가 없으며, 중국에서도 그런 예는 없다. 따라서 왕·후가 담로의 장은 아닐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신라 하대 김주원이 명주(=오늘날의 강릉)를 식읍으로 사여받고 '명주군왕(郡王)'에 임명된 일이 주목된다. 김주원의 예를 감안하면, 백제의 왕·후호 앞에 붙은 지명도 작호를 받은 자의 식읍지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겠다. 3. 식읍제의 내용 1) 식읍의 수여대상 의자왕이 아들 41명에게 식읍을 수여한 것에서 볼 때 식읍의 수여대상자로 왕족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왕·후호를 받은 자들도 대상이 될 것이며, 백제가 정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영역으로 편입된 지역의 유력자들 일부도 포함될 것이다. 또 "남제서"백제전에 나오는 8명의 작호자 가운데 왕족이 아닌 사람이 5명에 이르는 것을 볼 때, 이성(異姓)의 고위귀족 역시 식읍을 받았을 것이다. 한편 의자왕이 아들을을 좌평으로 임명한 뒤 식읍을 내린 점을 보면, 원칙적으로는 좌평이란 관등을 지닌 자가 식읍 수여의 대상이 아닐까 한다. 단 특별한 경우에는 하위 관등 소지자도 그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 식읍제의 내용 고대 한국에서 식읍주가 식읍민으로부터 조세와 공부·역역까지도 수취하는 것으로 보는 데에는 견해가 일치한다. 그런데 수취할 수 있는 범위에 대해서는 일정 지역에 대해 조세·공부·역역을 취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강진철)와 일정지역 내에서 정해진 봉호에서만 조용조를 수취할 수 있다는 견해(이경식)로 나누어져 이다. "삼국사기" 등을 살펴보면 7세기 이전의 기록에서는 일정지역을 식읍으로 수여하였지만, 7세기에 와서는 봉호 수를 사여했다. 문제는 백제의 사례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자만, 백제 역시 이 범위를 크게 벗어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봉호 수를 식읍으로 사여한 시기는 대략 사비백제기로 여겨진다. "남제서"백제전에 따르면 여근이 면중왕에서 도한왕으로, 여고가 팔중후에서 아착왕으로 개봉(改封)되었고, 불사후의 경우 472년에는 여례가 임명되었다가, 480년에는 여고가 임명되는 등 작호의 주체가 바뀌고 있다. 그렇다면 작호의 수여에 따른 경제적 반대급부로서의 식읍도 세습되지 않았으며, 죽으면 국가에 환수되는 것이 원칙이었을 것이다. 단 이는 어디까지나 원칙이었을 뿐이다. 4. 사비천도와 식읍제의 변화 1) 식읍제의 변화 "일본서기"를 보면 504년(무령왕4)에 백제가 마나군을 보냈다고 하며, 이듬해(무령왕5)에는 사아군을 보냈다고 하는데, 마나와 사아에 '군(君)'이 붙은 것은 이들이 '○○군'이라는 작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령왕대를 기점으로 백제의 작호제가 군호제(君號制)로 변환되었음을 말한다. 이러한 군호제는 성왕이 사비로 천도한 이후 더욱 정비되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와 맞물려 더 이상 지명을 관칭하는 작호가 나타나지 않는다. 즉 이제는 일정 지역이 식읍으로 사여되던 방식이 바뀌었음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에 따라 봉호 수를 정하여 식읍을 사여하는 형태로 바뀐 것이 아닐까 한다. (-> 작호제가 나타나는 것은 "남제서" 등 중국 측 사서이고, 군호제가 나타나는 것은 "일본서기"로 대표되는 일본 측 사서입니다. 양국 사서의 기재 차이라거나 다른 이유가 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2) 식읍의 변화와 배경 식읍은 조용조를 징수하는 것이므로 일반 수조지에서 들어오는 수입보다 물량 면에서 다대하였다. 따라서 식읍주는 식읍 내의 인력과 물력을 통하여 자신의 사적인 경제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 이는 왕권강화에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식읍의 개혁이 불가결했다. 식읍제를 개편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의 확립과 농업생산력 증대, 호구의 체계적인 파악 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무령왕대에는 이전 시기에 비해 왕권이 강력해졌고, 509년(무령왕9)에는 타국으로 도망하여 3~4세대가 지난 자들까지 추쇄하여 백제의 호적에 올리는 조치를 취하는 등 호구를 체계적으로 파악하려 하고 있으며, 510년(무령왕10)에는 전국적으로 수리시설을 확충시키고 있다. 또한 무령왕대에는 가야지역으로의 진출도 활발해졌다. 요컨대 무령왕대의 백제는 농업생산력이 높아지고 토지와 인구에 대한 파악이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백제는 왕·후호제를 군호제로 바꾸고, 그에 따라 일정 지역 대신에 봉호 수를 정하여 식읍으로 하사는 개혁을 단행하여 강력한 왕권중심 체제를 확립해나갔다고 여겨진다. ============================================================================================== 고대사, 특히 고대 사회경제사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분들도 쉽게 읽을 수 있게 평이하게 쓴 글입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노중국 선생 특유의 기발한 견해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데에 한층 의의를 더해주는 글이기도 합니다. 노중국 선생은 식읍에서 조용조를 수취하고, 녹읍에서는 수조권을 가졌다고 보고 있는데, 이 부분은 이 글에서 주된 논의 대상이 아닙니다. 다만 윤선태 선생이나 전덕재 선생의 글을 통해 볼 때, 신라 중대에도 녹읍에서의 수조권 지배가 가능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 때문에, 백제 중앙권력이 일반적으로 관인들에게 수조권을 하사했다고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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