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인격을 갖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드라마의 젊은 재벌들이 보여주듯 기품있고 멋진 모습일까, 아니면 법원을 나서는 휠체어 그 위의 비겁한 모습일까. 이 영화는 후자 쪽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비겁하고 경박하며 천박하기 그지 없는 돈이라는 그 것. 기품어린 레스토랑보다는 번득이는 조명 아래 팔아대는 핫도그같은 맛.
말레나
비디오가 있던 시절 나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소년 때 보았던 특권을 누렸다. (그렇다고 청소년들이 이 영화를 보기를 장려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작은 심장을 부여잡은 작은 소년의 입장에서 극 중 소년이 느꼈던 모니카 벨루치에 대한 온갖 종류의 환상과 가슴 뛰는 사랑을 모조리 감정 이입해 흡수했다. 순간 모니카 벨루치는 내 최고의 여신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이 것이야말로 진정 감독이 원하는 것이었음을, 그래서 모니카 벨루치라는 세계에서가장 아름다운 배우를 스크린 안에 담았음을 나는 알지 못 했다. 다음 장면에서 내 여신 모니카 벨루치는 사람들에 의해 철저하게 찢겨 버리고 마는 것이다. 얼마나 잔혹하고 비극적인 순간이던가.
이따금 말레나를 틀어 그 당시 작은 심장 속에 느꼈던 설렘을 다시 느껴보고자 한다. 그 자태를 보며 여전히 조금은 그 때의 설렘이 느껴진다. 이 설렘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날, 나는 많이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넬라
틴토 브라스는 변태다. 하지만 여성의 가치를 진정으로 아는 변태다.
"여성의 엉덩이와 보석 중에 뭘 택할래?" 라는 질문에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전자를 택할 그는 여성의 신체가 갖는 아름다운 굴곡과 젊은 여성이 가지는 발칙함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겨 오기 위해 늘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하류층의 여성이 앉았던 자전거 의자 위, 냄새를 맡는 두 멀끔한 양복 차림의 남성을 보라. 그래서 그가 숭상하며 담아내는 여성은 몸을 드러낼 수록 천박해지는 대신, 그 가치를 더해간다.
바람난 가족
아메리칸 뷰티를 한국에 옮겨온다면 이런 영화가 탄생할까. 절대 이 명작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가벼움과, 그만큼의 조소를 이 영화는 스크린을 통해 뿌려댄다. "구멍이 어디 있을까요?"라니.. 온갖 규제와 허세로 가득찬 한국 영화계에서 이토록 날 것의 발칙함을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랍다,
사쿠란
이 영화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색감들의 조화를 뽐내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여성의 의복이 보여주는 휘황 찬란함이다. 불을 좇는 나방처럼 남성들은 이 찬란함에 이끌린다. 장미란 안에 가시를 감춘 법, 몇몇은 이 불에 의해 희생되나 희생 끝에 몇몇은 의복 속 곱절로 더욱 아름다운 곡선을 얻어내고야 만다. 그러나 이 곡선 깊숙이 곡선보다도 더욱 엷게 굽어진 여자의 마음을 그 어떤 나방도 제대로 보지 못 한다.
아, 어리석은 남자들이여.
세크리터리
삶으로부터 자꾸만 도망치고자 하는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그녀는 스스로 몸에 벌을 준다.
그러다 정신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고, 치료가 끝난 뒤에는 멀끔한 외모를 가진 변호사의 사무실에 등록한다. 그러나 이 멀끔함 속에는 무시무시한 지배욕과 뒤틀린 성적 욕구가 자리해 있었고, 그녀는 변호사로부터 엉덩이를 맞는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 위로 떠오른 것은 분노가 아니라 기쁨이다.
가학을 받음으로서 삶을 지탱하는 여자와 가학을 가함으로서 삶을 지탱하는 남자가 만들어 내는 기괴한 러브 스토리.
이스턴 프라미스
비고 모텐슨이라 하면 <반지의 제왕>의 아라고른을 떠올릴 이들이 많겠지만, 나에게 비고 모텐슨은 <이스턴 프라미스>와 <폭력의 역사>의 냉혹한 살인마의 모습이다. 개인적으로 데이빗 크로넨버그, 이 파격적인 감독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파격적인 작품이라 생각한다. 마지막 욕실에서의 난투극이 보여주듯 이 영화는 그 어떤 군더더기로서의 의복을 갖추지 않았다. 나체 혹은 날 것의 영화로서,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완벽하다.
더 리더
전쟁 속에서 결코 이뤄질 수 없었던 소년과 성인 여성의 사랑.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자신들조차 완벽하게 인정하지 못한 채 겉돌고 그래서 세월 속 사랑의 추억은 자꾸만 더 아파져 간다.
리틀 칠드런
어른은 절대로 완벽하지 않다.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 부모를 포함한 어른들은 모두 완벽해 보였지만, 그들 역시 덜 자란 그저 리틀 칠드런들에 불과했음을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리틀 칠드런들은 가식적이고 거짓말도 잘 지어내며 허세도 심하고 충동적이다. 이 영화는 우리 리틀 칠드런에 대해 바치는 조소 어린 헌사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처음 만난 곳은 다름 아닌, 군대였는데. 아침 교대 이른 시간 하품을 쏟아내며 도착한 근무지에 이 영화가 틀어져 있었다. 세탁기 위에서 벌어지는 정사에 간부고 병사고 입을 떡 벌린 채 다물지 못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의 난 간첩이 쏟아져 내려와 내 머리에 총구를 들이 댔더라도 리모콘을 잡은 손을 놓지 못 했을 것 같다.
캐쉬백
시간을 멈춰 여성의 옷을 벗기고 나체를 감상하는 남성 주인공은 특별한 능력을 지닌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찰나를 멈춰 아름다움(여성의 나체라니.. 예술가에게 이만큼 완벽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을 감상할 능력이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아 다만 시간 속에 매몰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