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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의 역사 - 4. 아편 제조와 거래 아편을 제조하는 과정은 수세기 동안 변함없이 농부의 손 끝에 의존해왔다. 하지만 아편을 음성적이며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여러 가지 새로운 방법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오늘날 양귀비를 재배하는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기존의 노동집약적인 생산방식에서 벗어나 양귀비 짚으로 알려진 양귀비 씨주머니를 갈아서 가공하는 방식을 쓴다. 이 경우 많은 양의 양귀비 짚들을 가공해야 하기 때문에 대규모 시설을 갖추어야 하는 부담이 따르지만 아편 이외에도 모르핀과 코데인 및 테베인 등을 추출할 수 있기 때문에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다.
정제하지 않은 모르핀 양귀비 짚에서 모르핀을 처음으로 추출한 사람은 1823년 프랑스 화학자 틸로이였다. 그 후 1928년에 헝가리 사람 자노스 카베이가 모르핀을 대량으로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대량생산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서는 양귀비 짚을 가공해 모르핀을 생산하였다.
이후로 모르핀 생산기술은 갈수록 발전하여 현재 고도로 기계화된 공장을 가지고 있는 호주에서는 전 세계 모르핀 수요의 약 50% 정도인 연간 230톤을 생산하고 있다. 아편 생산이 조직화 및 대형화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였다. 그 당시 유럽인들은 전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고 당연히 국제적인 교역량도 늘어나게 되었다. 교역량이 늘어나자 한 번에 거래되는 아편의 양도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조직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아편 사업은 수익률이 아주 높은 사업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인도에서는 소규모 자작농들이 아편을 생산하고, 판매는 조직화된 시장이 담당했다. 당시 인도의 아편 시장은 수만 명의 농부들과 노동자들을 흡수할 만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파트나(인도 비하르 주(州)의 도시. 갠지스 강변에 자리한 도로,철도 교통의 요충지이다)와 베나레스(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에 자리한 고도(古都) 바라나시의 옛 이름. 갠지스 강 연안에 위치하며, 힌두교의 7개 성지(聖地)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사이의 갠지스 평원에서
대량으로 재배된 아편은 인도 농업에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세입원이었다. 1870년 당시 인도의 양귀비 재배 면적은 22억 6,000여 평방 미터에 달했으며, 1871~1872년의 아편 세입이 765만 7,213파운드였다. 이를 오늘날의 환율로 따져보아도 대략 9억 5,0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세금이 이 정도였으니 시장에서 거래되는 아편의 판매액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짐작하기도 힘들다. 아편 제품의 종류와 판매방식은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19세기에 인도의 아편은 40개의 구형(球形)들이 대형상자에 담겨 판매되었으며, 터키의 아편은 회색 옥양목에 포장되어 장방형 바구니 속에 담겨서 판매되었다. 또한 강도와 품질에 따라 금처럼 1~24캐럿으로 측정되었는데, 20캐럿 이하의 제품들은 불량품으로 분류되었다. 인도산 아편의 촉감은 밀납 느낌이며 색깔은 거무스름한 갈색빛을 띤다. 그리고 250그램에서 1킬로그램의 납작한 타원형 덩어리 형태로 만들어져 양귀비 잎에 싸여 유통되었다. 콘스탄티노플(터키 이스탄불의 옛이름. 터키 최대의 도시)에서 생산된 아편은 붉은 밤색을 띠며, 양귀비 잎들로 덮인 작은 렌즈 형태의 덩어리로 판매되었다. 한편, 야즈드(이란 중부 야즈드 주의 도시)와 이스파한(이란 중부에 자리한 옛 도시이며 상공업 도시)에서 생산된 페르시아의 아편은 검은 갈색을 띠며, 200~400그램 정도의 원추형으로 만들어져 납지(蠟紙)에 포장된 다음 막대기에 무명실로 묶여 유통되었다. 이 밖에도 이집트산 아편은 불그스름하고 매우 단단하며, 아이스하키의 퍽처럼 둥글고 납작한 덩어리 형태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