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재미로 나왔던 히치콕 일화에 댓글을 달았었는데,
어떤 분이 또다시 의견을 올리셨고,
그 글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많이 나와서 제가 아는 한에서 주장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글을 씁니다.
일단 상황은 아시는분들은 알다시피,
히치콕의 손녀가 히치콕 영화에 대한 비평 수업에서 c를 맞은 거죠.
그리고 저는 교수를 지지합니다.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었으나, 제가 생각하는 범위내에서 제 의견을 말해볼까 합니다.
1. 비평은 예술이다.
교수를 비판하는 분들 의견 중에서 가장 마음 아팠던 부분인데요.
비평은 예술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분들을 비평을 평가 정도로 여기시는 거 같아요.
창작물에 종속된, 원작자의 의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비평도 예술입니다.
역설적이면서도 당연하게도 시나리오보다 비평이 먼저 문학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물론 창작물이 없으면 비평도 당연히 없겠지만, 비평이 창작물에 종속되야 한다는 의견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황순원의 소나기를 예를 들어보죠.
보라색 말고 다른 예를 들겠습니다. 보라색은 루머도 많고, 이야기가 샐 것 같으니까요.
소나기에 보면 꽃이 망그러졌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 황순원이 이걸 그냥 꽃이 망그러졌다고 썼다고 해도,
비평에서 이건 소녀의 죽음을 암시하는 복선이라고 주장한다면
문학을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문학적 가치도 높아지게 됩니다.
황순원이 알고 썼는지, 무의식적으로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는 표현을 골랐는지, 그것도 아니면 정반대였는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꽃이 망그러진 게 죽음을 암시한다고 여겨졌을 때, 우리는 좀 더 강한 감동을 느끼겠죠.
덧붙여 새로운 문학을 쓸 때 기여하는 바가 클 겁니다.
비평이 예술적 기여를 하는 거죠.
반대로 그냥 막 망그러졌을 뿐이다라고 한다면,
이건 비평이 아닙니다.
개인적 소견일 뿐이고, 비평수업에서는 당연히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들겁니다.
만약 꽃이 소녀의 죽음을 의미한다에 동의할 수 없다면, 꽃이 망그러졌다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합당한 근거만 있다면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겁니다.
터무니없거나, 공감할 수 없는 근거를 내세우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 비평이 모두 가치있게 존재하게 되겠죠.
그렇다면 문학은 더 풍요로워 질 겁니다.
위에 적었듯, 비평은 비평 자체로 예술입니다. 창작된 작품도 아닌 작가에 종속될 수 없습니다.
창작한 순간 작품은 이미 작가의 것이 아닙니다.
원작자는 달을 가리킬 뿐, 달의 여러 모습이나 달로 가는 방법을 알려주진 못합니다.
비평은 달로 가는 방법과 원작자가 가리킨 달의 다른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실제로 원작자가 제대로 알지 못하고 느낌만으로 가리켰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겠죠.
2. 비평은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아닙니다.
비평은 예술이고, 예술에도 우열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예전에 달았던 댓글을 다시 빌려오죠.
위플래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은 드럼을 치는데, 유명한 선생님 밑으로 들어간 촉망받는 재즈드러머입니다.
그런데 친척들은 대학 2부리그 미식축구 선수는 옹호하고, 주인공은 무시하죠.
그러자 주인공이 발끈해서 미식축구 선수에게 너는 고작 2부리그일 뿐이고, 자기야말로 재즈계 최고에게 인정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미식축구 선수 사촌이 말하죠.
"그걸 어떻게 우열을 가릴 수 있어?"
그러자 주인공은 우열을 가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네. 우열을 가릴 수가 있습니다.
스포츠 이야기가 나왔으니 스포츠에 비교를 해보죠.
저는 야구를 좋아하고, 예전에는 아마야구도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어떤 선수를 보면 대충 어느 정도인지 감이 나옵니다. 스피드는 어느 정도인지, 타격은 어느정도인지, 구속은 얼마만큼 나올지.
제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게 아닙니다.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은 해외축구의 모르는 선수를 봐도 대충 어느 정도인지 감이 오시겠죠.
바둑을 좋아하신다면 몇 수만 봐도 어느 정도인지 대충 감이 올겁니다.
피아노를 좋아하신다면 몇 번 건반을 누르기만 해도 감이 오겠죠.
비평도 마찬가집니다. 글을 읽다보면 이 사람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단지 그게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익숙하지 않아서 입니다.
저도 럭비나 크리켓은 선수가 어느 정도 실력인지 몰라요. 왜냐하면 룰도 모르니까요.
대부분이 비평의 룰을 모르기 때문에 우열을 나누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모든 예술에서 우열이 있습니다.
물론 우열을 나눠논 게 항상 옳지는 않겠죠.
그렇지만 그건 세상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스포츠에서도 가끔 못한다고 평가받던 선수가 탑급 선수가 되기도 하는 게 세상이니까요.
3. 비평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교수가 평가할 수 없다.
비평은 분명 주관적입니다. 만약 교수가 이 의견만 옳다고 했다면 그건 교수 잘못이겠죠.
그러나 대학에서 고등학교처럼 정답만을 맞추는 레포트를 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과정을 봤겠죠.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으로 평가했다면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주관적인 것의 과정을 평가했다면 이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평은 다시 말하지만 예술입니다.
모든 예술은 실력이 상관없이 가치있습니다만,
그렇다면 모든 예술은 평가가 불가능한 걸가요?
콩쿨의 1등과 2등을 나누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하고,
영화에 함부로 평점을 매기는 것도 나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예술에는 분명 정답이 없습니다.
주관적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가치가 없죠.
그렇지만 평가는 가능합니다.
예술은 절대적인 가치를 더 많이 추구하는 쪽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예술, 사람들이 더 공감할 수 있는 예술이 더 좋은 예술이 되는 거겠죠.
이건 그렇지 못한 예술이 가치 없다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그 시기에는 그 시기에 걸맞는 예술이 있다는 거죠.
어떤 의상이 지금에는 최고이지만, 후세에는 안 좋아질 수 있고, 반대로 지금은 워스트 드레서가 미래에는 베스트 드레서가 될 수 있습니다.
평가는 지금을 놓고 합니다. 지금의 가치에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높은 평가를 받는 셈이죠.
예를들어서 위에 소나기를 다시 예로 삼죠.
1. 이 소설은 소년과 소녀의 순수를 다뤘고, 여러 가지 상징과 복선으로 문학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2. 이 소설은 그냥 엄청 좋다. 왜냐하면 짜증나는 소녀가 죽어서 신나기 때문이다.
둘 다 평가했습니다. 각자의 생각이죠. 그렇지만, 무엇이 더 비평에 있어서 절대적인 가치에 가까울까요? 무엇에 더 공감하십니까?
아마도 1번일 겁니다. 그렇다면 비평쪽에 전문가인 교수는 좀 더 과정이 매끄럽고, 합당한 근거를 가지고 비판한 쪽에게 점수를 줄 수밖에 없겠죠.
마지막으로 정리하면서 예를 들자면,
우사인볼트가 빠르게 달립니다. 이건 비유하자면 창작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사인 볼트가 어떻게 바람의 저항을 줄였는지, 어떤 근육을 사용했는지 연구할 수 있겠죠. 비유하자면 비평이 되겠네요.
그렇다면 우사인 볼트는 바람의 저항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어떤 근육을 사용해야 빠른지 가장 잘 아는 연구원이 될 수 있을까요?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사인 볼트는 빠르게 달리는 방법을 알 뿐이지, 과학적인 사실을 알고 달리는 것은 아니니까요.
거꾸로 그걸 연구한 사람들은 어떤 자세로 어떤 근육을 써야 빠르게 달리는지는 알겠지만, 실제 빠르게 달리지는 못하겠죠.
이게 비평과 창작의 영역이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히치콕의 손녀가 아니라 히치콕이 시험을 봤다고 치더라도,
히치콕이 올바른 답을 쓰지 못한다면, 히치콕 영화 비평에서 교수는 히치콕에게 f도 줄 수 있습니다.
히치콕의 영화 비평 수업은 히치콕의 영화를 그대로 재현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히치콕의 영화를 비평하는데 그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치콕이 영화를 잘 만드는 것과 별개로,
비평은 그의 전문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영화임에도 충분히 f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