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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경제사'통일 신라시기 호등제의 성격과기능에 관한 연구 1. 신라의 역녹(力祿) 689년(신문왕9) 녹읍을 혁파하고 세조로 대체하기 이전에도 강수 등의 사례를 볼 때 세조를 받는 관인층은 존재하였다. 따라서 이때의 조치는 녹읍과 세조로 분리되어 있던 관인급여제를 세조로 일원화한 것이다. 그런데 689년 이전의 이른바 '전기녹읍기'에는 녹읍과 세조 이외에 또 다른 관인급여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득오곡의 '수레부역(隨例赴役)'이다.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제32대 효소왕 시절 죽만랑(=죽지랑)의 낭도인 득오(or득오곡)는 원래 화랑이었는데, 모량부의 아간(=아찬) 익선이 부산성의 창직(倉直)으로 그를 차출하여 불시에 모임에 참여치 못하게 되었다. 이에 죽지랑은 익선이 공적인 일로 차출되었음을 알고, 음식을 챙겨 익선에게 가서 휴가를 청했지만 익선이 허락치 않았다. 이때 마침 추화군의 능절조(能節租) 30석을 수령하던 운반하던 사리(使吏) 간진이 30석 전부를 주며 득오의 휴가를 청하였으나, 그래도 익선은 거부하였다. 이에 사지 진절의 기마안구를 더 주자 그제서야 허락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의 화주(花主)가 분노하여 익선을 잡아오라고 하였는데 익선이 도망하였다. 이에 그 큰 아들을 잡아 성 안의 못에서 목욕을 시켰는데, 날씨가 매우 추워 얼어죽었다. 왕인 이 소식을 듣고 모량리 사람으로서 관직에 종사하는 이들을 모두 내쫗고, 다시는 관리나 승려가 되지 못하게 하였다.("삼국유사"효소왕대죽지랑) 이 이야기는 효소왕대의 일화로 나오지만, 미시나 아끼히데 이래 진평왕대의 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다시 말해 이 사건 자체가 효소왕대의 일은 아니고, '효소왕대에 있었던 죽지랑의 낭도 출신인 득오 급간의 일'로 이해해야 타당하다. 한편 이 이야기의 후미에는 후일 죽지랑을 흠모하는 노래인 '모죽지랑가'가 실려 있는데, 그 원전은 아무래도 진성왕대에 편찬된 "삼대목"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상황은 대체로 신라 당대에 일어났던 실제 사건에 기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주목되는 점은 득오가 익선에 의해 부산성의 창직으로 차출된 뒤 '수례부역(隨例赴役)'으로 익선의 밭을 경작한 것이다. 죽지랑이 이를 '공적인 일=공사'로 인정하고 있듯이, 수례부역은 신라의 역역체계 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득오의 수례부역은 익선의 당연한 권리였기 때문에, 그는 당대 최고권문의 자제인 죽지랑의 청을 강하게 거절할 수 있었다. 익선이 처벌받은 직접적인 원인은 익선이 국가에 부여한 수례부역을 악용하여 적정 이상의 대가를 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 신라는 익선에게 수례부역의 특권을 허용하면서도 불법적인 수탈과 축재 역시 규제했던 셈이다. 익선의 역역차출권은 그의 직함으로 전해지는 '당전(幢典)'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익선과 유사한 임무를 띤 관인에게는 일반민호를 역역 대신에 자신의 개인 잡역에 충원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을 것이다. 요컨대 득오의 수례부역을 통해
689년 이전 신라에서 녹읍이나 세조와는 별도로, 특정 관인에게 무상의 노동력을 지급하는 관인급여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도 국가가 관인에게 무상의 노동력을 지급하는 급여체계가 한당시대에 존재했는데, 흔히 이를 '역녹'이라 부른다. '역녹'은 현물을 지급하는 '봉녹'이나 전지를 지급하는 '직전'과 함께 관인급여를 구성하는 3가지 경제적 기반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익선은 권문자제인 죽지랑과 대립하여 자신의 특권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고, 또 이를 통해 무리한 대가를 챙기고 있음을 보면, 이 역역에 동원되는 일반민들의 예속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득오곡이 익선의 밭에서 일하는 노동력으로 충원된 점을 보면, 이는 당시 지배층의 대토지경영이 국가권력이 보장하는 예속노동력을 한 축으로 하여 전개되었음을 의미한다. 2. 중대의 도적과 공사채에 관한 법률 669년(문무왕9) 2월 21일 문무왕은 뭇 신하들을 모아놓고 하교를 내린다. 이 하교의 후반부에는 사면과 복권 및 경제적 시혜에 대한 구체적 시행세칙이 나와 주목된다. 첫 번째 세칙은 오역죄(=임금·부모·조부모를 죽인 죄) 및 사죄(死罪) 이하를 저지른 죄수를 사면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오역죄는 사죄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오역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당시 중대 왕권이 충효를 중요시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 세칙은 탈작된 자의 옛 작(爵), 즉 관등을 회복시켜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신라의 관등소지자에게는 국가가 부여한 '형벌면제'의 특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도 '형벌감면'이 기타 특권보다도 두드러진 '작'의 기능으로 규정된다. 세 번째 세칙은 경제적 시혜에 관한 것인데,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도적을 석방하되 훔친 물건 값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신라는 형법이 고구려·백제와 비슷하다고 하므로, 문무왕대에는 적어도 3배 이상의 율이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면에 의해 도적이 석방되는 경우에도 배상의 의무는 면제되지 않았다. 문무왕대 신라에서도 당률처럼 사면 시에 도적의 배상만은 면제하지 않는다는 법률조항이 있었기 때문에, 하교에서 사면과 함께 도적의 배상도 면제한다는 특별 세칙일 부가한 것 같다.
문무왕이 사면과 동시에 도적의 배상의무를 면제해 준 것은 이들이 관등소지자의 예속노동력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일 것이다. 후자는 남의 곡식(=공사채의 일종)을 빌린 자 가운데 수확이 좋지 않은 지역에 있으면 이자와 원래 곡식을 모두 갚지 않아도 되며, 만약 수확이 좋은 지역에 있다면 금년 추수에는 원래 곡식만 갚고 이자는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교에서는 고려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채권자가 채무자의 토지와 자녀를 빼앗는 불법적인 수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치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에서 도적과 공사채를 갚지 못하는 사람은 노비로 삼고 있어 주목된다. 이는 고려에서는 명백한 불법이었지만 고구려에서는 통용되는 합법이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법률이 비슷했다고 하므로 사정은 같았을 것이다. 재상가가 거느렸던 노동 3천 명 가운데에는 이러한 부채 노비가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소농민을 보호하려는 문무왕의 의지와는 상반되는 수탈방식, 즉 지배층이 사채를 통해 노비 확대를 꾀하는 고리대가 합법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국가가 이처럼 가혹한 고리대 정책을 용인한 것은 고리대를 규제하면 오히려 역작용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여파가 극심한 당시 신라 농민 재상산이 이후의 어느 시기보다도 지배층의 공사채에 강하게 의존하였을 것이기에, 그에 비례하여 지배층의 입장이 강하게 투영된 고리대 정책이 실시될 수 있었다.
신라의 공사채가 농민의 '재생산' 유지에 절대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신라의 농업생산성 자체가 불안정하고, 생산력 수준이 낮아 농민 상당수가 공사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던 사회경제적 현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농업생산력 아래서는 지배층의 농업경영 역시 전호제경영보다는 예속노동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도적과 공사채에 관한 신라 중대의 법률로 볼 때, 중대까지 역녹 제도는 존속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라 직전제의 운영 방식 역시 이러한 토대 위에 서 있을 것이다.
3. 관료전과 내시령답 중국에서 관인 복무의 대가로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는 위진남북조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후한 말의 혼란기를 거치며 중앙집권적인 수취구조가 파괴되고, 이에 따라 봉록제가 부실해지자, 이를 보조하는 급여로 직전제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는 앞서 언급한 역녹, 즉 관인에게 무상의 노동력을 지급하는 관인급여제도 성립한다.
그런데 위진남북조의 직전제는 중앙 고관에게 지급된 채전(菜田)을 제외하면 모두 지방관에게만 직전이 지급된 공통점이 있다. 이 시기에 지방관에게만 직전이 지급된 것은 지방관에게 역역의 노동력을 역녹으로 인정해준 것과고 연관된다.
남북조시대는 농업생산 자체가 극도로 불안정했다. 따라서 경작노동력을 항상적으로 확보할 수 없는 중앙의 중·하급 관인에게는 직전이 급여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결국 중앙관에게는 녹봉을 급여로 지급하였고,
지방관에게는 부족한 중앙재정을 감안하여 일반 민호의 역역을 급여로 인정하고, 이를 통해 직전을 경영토록 하였다. 수당대에 이르면 모든 관인을 대상으로 한 직전제가 성립하였다. 하지만 이 직전 역시 전호제로 경영된 것은 아니고,
직전이 소재해 있는 해당 주현의 지방관이 농민의 역역을 직전에 강제적으로 충당시키는 요역노동에 의해 경영되었다. 직전의 소작적 경영은 송대에나 가능하였다. 이는 관인에게 무상의 노동력을 지급하는 역녹이 송대 이후 소멸된 것과도 연관된다.
요컨대 농업생산력이 열악한 시기에는 국가나 지배층의 농업경영이 예속노동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중국의 상황은 신라의 경우를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중대 신라 역시 모든 관인에게 직전을 분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라의 정책입안자가 신라의 사회경제적 현실을 무시했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본 율령국가시기 관인이나 관위소지자에게 지급된 급여는 크게 토지와 현물, 노동력 등이 있는데,
현물만 모든 관인을 대상으로 지급되었고, 토지와 노동력의 지급은 관위, 즉 관인의 위계에 의거하여 주어졌다. 요컨대 일본 율령국가시기에는 관인급여체계 속에서 신분제가 큰 역할을 했다. 신라의 관인급여제 역시 신분제인 골품제에 의거하여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강수는 673년(문무왕13) 사찬으로 승진하면서 세조 200석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김유신의 부인에게는 712년(성덕왕11) 세곡 1000석이 지급되었다. 강수와 김유신 부인에게 지급된 세조의 양을 볼 때,
신라에서는 녹질 간에 녹봉액의 차이가 크며, 상위로 올라갈수록 그 차이가 더 커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의 직전제는 경관의 경우 최고신분층인 정3위 대납언 이상의 고관에게만 지급되었고, 외관의 경우에는 하급관인에게까지 충실하게 지급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마치
위진남북조시대의 직전제와 상통한다. 일본이 당처럼 모든 관인에게 직전을 급여하지 못했던 것은 낮은 농업생산력 때문에 율령국가기의 수취체제가 노동력 수탈에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신라의 직전제 역시 당시의 사회경제적 현실, 즉 농업생산력이 낮아 대다수 농민이 지배층의 공사채에 의존했던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따라서
신라의 관료전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나 일본의 율령국가기처럼 골품제에 입각하여 진골 고관에게 일차적으로 분급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또 모든 관료를 대상으로 한다기보다는
역녹이나 요역노동에 기초하여 경영되는 외관 중심의 직전제일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경관에게는 세조가 지급되었을 것이다.
"신라촌락문서"에 기록된 '내시령답'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지급된 직전이라 하겠다. 내시령은 왕실직속촌의 수취를 위해 파견된 하급관리로 이해된다. 내시령의 권농관적인 성격에 주목한다면, 당시 내시령은 지리적 인근이나 촌주를 매개로 하여 일정 단위로 묶여 있는 왕실 직속지를 통할하고, 그곳의 안정적인 생산확보를 위해 파견된 특별행정관일 가능성이 높다. 또 내시령은 나무를 심게 하는 것에서 볼 때, 촌락민에 대한 역역징발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공전(公田)에 설정된 내시령답 4결은 촌락민의 역녹이나 요역노동에 의해 경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끝으로 신라의 직전을 고려 전시과의 수조권적 지배와 연결하는 견해에서는 한결같이 신라의 '전조적 지배'를 강조하고 있다. 신라 하대에 전조가 수취체계에서 중심적 문제로 제기되고 있긴 하지만, 이를 신라 전시기로 확대할 수는 없다.
중국에서도 한~당 전기까지 경무제에 의해 토지가 구획되었고 전조의 수취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수취구조의 중핵은 인정을 기준으로 한 노동력의 수탈이었다. 촌락문서에서는 연인(烟人)의 항목이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연령등급체계 역시 세분되어 있다. 이는 연령등급체계사 신라의 수취체계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음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한대부터 연령등급체계가 확인되는데, 이후 강고히 유지되다가 당 후기 양세법을 분수령으로 사라진다.
중국에서 연령등급체계가 강고하게 유지되던 시기는 대체로 인두세가 수취의 중심을 이루던 때인 셈이다. 신라 중대와 양세법 시행 이전 중국의 연령등급체계가 유사한 점을 볼 때, 신라 중대에 인정을 중심으로 한 노동력 운용이 주목받았음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다. ============================================================================================= 사회경제사 쪽에는 문외한입니다만은, 현재 제 견해를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서유럽의 역사발전을 전 세계에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느껴 고대·중세·근대의 3시기 구분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만 만일 구분을 시도한다면, 고대와 중세의 전환점을 대개 노동력을 중시하는 사회가 토지생산력 발달에 따라 토지의 수확물을 중시하는 사회로 변하는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한 통설에 입각할 때, 한국 고대·중세의 분기점은 크게 통일신라 성립기와 고려 초라는 두 견해가 나누어져 있습니다. 윤선태 선생은 통일신라가 성립한 신라 중대에도 여전히 노동력이 중시되었다고 보므로, 이 글에 따른다면 고대는 일단 나말여초까지 이어지는 셈입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인데,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족입니다만 윤선태 선생은 남들이 그냥 간과하기 쉬운 사료를 새롭게 음미하여 그 안에서 역사적 사실을 추출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연구자입니다. 사료 부족에 시달리는 한국고대사의 특성상 이러한 자세는 추후 후속세대들이 길러야 할 미덕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그것이 궤변으로 흐르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