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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대한제국200년사-(마지막회)PAX KOREANA
게시물ID : history_48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2013년체제
추천 : 18
조회수 : 1417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2/06/24 00:54:56
제 3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을 비롯한 유럽 주요국가들이 대한제국에 참패하고, 동남아시아 각국이 독립하여 민족국가를 수립하자 아랍세계와 아프리카에도 거센 독립의 기운이 넘쳐나게 되었다. 
인도는 이미 네루의 영도 하에 영국에서 독립하여 5억의 인구를 가진 거대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고 이집트에서는 나세르의 주도로 친영국 왕정이 타도되어 아랍민족주의의 구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아프리카에서도 프랑스 식민지인 가나에서 엥쿠르마가 이끄는 독립운동이 성공한 것을 신호탄으로 독립국가 건설의 열망이 급속도로 확산되어 나갔다. 

3차 대전의 패배 이후 구미열강의 식민지 모국들이 급격히 위축되자, 이후 10여 년간 전세계의 피압박 국가들은 거의 독립을 쟁취하게 되고 대한제국은 이들 신생국의 정신적 물질적인 지주국가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전쟁영웅 장준하 대한제국군 총사령관이, 여운형 총리의 뒤를 이어 사민당 총재에 오르고, 총선에서 박정희가 이끄는 보수당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새 총리에 올랐다. (1960년) 

식민지를 상실한 미국과 영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은 군사력을 동원한 직접적인 침략행위가 더 이상 불가능해지자 새로운 전략으로 제 3세계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신생독립국들은 막상 독립이 되었지만 거의 전무한 경제기반과 불안한 정치환경 등으로 빈곤의 수레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틈을 타 식민주의자들은 점령기간 중 자신들에 충실히 협조했던 매판세력들을 부추겨 권력과 부를 보장하고, 군사쿠데타 등 다양한 방법으로 민족주의 성향의 독립정부를 위협하고 자신들의 경제적 이권을 회복하려는 이른바 저강도 전쟁을 전개하여 나갔다. 

장준하 총리는 국가정보부(Korea Intelligence Agency)의 기능과 권한을 대폭 강화하여 제 3세계에서 미국의 공작을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나갔다. 
KIA는 미국의 지원을 받고 은밀히 군사 쿠데타를 준비하던 베트남의 고 딘 디엠,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필리핀의 마르코스, 칠레의 피노체트 등을 잇달아 적발해 각국 정부에 통고해 이들의 반란을 사전에 봉쇄하는 한편, 대한제국 정부는 미 합중국 정부에 독립국가의 전복을 획책하는 비열한 음모를 즉각 중지하라고 강력히 경고하고 캘리포니아에 주둔하고 있던 제국군에 전시동원령을 발동하는 등 초강력 대응을 시사하였다. 

미국의 CIA가 개입한 제 3세계 각국의 쿠데타 미수 사건 이후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비난과 경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반면에 대한제국에 대한 우호와 친선의 기운은 아시아 뿐 아니라 중남미,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에 미치게 되었다. 
특히 쿠데타 직전에서 헌정질서를 지켜낸 칠레의 아옌데 정부와 아르헨티나의 페론 정부는 중남미 지역에 대한 대한제국의 진출에 적극 협조하고,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독점적 지위를 축출해 버리게 되었다. 

아프리카 최대 국가인 콩고의 분열을 통해 거대한 텅스텐 광산의 독점적 채굴권을 되찾으려던 벨기에의 시도도 대한제국의 개입으로 무산되고, 이 사건 이후 아프리카 국가에 대한 유럽 식민 모국의 영향력도 급속히 감소해 나갔다. 
또 유일한 인종차별국가였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국제적 압력을 집중시켜 마침내 자유 선거에 의해 넬슨 만델라가 이끄는 평등국가의 탄생을 유도해 내는 등 검은 대륙에서의 위상도 날로 높아져 갔다. 

뉴 프론티어(New Frontier)정책을 표방하며 합중국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된 케네디(J. F Kennedy)는 자국 정부의 반동적 정책에 대하여 전 세계 인민에게 공식 사과하고 사태 재발을 약속하며 책임자를 처벌하는 등 신속하게 상황수습에 나서는 한편, 새로운 전략의 실패를 인정하고 더 이상의 공작의 중지를 명령하게 되었다. 
이러한 케네디 대통령의 전향적인 태도에 크게 실망한 제국주의적 다국적기업의 우두머리들은 존립의 위협을 느끼며 극우 파시스트들을 사주하여, 케네디 대통령과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잇달아 암살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중국 공산정부는 중원을 차지한 후 이후 티베트와 위구르 등 변경에 대한 주권의지도 확실히 밝혀 북경 정부로의 복속을 시도하였다. 
티베트를 강점하고 있던 영국은 2차 대전 이후 달라이 라마를 국가 지도자로 독립국을 수립하게 한 후 철수해 버리나, 중국은 티베트를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중국 주권 하에 있는 영토로 간주하고 무력침공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이러한 중국의 호전적인 행위에 대한제국 정부는 김일성 공산당 서기장을 모택동에게 특사를 보내, 티베트와 위구르에 대한 군사행동은 신생 중화인민 공화국에 대한 국제적 이미지가 실추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각국 인민들의 반제국주의 투쟁에도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모처럼 만에 조성된 아시아의 평화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주지시키는 한편, 중화인민 공화국에 대한 외교적 승인과 경제 원조를 대가로 티베트 침공을 적극적으로 만류하고 나섰다. 

대한제국의 외교적 중재로 상호간의 양보를 이끌어내 결국 티베트와 위구르는, 중화인민 공화국 주권 내에서 독자적인 정부와 의회를 갖는 자치 공화국으로 그 위상을 정하고, 사회주의 체제의 본토와는 달리 두 민족의 종교적 자유를 예외적으로 존중하는 선에서 원만히 정리하게 되었다. 

국제사회에 해방과 독립의 기운이 넘치자 이에 자극 받은 헝가리와 체코 등 소련의 영향하에 있던 동구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예외없이 거센 자유화 바람이 불어닥쳤고, 이들 국가의 종주국임을 자처해 오던 소련은 군대를 침공시켜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려 들었다. 

대한제국은 국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긴급 소집을 요구해 소련 공산당에 대한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의 비난을 집중시키고, 동구에 대한 무력침공은 제 3세계와 사회주의 국가들의 이반을 불러 올 것이라는 사실을 강력히 경고해 마침내 소련의 양보를 얻어내고 동구국가의 자율적인 정부 운영을 허용토록 하였다. 

대한제국의 국제사회에 대한 도덕적이고 지도적 역할로, 세계는 오천년 인류 역사상 최대의 위협이었던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평화적 시기를 맞게 되었다. 
제 3세계에서는 기아와 질병 등 오랜 인류의 숙원이 점차 해결된 조짐을 보이고 선진국에서는 환경과 복지 등 새로운 과제의 해결에 주력하게 되었다. 

민족적 분쟁과 종교적 갈등이 점차 희석되면서 점차 인종과 영토, 언어와 종교 등을 주요시하던 근대적인 민족국가의 개념이 인류공동체 개념으로 변화되어 나갔고, 유럽연합(EU)과 아세안(ASEAN)의 결성 등 각지에서 정치 경제적, 사회 문화적 블록의 결성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나갔다. 

영종이 재위 44년 만인 73세로 승하하고, 이 광이 50세의 나이에 광종으로 황위에 올랐다. (1970년) 

세계평화를 정착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으로 세계적 영웅으로 추앙 받던 장준하 총리가 은퇴하고, 사민당의 김대중 후보와 보수당의 전두환 후보가 맞붙은 총선에서 다시 사민당이 압승하여 김대중 후보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총리에 올랐다. (1980년) 

20세기 마지막 10년, 세계는 미국의 자본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 대한제국의 사회민주주의라는 산업화 시대에 정형화된 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천년의 미래사회에 적합한 체제의 시험에 경쟁적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미국의 빌 클린턴, 영국의 토니 블레어, 소련의 푸틴, 중국의 왕단(王丹) 등 40대의 젊고 힘있는 지도자들에 의해 세계체제는 새로운 천년을 맞이할 새로운 화두(話頭)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광종이 재위 31년 만인 81세의 나이에 소생 없이 승하하여 황위 계승권을 놓고 논란이 일자, 제국 의회 내 소장 개혁파는 이 기회에 국가정체를 공화제로 바꿀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나섰다. (2001년) 

대한제국 전 영토에 걸친 격렬한 논란을 거친 끝에 국가정체에 대한 결정은 결국 전체 국민투표에 부쳐지고, 결과는 200여 년에 걸친 제제(帝制)가 폐지되고 공화제(共和制)가 선택되었다. 
이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호는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바뀌고 정체는 대통령 중심제가 되었다. 

2002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선거는 초반, 집권여당인 사회민주당의 이인제 후보와 야당인 보수당의 이회창 총재가 각축을 벌여 나갔으나, 기성 정치권의 구정객들에게 식상하여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는 다수 유권자들에게 철저히 외면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에 새 천년, 새 세상의 건설을 결의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한 '제 3의 힘'의 노무현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며 정치권에 등장하여 전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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