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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대한제국200년사-(19)제2차세계대전과 중화인민공화국
게시물ID : history_481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2013년체제
추천 : 11
조회수 : 98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6/23 22:10:34
1930년대 세계 산업자본주의는 대공황에 빠져들게 되고, 그럴수록 식민지에 대한 구미열강의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독일과 이탈리아 등 근대적 통일국가의 성립이 늦었던 이유로 미처 식민지를 확보하지 못하였던 국가들의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고, 마침내 히틀러와 무솔리니 등 파시스트 지도자의 등장으로 유럽은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되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합병한데 이어 폴란드를 전격 침공하자 영국, 미국, 소련이 한편이 되고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가 또 다른 한 편이 되어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1939년)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제국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이번 전쟁을 구미열강들의 식민지 다툼에서 비롯된 제국주의적 탐욕의 결과라고 규정하고 교전 각국들을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이들은 나아가 이 기회에 대한제국이 직접 나서, 중국을 비롯한 10억 아시아 인민들을 구미열강의 가혹한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내야 한다는 강경한 반제국주의 성전(聖戰)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러한 민족해방론은 사회전반에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지식인과 대학생 등 청년층 사이에는, 대한제국이 구미열강에 맞서 아시아 공영의 해방자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낭만적이 사조가 유행처럼 번져 나가게 되었다. 
자본가들도 자신들이 소유한 공장에서 생산한 물품의 시장과 원료 공급지의 역할을 하게 될 식민지 영토를 필요로 하여, 피압박 인민의 해방을 명분으로 역시 이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은 공산당 또한, 아시아 제국에 식민 모국을 축출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인식하여 정부에 적극적인 개입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렇듯 각자의 이해에 따라 전쟁을 보는 관점은 다 달랐지만 참전의 욕구는 전 인민적 기운으로 날이 갈수록 거세 지고 있었다. 

1935년 치러진 총선에서, 보수당 후보 이승만을 누르고 사민당의 김구가 총리에 오르자 이러한 전 인민적 열망은 점점 구체화되어 나갔다. 사민당과 보수당 공히 총선 과정에서 참전을 촉구하는 대중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전쟁에 관해 전향적인 의지를 표명하였지만, 보수당의 태도는 또 다른 침략자의 추악한 야욕에 다름 아니었고 사민당의 자세는 진정한 해방자로서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서로 상이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새로이 대한제국의 총리에 오른 김구는, 유럽의 전쟁을 아시아에서 구미 제국주의자들을 완전히 축출할 수 있는 좋은 계기로 판단하여 자신이 국가정보부장으로 재직할 당시 심혈을 기울여 조직했던 아시아민족해방전선(ANLF)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전면적인 민족해방투쟁을 촉구하고 나섰다. 대한제국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동남아시아 각국의 혁명조직은 식민지 본국에 일제히 선전포고하고 전면적인 군사행동에 돌입하고 나섰다. 

프랑스의 식민지인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제일 먼저 본격적인 독립항쟁의 신호탄이 터져 올랐다. 호치민이 지도하는 독립무장조직의 거센 도전에 직면한 프랑스 식민지 주둔군은, 본국이 독일에 점령당해 있는 상태였던 터라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철저히 고립된 상태로 사이공 등 해안의 일부 도시지역만 필사적으로 수비하기에 급급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를 식민 통치하고 있던 자카르타의 네덜란드 식민 당국의 신세도 사이공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영국의 식민지인 버마와 말레이시아에서도 독립을 요구하는 무장투쟁이 격화되자, 영국의 식민지 총독부는 당장 유럽전선에서 본토에 대한 독일의 침공을 막기에도 정신이 없던 지경이라 이들과의 협상을 통해 전쟁 후 독립의 보장을 약속하며 사태의 수습에 여념이 없게 되었다. 더구나 영국은 버마에서의 무력투쟁이 인도로까지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인도 독립운동 지도자인 간디에게 인도에서만큼은 비폭력 노선을 취해 주도록 회유하기 바빴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관계가 적대적이었던 대한제국 해군이 태평양에서 하와이 인근 해역까지 
무력시위를 벌이는 상황이라 처칠 영국 수상의 필사적인 지원 호소에도 불구하고 유럽전선에 선뜻 발을 들여놓기조차 힘든 처지였다. 
지난 볼셰비키 혁명 당시 대한제국군의 군사적 침공을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던 소련도 대한제국의 공산당 지도자인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은밀히 불러, 대한제국이 소련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정부에 잘 협조하라는 지시와 아울러 아시아 각국의 민족해방투쟁에 대한제국이 적극 지원할 수 있도록 자국 내에서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선전, 선동활동을 전개하라는 지령을 내려놓고 있었다. 
이러한 대한제국의 아시아 각국에 대한 민족해방투쟁 지원 움직임은, 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대한제국이 구미열강과의 한 판의 대격돌도 불사하겠다는 전면적인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져 당장 유럽에서 독일과 힘겨운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과 영국은 물론 소련에게도 큰 위협으로 인식되었던 것이었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아시아에서의 무력투쟁도 점차 격화되어 나가자, 소련의 스탈린 대원수의 중재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 그리고 대한제국의 김구 총리는 흑해 인근의 작은 도시인 얄타에서 모여 긴급 정상회담을 갖게 되었다. 
정상회담에서 4개국 정상은, 종전 후 구미열강이 통치하고 있던 아시아 각국의 모든 식민지를 완전히 독립시키기로 합의하고 그 대신 각국의 독립조직에 무력투쟁을 즉각 중단하고 전쟁에 협조해 주기를 호소하기로 하였다. 
대한제국도 일본과 만주, 몽고, 대만 등 제국 내의 자치국을 완전 독립시키기로 하고 기타 아시아 제국에 대한 독립운동 지원도 중지하기로 결정하였다. 
또 청제국과 구미열강 사이에 체결되었던 중국에 대한 기존의 모든 불평등 조약을 철회하고,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홍콩과 포르투갈이 지배하고 있던 마카오도 중국에게 다시 환원하기로 하는 한편 티베트에서 영국이 철수하는 대신 중국의 종주권도 인정하지 않기로 하여 독립국가를 만들도록 하였다. 
당시 대한제국이 점령하고 있던 알래스카와 류쿠열도, 사할린과 쿠릴열도에 대해서는 미국과 소련이 각자 자신들의 영토임을 주장하며 대한제국에게 환원을 요구했으나, 대한제국은 그러한 주장의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고 민족 구성원도 다르며 특히 구 러시아와 미국이 먼저 도발한 전쟁의 책임을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이들 지역은 주민들의 자유로운 의사를 최우선으로 존중하여 추후 결정하기로 하였다. 

대한제국은 미국이 알래스카 문제에 있어서 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자 하나의 중재안을 제시하였다. 김구총리는, 1차 대전후의 세계질서를 재편하였던 산레모 회의의 결정에 따라 추진되고 있던 팔레스티나 지역에 유태인 국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이 지역에 수 천년간 거주하고 있던 아랍민족의 강력한 반발로 향후 세계평화의 치명적인 화약고로 작용할 수 있다고 예언하고, 현재 대한제국이 점령하고 있는 알래스카에 유태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였다. 
자신들이 위임통치하고 있던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아랍인과 유태인들과의 갈등이 점차 심각한 지경으로 치닫자 골치를 썩히고 있던 처어칠은 김구총리의 이 같은 뜻밖의 제안에 적극적인 찬성의 의사를 표명하였다. 미국은 자국내 유태인들을 배경으로 팔레스티나 지역에 건설될 예정이었던 유태인 국가를 장기적으로 중동진출의 교두보로 이용할 예정이었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알래스카를 무력으로 되찾기 위해 다시 대한제국과 힘겨운 전쟁을 벌일 수도 없던 상황에서 차라리 이 지역에 친미적인 유태국가라도 건설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는 판단으로 알래스카에 유태인 국가를 건설하는 문제에 동의하게 되었다. 
나아가 기독교, 이슬람교, 유태교의 공통적인 성지인 예루살렘을 아랍인 통치지역에서 분리해 내어, 로마 교황청이 자리하고 있는 바티칸 시국처럼 세속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중립지대로 선언하고, 이 지역은 향후 만들어질 국제연합(United Nation)의 주도로 공동 관리하기로 결정하였다. 

얄타에서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전쟁은 전기를 맞이하고, 아시아에서의 평화로 미국과 소련이 유럽전선에 적극 참전할 수 있게 되자, 전세는 현격히 연합국 쪽으로 기울어 마침내 이탈리아에 이어 독일도 항복하고 마침내 전쟁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1945년)

상해에서 탈출한 공산당은 1931년 강서성의 서금(瑞金)에서 중화소비에트 제 1차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헌법을 채택하고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의 성립과 임시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정부의 주석에는 모택동, 부주석에는 장국도, 군사위원회 주석에는 주덕이 각각 선출되었고 서금을 공화국의 임시 수도로 정하였다. 
이 날로 국민당에 의해 잠시 통일되었던 중국대륙에 또 하나의 정부가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지만 공화국이 전체 중국대륙에서 그나마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지역은 2, 3개 성에 지나지 않았고 장악하고 있는 인구도 1천만 정도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대한제국군이 만리장성 이남에서 철수한 이후 군사쿠데타로 공산당을 축출하고 정권을 독점한 장개석의 국부군은 하남성과 호북성 일대에서 산발적으로 할거하던 군벌의 잔당들을 완전히 섬멸하고 마지막으로 공산당이 새로운 근거지를 확보한 강서성과 호남성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국부군에 참가하고 있던 군벌 출신의 장성들은 하나같이 공산당이 조직한 홍군(紅軍)을 지방에서 할거하고 있는 일개 비적(匪賊)의 잔당쯤으로만 치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국민당의 국부군과 공산당의 인민해방군의 전력은 병력, 무기, 군수보급 등 어느 한 부분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큰 격차가 있었다. 
하지만 청년 시절부터 공산당의 열렬한 혁명가들과 함께 싸우며 겪어 온 장개석은 공산당의 위력이 그리 만만치 않은 존재임을 잘 꿰뚫고 있었다. 그러한 그였기에 아직 승전의 기쁨이 채 식기도 전에 서둘러 또 다른 공세에 나선 것이었다. 장개석이 다수 장성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홍군 토벌에 나선 것은 공산당의 진용이 갖추어 지기 전에 원천적으로 뿌리를 뽑겠다는 심사였으며 다른 한편으론 공산당의 무한한 잠재력을 실감한 두려움에 기인한 행동이었다. 

장개석도 처음에는 아직 공산당의 세력이 얼마 되지 않음을 파악하고, 공산당의 소비에트가 들어선 강서성의 성장에게 토벌 지시를 내렸다. 이로써 강서성장 노척평(魯滌平)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국부군의 10만 병력이 공산당의 근거지에 대한 공격에 돌입하여 이후 20여 년간 계속된 국공내전의 서막이 오르게 되었다. 
국부군에 대항하여 소비에트 사수에 나선 홍군의 병력은 채 5만이 안 되었다. 그러나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홍군은 게릴라 전법으로 토벌군을 깊숙히 유인하여 각개 격파 시켜 나갔다. 전력상의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전황이 좀처럼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장개석은 자신이 직접 나서 국부군 30만 대군을 이끌고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국부군과 홍군의 격전이 날이 갈수록 치열해 가고 있던 즈음, 모택동이 말라리아에 걸려 병석에 눕게 되자 공산당 내부에서는 그 동안 모택동의 게릴라식 전술이 소극적 도주로 일관한 패배주의로 규정하고 혹독히 비판하여 모택동의 군사적 지휘권을 박탈하는 한편, 이 때까지 채택해온 유격전을 버리고 국부군에 맞서 전면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은 근거지 안으로 깊숙이 적을 유인하여 유리한 지형에서 산발적인 공격으로 적의 기운을 뺏고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지친 적을 섬멸하는 종래의 작전에서, 근거지 밖에서 직접 적과 당당히 맞서 공격해 들어오는 적을 적극 저지한다는 성격의 작전으로 변화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술의 채택에 따른, 압도적인 양적 우위에 있는 국부군과의 전면전의 결과는 뻔하였다. 
장개석이 지휘하던 국부군의 전술도 크게 변화하였다. 압도적인 수적 우위로 무차별적으로 밀어 부치던 종래의 전술이 번번이 실패하자, 소비에트 주변에 수 십 만개의 토치카를 설치하고 군용도로를 개설하여 토치카와 연결하는 이른바 철의 포위망을 구축하여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는 전술을 채택한 것이다. 이 작전에는 1백만의 병력과 비행기, 전차까지 동원되어 기존의 작전과는 양적으로는 물론이고 질적으로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장개석은 소비에트에 대한 경제적 봉쇄도 아울러 단행하여, 외부세계와 고립된 해방구내에서는 군수물품은 물론 식량사정 까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갔고 전황도 점점 불리해져 갔다. 

국부군의 총공세에 마침내 수도 서금의 관문인 광창(廣昌)이 함락되었고 홍군은 수도를 사수하기 위해 밤낮 3일간의 사투를 벌였으나 그마저 허사로 끝나버리고, 중화소비에트의 거점인 서금의 함락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헌신적이고 용맹스러운 홍군 전사들의 놀라운 전과에도 불구하고, 국부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의 우위에 밀려 소비에트의 수도인 서금에 대한 포위망이 점차 좁혀져 들어오자 당 중앙은 중대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근거지를 버리고 포위망을 탈출하기로 하는 결정이 내려졌고, 10만의 홍군은 쓸쓸히 부는 가을바람을 헤치며 황량한 강서의 들판을 떠나 대장정(大長征)의 길에 올랐다. 

대장정의 길은 절망과 희망, 갈등과 동지애가 뒤얽힌 한편의 비장한 드라마였다. 병에서 완쾌된 모택동은 다시 당과 군에 대한 지도권을 회복하고 대장정을 선두 지휘하였다. 
강서를 탈출하는데 일단 성공한 장정군은, 유지단(劉志丹)이 건설해 놓은 섬서의 소비에트에서 다시 합류하기로 결정하고 북상에 들어갔다. 장개석은 홍군이 사천으로 들어갈 것을 예상하고 그 곳에서 홍군을 일망타진하기로 작정하고 대군을 매복시켜 놓았다. 하지만 이러한 장개석의 수를 미리 꿰뚫어 본 모택동은 특유의 성동격서(聲東擊西)식 게릴라 전법으로 국부군을 교란시키며, 사천에서 감숙으로 바로 가는 길 대신 운남을 거쳐 서강으로 향하는 길을 선택하여 중국 서남쪽을 크게 원을 그리며 조금씩 북상하여 들어갔다. 

홍군은 국부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하여 평탄한 길을 버리고 험난한 길로만 행군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희생자와 낙오자도 속출하였다. 양자강의 상류인 산악지대의 급류지역인 대도하(大渡河)에 이르렀을 때 국부군의 추격은 목전까지 도달해 있었던데다 배도 작고 수도 많지 않아 결국 도강을 포기하고, 상류에 있던 노정교(爐定橋)를 임표가 이끌던 결사대들이 국부군이 퍼부어 대는 기관총 세례를 무릅쓰고 간신히 장악하여 겨우 건너는데 성공하여 전멸 직전에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대도하를 건넌 홍군의 앞길에는 티베트로 향하는 해발 4천 미터의 대설산(大雪山)이 다시 가로 막혀 있었고, 홍군의 전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쓰러져 가는 동지들의 시신을 밟고 은백색의 설원을 넘어 갔다. 다시 광활한 늪지대로 변한 사천의 대초원을 10여일 간의 사투 끝에 가까스로 건넌 장정군은 마침내 섬서의 연안에 도착하여 대장정의 완료를 선언하게 되었다. 

대장정의 길은 실로 멀고도 험난하였다. 곳곳에서 끈질기게 따라 붙는 국부군의 추격을 물리치고, 열여덟 개의 산맥을 넘고 열일곱 개의 강을 건너, 강서를 떠난 지 2년만에 마침내 목적했던 연안에 도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이 새로이 근거지를 마련한 연안은 섬강녕변구의 중심지로 산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도자기 굽는 마을이었다. 대장정을 끝낸 모택동과 공산당은 진용을 재정비하면서 재기의 길을 본격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20여 년간에 걸친 국공내전의 양상은 유럽에서의 대전이 발발되면서 점차 달라지고 있었다. 그 동안 미국과 영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지원을 받아오던 국부군은 유럽과 동남아에서의 전쟁의 여파로 지원이 급격히 약화되자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나갔고, 그 동안 국부군의 압도적 물량공세로 열세를 보이던 인민해방군은 농촌을 거점으로 주요 도시를 포위하는 전술이 주효하여 수세에서 공세로 극적인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국민당 정부의 고위 관료와 국부군의 장성들의 부정부패는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만연되어 있었고, 오직 미국의 원조로 군사력의 증강에만 치중해온 경제상황은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고 결국 민심은 공산당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미국의 원조로 그나마 지탱해온 국부군의 사기는 군장성들의 부패와 무능으로 점차 시들어갔고, 군사력도 현저히 약화되어 갔다. 낮에 항구에 들어온 미국제 무기와 군수품은 장군들에 의해, 밤에 값비싼 요정에서 
만난 상인들에게 헐값으로 넘어갔으며, 이 무기와 장비들은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공산군에게로 흘러 들어갈 정도였다. 
2차 대전 종전 당시 양측의 세력관계를 비교해 보면, 국부군의 병력은 430만에 달해 있었고 주요 도시들을 장악하고 있었던 반면 인민해방군은 정규군인 팔로군과 신사군이 128만 정도에 불과했으며 변방의 농촌을 중심으로 전체 중국 인구의 2할 정도인 1억 명 정도가 그 영향력 아래 있었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일단락 되자 대한제국의 적극적인 중재로 양측은 통일을 위한 협상 테이블로 나왔으나,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두려워한 미국의 부추김과 권력독점을 고집하는 장개석의 야욕으로 결국 협상은 결렬되고 다시 치열한 내전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장교들의 부패가 만연한 상태에서 장병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민심의 이반으로 전의를 상실한 국부군은, 인민해방군이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하여 주요도시를 공격해 들어가자 변변한 반격도 해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도주를 거듭했다. 
패전에 직면한 장개석은 대만으로 철수할 것을 결심하고 대한제국 정부에 협조를 구하고 나섰다. 대만은 지난 1905년 청제국 당시 전쟁으로 대한제국군에 의해 점령된 이후 원주민인 고산족을 중심으로 자치 정부를 구성하여 대한제국 연방의 일원으로 지내 오고 있었다. 

중국에서의 전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대한제국의 여운형 총리는 모택동과 장개석 양인에게 더 이상의 동족끼리의 희생은 무의미하다고 설득하고 전쟁의 평화적인 마무리를 촉구하고 나섰다. 먼저 장개석과 국민당 지도부에 대한 안전한 망명을 허용하고, 공산당에게는 항복한 국부군의 신변을 보장해 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대만으로의 탈출도 허용하기로 결정하여 비무장 상태에서 개인적으로 피난을 허락해 주기로 하였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장개석은 단신으로 일본으로 망명하고, 국부군 패잔병들은 상해에서 대한제국군에 의해 무장을 해제 당한 채 대만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인민해방군은 마침내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남경을 점령하여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 대륙 전토를 다시 통일하고, 1949년 10월 1일 북경을 수도로 정하고 모택동을 국가 주석으로 하는중화인민 공화국(中華人民 共和國)을 수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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