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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대한제국200년사-(18)3월혁명과 국공내전
게시물ID : history_48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2013년체제
추천 : 13
조회수 : 92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06/23 22:03:18
1차 세계대전의 종결 이후 불어닥친 민족자결주의의 물결이 동아시아에도 급격히 몰려와, 청왕조의 몰락과 중화민주공화국의 수립, 러시아 제정의 몰락과 사회주의 소비에트 정권의 성립 등에 따른 급격한 정세변화와 맞물려, 일본과 중국, 만주와 몽고 등 대한제국의 식민지에서도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해방투쟁의 바람이 서서히 불기 시작하였다. 
본토에서도 러시아혁명에 고무된 사회주의자 그룹은 고질적인 분열에서 탈피해 단일한 유일당 건설에 매진하였고, 페테로그라드의 소비에트정권에 은밀히 밀사를 파견하는 한편 식민지의 민족해방운동가들과도 연대를 모색해 활동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제국당 내각이 무리하게 러시아를 침공하자 모든 사회주의 세력은 전쟁을 반대하는 총파업투쟁을 선동하고 나섰고, 여기에 조선대에서 촉발된 총동맹휴업이 성균관대와 고려대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대학으로 빠른 속도로 파급되어 나가자 정부는 경찰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에 나섰다. 
학교를 점거하고 농성 중이던 조선대생을 강제해산 시키는 과정에서,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조선대생 1명이 사망하고 이를 말리던 신채호 총장 등 교수, 학생 수백 명이 부상당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되어 나갔다. 조선대의 신채호 총장과 성균관대의 김창숙 총장, 고려대의 주시경 총장 등은, 전국의 교수 1천인의 반전, 반정부 선언을 주도하여 지식인들의 참여 촉구에 나서 사회전반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에 관망하고 있던 야당인 사회민주당도 이완용 총리의 탄핵결의안을 제출하는 등 대정부 투쟁에 적극 동참하고 나섰다. 안창호 사회민주당 총재, 이동휘 고려공산당 서기장, 신채호 조선대 총장 등 반전 평화운동의 지도자들은 효과적인 반정부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한 범인민운동본부'를 구성하여 조직적인 활동에 착수하게 되었다. 범인민운동본부에는 정치권뿐 아니라 사회운동단체 대표 이상재, 언론계의 장지연 황성신문 사장, 보건의료계의 지석영, 문화예술계의 최남선, 종교계 대표로 천도교의 손병희, 대종교의 나 철, 불교의 한용운, 기독교의 조만식 등 각계의 지도자 33인으로 공동대표를 구성하여 그 위력을 과시하였다. 

해가 바뀌어 고종이 재위 44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자 명성황후의 사이에 태어난 이 척(순종)이 황위를 승계 하게 되었다. 고종의 승하로 잠시 주춤했던 범인민운동본부는 고종의 장례식인 3월 1일을 종전을 촉구하는 총궐기의 날로 정하고 장례식날 광화문에 10만 인파를 결집시켜 대규모 반정부 집회를 주도하고 시위를 벌여 나갔다. 이 날 이후 시위는 더욱 격화되어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위기를 느낀 이완용 내각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진압 채비를 서두르나 대한제국군 총사령관인 김좌진 장군은 홍경래 장군 이래 제국군의 불문율이던 정치적 중립의 전통을 이유로 군대동원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갓 즉위한 순종도 내각과 군대에 교시를 내려 자제를 당부하고 반정부 지도자들과도 만나 시국 수습을 당부하기에 이르렀다. 

범인민운동본부가 주도하고 있던 반정부투쟁이 절정에 달하고 있던 3월 말 철늦은 진눈깨비가 어지러이 날리던 흐린 날에, 이완용 총리는 군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태릉에 있던 육군 사관학교 졸업식에 참가하여 치사를 낭독하기 위해 연단에 올랐다. 나란히 참석한 김좌진 총사령관과의 어색한 조우로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잇던 이완용은 연단에 오르자 마자 의례적인 치사는 생략한 채, 전쟁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작금의 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군대의 동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거품을 물고 흥분하였다. 이때 갑자기 대열에서 생도 두 명이 뛰어 나오며 적막하던 교정에 연거푸 총성이 울려 터져 나왔다. 
이완용 총리가 육사 졸업식장에서 전명운, 장인환 두 명의 좌익 육사생도에 의해 암살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정국은 극심한 혼미에 빠져들었고, 결국 인민대중의 광범위한 저항에 굴복한 제국당 내각은 붕괴되어 임시혁명정부가 수립되고 사회민주당 총재인 안창호가 새로운 정부의 수반에 오르게 되었다. (1919년) 

임시혁명정부는 먼저 고려공산당 청년위원장을 맡고 있던 여운형을 특사로 페테로그라드에 보내, 레닌을 만나 러시아 침공에 사과하고 시베리아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통보하였다. 그리고 소비에트 정권을 세계 최초로 정식 국가로 승인하고 외교관계 수립에 착수하였다. 한노전쟁 이후 제정 러시아와 체결된 런던조약을 근거로 한노국경을 아무르강으로 확정하는 한편 외몽고에서의 어떠한 기득권도 상호 인정하지 않는다는 확약을 맺었다. 또 대한제국은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규모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약속하고 대신 시베리아의 목재 채취권과 광산개발권 등을 독점 계약하여 러시아의 경제개발을 원조하기로 하였다. 
또 임시혁명정부는 은퇴한 전 총리 김옥균을 특사로 남경으로 보내. 손문을 만나 북경을 포함한 황하 이북에서 아직 주둔하고 있던 대한제국군을 만리장성 이북으로 완전 철수키로 통보하고 한중 상호 우호 관계를 재 다짐하였다. 

임시혁명정부는 민족해방의 물결이 꿈틀대던 일본과 만주에 각각 자치를 수락하기로 결정하고 대한제국의 헌정질서 아래 정부와 의회를 구성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천황의 손자인 히로히토(裕仁)를 왕으로 옹립하고, 만주에서는 퇴위된 청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溥儀)를 왕으로 추대하여 각각 내각책임제를 정체로 하는 자치정부를 수립하게 하였다. 
또 임시혁명정부는 25세 이상의 모든 남자와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여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고, 의회 임기를 5년으로 줄이는 정치개혁을 단행하였다. 여성의 참정권이 본격적으로 거론되자 유림들이 극력 반대하고 나섰으나, 유관순, 김마리아 등 이화여대생들을 중심으로 여성들의 참정권 허용 촉구운동이 연일 강력히 전개되어 한정적인 참정권 허용으로 의견을 모으게 되었다. 
이완용 집권 후 만들어졌던 보안조례도 폐지하여 사회주의 활동을 자유롭게 허용하고 언론, 출판, 집회,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확대하는 한편, 주당 노동시간을 44시간으로 하는 등 일련의 사회개혁도 아울러 실시하였다. 

헌법의 개정으로 전체 유권자가 500만에서 1500만으로 비약적으로 늘어난 조건에서 치러진 제국의회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이 과반수를 훨씬 상회하는 압승을 거둬 임시정부 수반인 안창호를 총리로 하는 새로운 내각이 들어섰다. 
고려공산당도 합법화되어, 코민테른과의 관계를 중요시 해온 이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노장 정통세력과 독자적인 모색을 추구하던 여운형이 이끌던 신진 수정주의 그룹과의 고질적인 분열을 극복하고, '대한노동자 혁명동맹 ' 등 노동자 조직의 적극적인 지지로 의회 진출에 마침내 성공하게 되었다. 
총선에서 참패한 제국당은, 그 동안 황실의 외척으로 전횡을 자행해 오던 민영익 등 강경파가 대거 축출되고 온건파였던 민영환의 주도로 당명을 보수당으로 개정하였다. (1920년) 

순종이 재위 7년만에 52세의 나이로 슬하에 자녀 없이 승하하고, 황위는 고종의 후궁이었던 귀빈 엄씨 소생인 29살의 이 은에게 물려져, 영종으로 즉위하였다. (1926년) 

1차 세계대전의 종결로 유럽에선 독일과 오스트리아제국이 해체되어 방해자를 제거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대전 후 위상이 한층 높아진 미국은 다시금 노골적으로 식민지 경략의 고삐를 잡고 나섰다. 오토만투르크제국의 몰락으로 무주공산이 된 아랍세계는 영, 불의 새로운 각축장이 되어 버렸고 미국은 호시탐탐 중국과 태평양 진출을 획책하고 나섰다. 

구미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전쟁과 제정 러시아에 충성하는 구 귀족들과 장성들의 반혁명전쟁에서 가까스로 승리한 소비에트 러시아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매진하였다. 러시아 혁명의 영웅 레닌은 지난 번 암살을 당할 뻔했을 당시 입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정력적으로 일에 몰두하였으나,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어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영웅적인 삶을 마감하고 55세의 아까운 나이로 서거하고 말았다. 
러시아 인민들은 자신들을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시켜준 위대한 지도자이자 사랑하는 동지의 죽음을 믿지 못한 채 비통한 슬픔에 잠기었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영원히 안치된 레닌의 유해는 유리관에 넣어져 전 세계에서 그의 서거를 애도하기 위해 찾아온 방문객들을 맞았다. 페트로그라드는 레닌그라드로 개칭되었고 러시아 인민뿐 아니라 전 세계의 진보적 인민들은 그의 헌신적인 삶을 자신들의 가슴에 고이 묻었다. (1924년)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도자 레닌이 죽자 공산당은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에 돌입하였고, 최후의 승리자 스탈린은 집권하자 마자 비밀경찰을 조직하여 피의 숙청을 단행하고 자신의 일인 독재체제를 확립하는데 성공하였다. 
반혁명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의 볼셰비키들은 전세계 사회주의자들과의 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제 3인터내셔널을 결성하였다. 이후 이 조직은 코민테른(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으로 불리며 전 세계에 사회주의 혁명의 전파를 위해 발벗고 나섰다. 코민테른은 이러한 결성 초기의 취지와 명분에도 불구하고 향후 러시아의 일국적 이해를 위해 서서히 변질되어 갔고, 각 나라의 특색과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 교조적 운영으로 오히려 전 세계 혁명의 걸림돌로 작용하게 되었다. 

대한제국군의 철수로 마침내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대륙을 완전히 통일한 중화민주공화국은 국가의 통합에 진력하고 나서나 여전히 지방에는 군벌들의 무장력이 건재한 상태로 중앙정부의 권위가 채 미치지 못하였다. 대한제국군으로부터 북경을 넘겨받은 남경의 공화국 정부가 중화혁명군을 앞세우고 북경 시내로 진입하자 수십만의 북경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하며 열렬히 환영하였다. 

공화국 정부가 북경으로 진입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문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어 마침내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수술까지 받게 되었다. 개복을 해보니 간에서 발생한 암세포가 이미 온 장기에 퍼져 있던 상태라, 결국 건국의 아버지인 손문은 쾌유를 비는 수 억 중국 인민들의 절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59세를 일기로 열정적인 생을 마감하고 영면하고 말았다. 손문의 유체는 영구 보존을 위해 방부조치가 취해졌고 공화국 정부는 국장을 제의했으나 미망인 송경령 등 유족과 국민당은 모든 인민이 평등하다는 고인의 사상을 존중하여 정중히 거절하였다. 손문의 시신은 평생 생사를 같이 하던 혁명 동지들에 의해 운구되어 중앙공원의 제단으로 옮겨졌다. 손문의 영구가 운구되던 연도에는 20만의 추도 군중들이 운집하여 고인의 명복을 빌고 눈물로 배웅하였다. (1925년) 

공화국 정부의 지도자 손문이 죽자 구심점을 잃어버린 국민당 정부는 좌우파의 극심한 대립으로 급격히 분열양상을 보이며 또 다른 파국으로 치달았다. 황포군관학교 교장으로 있으며 북벌을 지휘했던 장개석(張介石)이 군의 요직에 포진하고 있던 군관학교 졸업생들을 자신의 주요 지지기반으로 삼아 군 최고 지도자인 혁명군 총감으로 승진되어 군권을 장악하고 국민당 정부의 새로운 실력자로 떠올랐다. 
당시 국민당 정부는 주로 좌파에 의해 주도되어 나갔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구미열강과 서안을 배경으로 하는 군벌들, 상해를 기반으로 하는 금융자본가들은 연합하여, 장개석의 부상을 기회로 그에게 권력을 잡게 해 줄 테니 공산당과 결별하라고 부추겼다. 이들의 부추김에 고무되어 권력에 눈이 멀게된 장개석은 상해에서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혁명전쟁의 동지였던 공산주의자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일단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좌우 합작으로 이루어졌던 국민당 정부는 와해되었고 손문의 미망인 송경령은 장개석과 우파들을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송경령은 성명에서 "손중산의 정책은 지극히 명백하다. 만약 당내의 지도자가 그 정책을 관철할 수 없다면 그들은 손중산의 진정한 추종자들일 수가 없으며 당 또한 이미 혁명의 당이라고 할 수 없고 단지 이러 저러한 군벌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당은 민중을 압박하는 하나의 기계, 일종의 도구로 변하여 현재의 노에를 이용해서 스스로를 살찌우는 한 마리 기생충이 될 것이다. 우리는 중대한 위기에 접어들었다. 혁명이란 중국에서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밝혀 장개석 일당들을 손문의 혁명사상을 배신한 배반자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 20여 년에 걸쳐 전 중국 인민의 엄청난 희생으로 어렵게 성취하였던 혁명의 기운은 장개석 개인의 사욕으로 더렵혀졌으며 인민의 권력은 장개석 한 사람의의 수중으로 굴러 들어갔다. 국민당 정부에 참여했던 공산당원들도 지하로 잠적해 들어갔다. 
결국 혁명의 어머니로 중국 인민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던 송경령은 자신이 해방시킨 조국을 떠나 소련으로 망명하게 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송경령은 쓸쓸한 망명지에서 그의 동생 송미령이 장개석과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로써 송씨 가문의 세 자매는, 한 사람은 재벌과 결혼하여 돈을, 한 사람은 혁명가와 결혼하여 명예를, 한 사람은 독재자와 결혼하여 권력을 잡으며 중국 근대사의 한 부분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러시아와 중국에서 낡은 제정을 타도하고 혁명을 이룩했던 두 영웅 레닌과 손문이 아직도 많은 일을 할 수 있던 아까운 나이에 한 해 간격으로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혁명의 본질은 서서히 훼손되어 갔다. 급기야는 스탈린과 장개석이라는 희대의 독재자들이 나타나 인민과 혁명으로부터 권력을 탈취하여 전제군주 이상의 잔혹한 폭압정치를 행사하였고, 이들은 개인의 권력욕에 도취되어, 사라져간 거인들의 위대한 치적을 물거품으로 만들며 잠든 고인들의 명예와 영혼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이러한 후임자들의 폭정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영웅의 타계를 더욱 더 아쉽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국민당 정부에서 쫓겨나 도시를 탈출한 공산당은 강서성의 성도인 남창을 잠시 점령하였으나 국민당군의 즉각적인 반격으로 패퇴하여 강서성과 호남성의 경계에 위치한 험난한 정강산(井崗山)으로 근거지를 옮겨갔다. 
모택동(毛澤東)의 지도하에 새로이 구성된 공산당 지도부는, 도시에서의 노동자들의 봉기 방식을 고집해 온 기존의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버리고 농민들을 중국 혁명의 주력으로 설정하는 반제 반봉건 혁명(反帝 反封建 革命)의 노선을 채택하고 본격적인 장기항전 태세에 돌입하였다. 
모택동은 혁명의 주력부대인 홍군(紅軍)의 건설에 주력하여 중국 공산당의 독자적인 최초의 부대인 노동혁명군을 조직하고 이 부대를 '노동 혁명 제1군 제1사단 제1연대'라 지칭했다. 이후 주덕이 지휘하던 국민당군의 일부가 정강산으로 합류하여 홍군의 병력은 도합 5만 명 3개 사단 병력으로 불어났다. 공산당은 충격에서 벗어나 차츰 체제를 정비하여 모택동이 당 대표를 맡고 주덕이 군 총사령관을 맡아 재편을 완비하였다. 
이로써 중국대륙은 왕당파와 공화파의 지루한 혁명전쟁이 끝나자 마자, 다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치열한 국공내전(國共內戰)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중국이 다시 내전상태로 돌입하자 대한제국의 보수당과 재벌들은 국민당을, 고려공산당은 중국공산당을 각각 지원하고 나섰고, 장개석의 끈질긴 지원 호소에도 불구하고 집권 사회민주당은 좌 . 우파의 분열로 일치된 당론을 정하지 못하고 사태를 예의 주시하며 지켜 볼 따름이었다. 

3월 혁명 이후 대한제국은 구미열강의 가혹한 식민지배에 신음하던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해방자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고, 식민지의 혁명가와 민족주의자들의 망명처로 제공되었다. 
또 많은 아시아의 애국적 청년들이 영국과 프랑스 등 식민지 모국 대신 조선대 등 대한제국으로 유학을 건너 와 선진 문물을 익히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민주주의와 민족해방의 기운을 한껏 고취하게 되었다. 
베트남의 호치민(胡志明), 캄보디아의 왕족 시아누크(Norodom Sianuouk), 버마의 아웅 산(Aung San),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Sukarno), 필리핀의 케손(Quezon) 등 조선대에서 유학 생활을 한 아시아 각국의 젊은 혁명가들은 자신들의 조국으로 돌아가 식민 종주국과의 민족해방투쟁에 정열적으로 나섰다. 

대한제국의 국가정보부장에 취임한 김구는 이들 유학생들을 매개로 은밀히 아시아 각국의 혁명세력들과 접촉해서 아시아 민족해방전선(Asia National Liberation Front)을 결성하였다. 
김구는 제주도에 비밀리에 유격훈련장을 설치하고 각국의 청년들을 모아 게릴라전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자금과 무기를 조달하여 이들에게 제공하고 청년장교 윤봉길로 하여금 연락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구미열강들이 금융자본주의 자체의 구조적인 모순으로 말미암아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에 따른 자체 한계에 다다라 극심한 공황상태에 빠져들자 식민지에서의 수탈은 더욱 가혹하게 강도가 높아 갔고, 그 반대로 식민지 인민들의 투쟁의지는 날로 불타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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