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담배인삼공사가 회사명을 KT&G로 바꾼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담배와 인삼이라는 취급 품목을 명시하고 있던 과거의 명칭을 K(orea) T(obacco) & G(inseng)이라는 이니셜로 압축한 KT&G의 아이덴티티 작업은 과거 전매청에서부터 이어져오던 관료적인 이미지를 민영화까지 대비한 전혀 새로운 컨셉으로 변모시켰기 때문에, 새로운 회사명과 이것이 지향하는 이미지를 소비자에게 소통시키기 위한 광범위한 캠페인 작업이 필요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상상예찬'을 테마로 하는 일련의 KT&G PR 광고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음을 눈치채게 되었습니다. KT&G 하면 '상상예찬'이라는 슬로건이 떠오르고, 무엇보다도 천만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끽연자들이 바뀐 회사 이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런 문제 없이 담배를 구입하고 있음도 불구하고, 소위 '상상예찬'이라는 KT&G의 PR 광고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 거죠. '혹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냐' 싶어 의심의 눈동자를 굴리고 있던 찰나에 현재 방송중인 다소 난해하다 싶은 KT&G의 PR이 눈에 들어왔고, 저는 거기서 제가 미심쩍어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차렸습니다.
자, 그럼 KT&G PR의 각 장면을 차근차근 훑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번거롭더라도 다음에 보여드리는 이미지를 참조하여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생각해본 것은 괄호 안에 적겠습니다.
1. 연기가 자욱한, 얼핏 봐서는 아스팔트 더미같은 지면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연기가 나타내는 바는 무엇일까요?)
2. 줌인을 해 보니 교복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남자이군요. 상반신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을 가방끈으로 볼 때, 학생이라는 심증이 더욱 강해집니다.
(KT&G의 과거 PR 작업에서는 20대 정도의 캐릭터들이 등장했었는데, 이번 광고는 다소 예외입니다. 10대 후반으로 설정한 듯한 남녀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죠. KT&G의 주된 상품이 공식적으로는 성인에게만 허용되어 있는 담배라는 점에서 비추어 볼때 이는 더욱 예외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설정이고, 따라서 그 배경에 대한 의혹도 더욱 커집니다.)
3. 이 '학생'은 앞에 서 있는 뭔가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바로 창문가에 서 있는 여자였습니다. 여자는 창에 대고 뭔가를 말하고 있군요.
(이제까지의 화면이 광고의 배경을 설정하는 작업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광고의 구체적인 메시지를 제시하는 단계로 진입합니다. 그런데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군요. 혹시 포레스트 검프를 보신 분이라면, 워싱턴에서 벌어진 반전집회에서 검프가 뭐라고 연설을 하는데, 마이크가 꺼져서 그 내용이 전달되지 않는 장면을 아실 겁니다. 그 장면이 연상되는군요. 시청자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대목입니다.)
4. 친절하게도 남자가 생각하고 있는 바가 내레이션으로 곁들여집니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광고는 이제 '시청자들은 이런 궁금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명시해서 지적합니다.)
5. 이제 화면은 여자의 눈으로 클로즈업되는데, 눈에서는 아이콘을 연상하게 하는 그래픽 기호가 몇 개 표시됩니다.
(창가에 있는 여자의 눈동자 속에는 어떤 메시지가 있습니다. 눈동자는 사람의 얼굴 중에서도 시선이 가장 많이 집중되는 부분이죠. 그런데 그 눈동자에서 보여주는 메시지도 무엇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기호 해석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모를까요. 말하고 싶지만 명시적으로 전달하고 싶지는 않은, 그러면서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그 메시지는 KT&G가 전하려고 하는 그 무엇과 일치하는 것이겠죠. 여자의 눈은 고양이의 그것처럼 세로로 찢어져 있는데, 고양이 눈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해석해 주실 분?)
6. 이제 다시 남자의 모습으로 화면이 전환하면서 PR의 메인 카피가 캡션과 내레이션으로 제시됩니다.
"당신의 상상이 필요합니다"
(광고는 이제 탁 까놓고 '당신이 상상하십시오, 이 광고가 말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 하고 선언합니다. 남자의 머리 주위에는 연기가 선연합니다. 그렇군요, 이것은 담배 회사의 광고이고, 시청자는 담배를 떠올려야 한다는 점이 확실해지는 순간입니다.)
7. 화면은 다시 여자로 전환되는데, 여자는 창틀에 앉아있고 그 앞에서는 알 수 없는 김 내지는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이제는 이러한 가설이 맞는지 확인하게 되는 단계입니다. 실내에서는 바깥의 것과 유사한 '김'이 피어오르는군요. 실내 환경에서 대놓고 연기를 표현할 수는 없으니(담배연기 아니면 화재 둘 가운데 하나인데다 여자의 방) 주전자에서 피어오르는 김으로 다소 완곡하게 보여줬겠죠. 어쨌든 바깥의 환경과 유사한 연기가 피어오른다는 점을 보면 이 연기는 PR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요소임이 분명해지는 순간입니다.)
8. 여자는 창에서 한 두 발짝 물러나 서고, 다음의 내레이션과 함께 광고가 끝납니다.
"상상예찬"
"KT&G"
(여자가 창가에서 물러나는 행위는 유혹의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한발짝 물러났으니 당신이 그만큼 들어오시라'는 것이죠. PR이 함축하고 있는 메시지들이 다 풀린 상태에서, 이것이 담배 광고임을 인식했다면 이제 행동하라, 즉 담배를 구입하라는 언사입니다. '상상예찬'이라는 슬로건도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겠죠. ''담배'라는 상상이 가져오는 즐거움을 예찬하라'정도일까요?)
KT&G가 PR 캠페인을 연장하면서 이런 광고를 내보내는 이유는 당연합니다. 담배 광고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PR을 우산삼아 무의식적인 수준의 담배 광고를 하는 것이죠. 무의식에 호소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광고를 subliminal advertising이라고 하는데요, KT&G는 지나치게 은유적인 접근법으로 인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인 '담배'가 인지되지 못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캡션과 내레이션이라는 장치를 통하여 이 PR이 담배에 대한 광고임을 주지시키고, 이것을 담배 광고로 상상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세련되고 교묘한 커뮤니케이션 방법입니다.
담배 광고로 의심되는 PR을 집행한 행위도 온당한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만, 그 소구 대상이 학생층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은 더욱 큰 문제입니다. 담배가 건강에 끼치는 해악이 도처에서 증명되고 있고, 특히나 청소년층의 흡연은 장래의 건강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각국이 이에 대한 규제책을 마련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까지 공기업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KT&G가 PR 광고의 맹점을 이용하여 청소년을 소구 대상으로 하는 담배 광고를 버젓히 집행하고 있는 점은 비난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한편으로 걱정되는 점이 있습니다. KT&G는 이미 상당 기간 PR 광고를 집행해 왔지만 이번 건의 경우에는 그 메시지가 상당한 명시성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광고의 분석이 가능했지, 이전의 광고가 가지고 있었던 메시지까지 돌이켜 분석할 수 없었다는 사실때문입니다. 어차피 그 캠페인은 이미 종료됐고 그것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지는 이미 소화된 상태이기도 하구요. 또한 이런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시도될 것이라는 점에서 시청자이자 소비자인 여러분의 냉철하고 분석적인 시각이 필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