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에 저물어 가는 노쇠한 청제국의 나락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권력을 잡은 서태후(西太后)와 측근들은 위기에 빠진 나라의 현실은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보신만을 위해, 밀려드는 구미 열강의 외침에 오로지 굴욕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안으로는 나라의 개혁을 요구하는 외침에 철저한 탄압으로 일관했다.
누란의 위기에 빠진 조국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대한제국처럼, 부패한 왕조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헌법과 의회를 만들어 하루 빨리 정치개혁에 나서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진 변법자강운동(變法自疆運動)의 움직임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강유위(康有爲)였다.
강유위는 서태후를 악의 근원지로 보고 광서제(光緖帝)의 친정을 통해 정치적 개혁을 이루고자 부국 강병을 위한 정책이 담긴 상소를 끈질기게 올려 조야에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 때 광서제는 이미 성년이 되었으나 정치적 실권은 여전히 서태후에게 독점되어 있는 상태로 좀처럼 자신이 친정을 펴게 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자, 광서제는 서태후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고 자신의 친정을 달성하기 위해 변법을 단행하기로 작정하고 강유위를 전격적으로 조정대신으로 기용하였다.
변법파들이 정치전면에 나서며 여론도 그들 쪽으로 기울자 서태후 등 보수파들은 이들의 동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고 양측의 대결은 일촉즉발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강유위 등 변법파들은 조정을 독차지하고 있는 보수파들의 노골적인 견제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전격적으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서태후 일파를 제거해 버리고 권력을 장악하기로 작정하게 되었다.
쿠데타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무장병력의 확보가 절실하였던 터라 변볍파는 당시 창설된 신식 육군의 우두머리인 원세개(遠世凱)를 쿠데타에 끌어들이기로 하고 담사동(潭嗣同)으로 하여금 담판을 짓게 하였다. 원세개는 당대의 최고 실력자였던 이홍장(李鴻章)의 양자로 보수파의 핵심인물 중 한 사람이었으니 이러한 계획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스러운 일인가는 변법파 스스로 잘 알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나날이 조여 들어오는 보수파의 반격에 개혁은 커녕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고 있던 절박한 상황이었던 터라 이것저것 신중히 헤아릴 처지가 못되었고, 또 담사동의 이러한 제안에 강유위는 원세개가 오랫동안 대한제국의 대사로 나가 있으면서 세계 정세에 대한 이해가 깊고 선진 문물에 밝은 터라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제안이 변법파 내부에서 최종적으로 승인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원세개는 누구보다도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한 야심에 찬 인물이었으며 무엇보다 권력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관해 뛰어난 동물적인 감각을 소유하고 있던 자로 변법파의 이러한 우국충정의 발로에 기인한 제안은 자신의 거취를 결정짓는데 참고사항쯤으로도 여기지 않는 철저한 기회주의적 인물이었다.
담사동이 찾아와 서태후와 당시 청 조정의 최고 실력자이던 직례총독 영록(榮祿)을 폐하고 황제의 친정체제를 구축하는데 앞장서 줄 것을 요구하자 원세개는 일단 건성으로 동조할 뜻을 내비쳤다. 담사동이 돌아간 후에 여러 가지 이해 득실을 따진 끝에 자신이 이 시점에서 목숨을 걸고 군사를 일으켜 봤자 권력은 강유위 등 변법파들이 차지하고 자신의 실익이 별로 없다고 판단하게 되고 더구나 지금 노쇠한 서태후나 이홍장 등 보수파들이 은퇴하게 되면 권력이 저절로 자신의 수중에 굴러 들어올 것이라는데 까지 생각이 미친 원세개는 그 길로 직례총독 영록에게 달려가 변볍파들의 쿠데타 기도를 밀고해 버렸고 이 소리를 들은 보수파들은 변법파들의 대대적인 색출에 나서게 되었다.
보고를 받은 서태후는 자신이 거처하고 있던 이화원에서 자금성(紫禁城)으로 급히 돌아가 광서제를 추궁하고 유폐시켜 버린 후 자신이 섭정을 맡아 다시금 권력을 장악하였다. 보수파들의 반격으로 변법파들은 하루아침에 쫓기는 신세로 전락하여 강유위는 대한제국 대사관으로 피신하여 몰래 변장을 한 채 북경을 빠져 나와 대고항에 정박해 있던 대한제국의 상선을 타고 서울로 망명하게 되나, 담사동은 망명을 거부하고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권력을 다시 장악한 서태후는 이번 쿠데타 기도에 대한제국의 정보기관이 개입되어 있다는 첩보를 감지하고 자신을 제거하려 한 대한제국에 대해 엄청난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 서태후는 러시아 공사를 자신의 처소로 은밀히 불러 만주를 러시아에게 할양해 줄 테니 대한제국을 몰아내 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서태후의 이러한 은밀하고도 엄청난 제의에 접한 러시아 공사는 즉각 크레믈린궁으로 밀사를 파견하여 니콜라이 2세(Nicholas Ⅱ)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서양에서는 유럽 각국의 민족주의 물결에 막혀 점차 고립되어 가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투르크와의 분쟁으로 더 이상의 진출이 막혀 있던 터라 마침 동양으로 눈을 돌려 만주 일대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차였다. 특히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위해 대한제국이 차지하고 있던 우수리강 동쪽 연해주 일대의 보독(保獨, 현 블라디보스톡)에 부동항을 건설할 야심에 이 지역에 대한 집착을 더욱 강하게 했다.
러시아는 서태후의 요청을 근거로 1845년 한청전쟁 이후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대한제국에게 국경 조정문제를 제기하고 나섰고, 아예 중국의 주권을 존중한다는 구실로 만주에서 대한제국군의 무조건적인 철수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이 같은 도발은 대한제국과의 전면전을 불사하여 만주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강온 양면전술의 구사에 따른 협상의 부산물로 우수리강 동쪽에 대한 대한제국의 양보를 꾀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러시아의 이러한 공세에 즉각적으로 국교 관계를 단절하고 대화자체를 거부하는 한편 러시아의 도발을 강력히 응징하기로 결정하고 전인민 총동원령을 발동하여 전쟁준비 착수에 돌입하였다. 또 영국도 러시아의 남진과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대한제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강력한 공조체제를 구축하였다. 러시아는 지속적으로 북경의 서태후와 은밀히 내통하여, 러시아가 헤이룽강을 건너 남침을 개시하는 것과 동시에 청나라도 랴오허강을 건너 대한제국군을 협공하기로 밀약을 맺고 전쟁준비에 착수했다.
니콜라스 2세는 30만 병력의 러시아 대군을 흑해 연안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수개월에 걸쳐 이동시켜 한노국경을 이루고 있던 헤이룽강 접경지대에 증강 배치시켜 나갔다. 러시아군의 병력이동이 본격화되자 대한제국군은 유격대를 조직하여 중앙아시아 깊숙이 침투시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파괴하고 전선을 절단하는 등 게릴라 활동으로 러시아군의 이동을 괴롭혔다.
발틱해에 주둔하고 있다가 태평양으로 발진한 러시아 함대는 영국의 거부로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멀리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가는 대항해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국내상황은 짜르체제에 대한 불만이 거의 폭발직전에 도달해 있던 혁명전야의 시기로 군 내부에서도 혁명조직의 침투로 병사들의 전쟁에 대한 사기는 그리 높지 않은 상태였다.
육군은 시베리아를 관통하는 긴 여정에 지쳐 곳곳에서 탈영사태가 빈발하였고 급기야는 인도양을 항해하던 발틱함대에서 수병들의 반란이 일어나 아프리카 서안의 마다가스카르섬을 점령하고 그 곳에 눌러 앉아 버린다. 변변치 못한 급여와 식량사정뿐만 아니라 귀족출신의 소수 장교들에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며 평생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이역만리 머나먼 곳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질린 채 짐승처럼 끌려가던 상황에서, 식수를 구하기 위해 잠시 정박한 마다가스카르섬의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농수산물 그리고 지상낙원 같은 풍광에 접한 수병들은 이런 곳을 떠나 지옥 같은 전장으로 향해야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고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장교들을 제압하고 배에서 내려와 원주민과의 짧은 교전 끝에 섬 전역을 점령하고 정착촌을 건설하게 된 것이었다.
더구나 이 함선 중 일부에는 국내의 혁명적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황실에서 자신들의 막대한 재산을 금괴로 바꿔 몰래 안전한 곳으로 빼돌려 놓으려고 싣고 있던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수병들의 반란욕구를 더욱 부채질한 꼴이 되어 버렸다. 러시아 인민들의 절박한 사정에는 아랑곳없이 오직 제국의 확장과 승전의 영광만을 위해 눈이 먼 짜르와 황실은 전쟁놀음에 광분하여 마침내 대한제국과의 전쟁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전쟁 초기부터 온갖 불리한 조건들에 시달려야 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처음부터 땅에 떨어져 있던 상태였던 데다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겨냥한 유격대의 게릴라 활동으로 무기와 탄약 등 각종 군수물자뿐 아니라 식량과 식수조차 제때 공급되지 않자 모든 작전에 엄청난 지장을 받게 됐던 것이다. 그나마 부정기적으로 운행하던 기차도 부상병조차 외면 한 채 부패한 군장성들이 빼돌린 군수품을 실어 나르기에 바빴다. 더구나 참전을 약속했던 청국군은 황실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군부 수뇌부의 망서림으로 러시아군이 헤이룽강을 건넌지 열흘이 되어도 꼼짝을 않고 랴오허강 건너 편 자기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은 황실과 군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생해 있었다. 초기 육군의 고전도 막강을 자랑하던 발틱함대가 도착하면 금방 전세가 달라질 거라고 모두들 굳게 믿고 있었으나, 러시아 육군이 참호 속에서 동상에 걸려가며 대한제국군의 공세를 필사적으로 버티던 그 시간에 러시아 수병들은 따뜻한 열대의 섬에서 벌거벗은 채 수영과 낚시를 즐기며 천국 같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고 러시아가 자랑하던 발틱함대의 막강한 위용을 갖춘 전함들은 아프리카 서안의 인도양에서 녹슬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30만 대군으로 성장한 대한제국군은 잘 훈련된 상태였고 군수보급이나 화력도 짧은 동선을 이용하여 우수한 상태여서 러시아군은 쉽사리 전선을 뚫지 못한 채 고전을 거듭하다 6개월 간의 지루한 참호전을 포기하고 결국 퇴각하기 시작했다. 대한제국 육군과 만주군 연합군은 본격전인 공세로 전환하여 패주하는 러시아군을 쫓아 헤이룽강을 건너 시베리아 내륙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또 대한제국 해병대와 일본군 연합군은 당시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던 사할린에 전격적으로 상륙하여 섬 전체를 점령하는 개가를 올리게 되었다. 러시아군이 오매불망으로 고대하며 기다리던 발틱함대는 수병들의 반란을 피한 일부만이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북태평양으로 접근해 오다가 대만 인근 해역에서 잠복해 있던 대한제국 해군의 기습공격으로 궤멸되고 말았다. (1904년)
러시아 황실은 대한제국에 패배를 인정하고 강화조약을 요구하고 영국의 중재로 런던에서 양국의 협상대표는 대좌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의 전권대표는 민영환 외무대신이었다. 런던조약에서 대한제국과 러시아의 국경은 아무르강으로 정하고 사할린은 대한제국에 할양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만주에 대한 대한제국의 지배권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노전쟁의 참패로 러시아는 일대 심각한 국내외적 타격을 받게 되고 국내 정세는 혁명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러시아와의 전쟁이 일단락 되자 대한제국 정부는 이번 전쟁의 배후에 서태후가 개입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는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적 도발행위로 간주하고 청제국에 선전포고를 선언하였다. 대한제국이 청제국에 전격적으로 선전포고를 단행하자 북경의 청 조정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분위기가 온통 초상집으로 바뀌었고 중국에 각종 이권을 보유하고 있던 구미열강들도 사태의 진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노쇠하고 무력한 청 조정은 물론이고 구미열강들도 현실적으로 대한제국의 군사력을 감당할 무력을 동원하기 힘들었고 더구나 양국간의 분쟁에 개입할 명분도 쉽게 찾아내기 힘든 상태여서 자국민의 보호와 이권의 상실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방관하고 나섰다. 마침내 대한제국 육군 5개 사단 10만 병력은 한중국경이던 랴오허강을 일제히 도하하여 중국 영토로 진입하며 위력적인 공격을 단행하였다.
새로 구축된 최신예 순양함 장보고호를 주축으로 한 대한제국 서해함대는 산동반도 위해위(威海衛)에 정박 중이던 청제국 해군의 주력함대인 북양함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칡흙같은 어둠 속에 수뢰정으로 야습공격을 단행한 결사대의 분전으로 청제국 북양함대의 주력함인 정원(定遠)호와 진원(鎭遠)호는 순양함으로서의 기능의 상당부분을 철저하게 파손 당하였고, 다음 날 날이 밝자 전면적인 공격을 가해오는 장보고호와 이순신호의 가공할 위용에 힘 한번 변변히 써보지도 못한 채 바다 속으로 침몰되고 마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북양함대가 섬멸되자 제해권은 완전히 대한제국의 수중에 장악되었으며 2개 사단 규모의 해병대 병력 3만 명은 산동반도에 상륙하여 북경으로 곧장 돌진해 들어갔다. 대한제국군이 천진에 상륙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자 서태후는 그 동안 친한적 태도를 견지해 왔던 광서제를 강제로 끌고 북경을 탈출하여 서둘러 서안(西安)으로의 도피 길에 올랐다.
청 황실이 자금성을 빠져나갔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지자 지난 아편전쟁 때와 같이 대규모의 학살과 약탈이 다시 일어날까 두려워한 북경 인민들이 남쪽으로 대거 피난을 떠나는 등 북경 시내는 일대 아수라장으로 변하였다. 청 황실의 무책임한 탈출 소식을 뒤늦게 접한 청 군부도 더 이상의 항전의 의욕을 상실한 채 무기와 군복을 벗어 던지고 피난민의 대열에 끼어 도망가기에 바쁜 지경이 되어 버렸다. 대한제국 해병대 선봉대 병력이 북경 시내로 진주하여 자금성에 대한제국의 깃발을 올리고 이어 육군의 주력부대도 속속 북경으로 진주하여 마침내 북경 전역을 완전히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1905년)
북경점령 소식이 서울에 알려지자 제국당과 대자본가들은 지금이 중국 전체를 식민지화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판단하고, 김옥균 내각에 전쟁을 중지하지 말고 중국 전역을 점령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나섰다. 또 지식인층 중 일부 국수주의적인 민족주의자들은, 본래 우리 민족은 몽고족과 단일한 민족으로 징키스칸이 지배한 모든 영토를 다스릴 수 있고 따라서 조선과 중국, 일본은 본래 다 한민족으로 중원을 차지한 자가 그 나머지 모두를 다스릴 수 있다는 천하일국론(天下一國論)을 유포하여 연이은 전쟁의 승리로 들뜬 인민들을 현혹하고, 자본가들은 중국을 차지하면 더 많은 일자리와 더 높은 임금이 주어진다고 노동자와 실업자들을 선동하고 나섰다.
서울의 분위기가 점차 광적으로 확산되어 나가자 김옥균 내각과 자유당은, 이번 청국과의 전쟁이 우리 나라 인민과 영토에 대한 보호에 있지 중국 인민과 영토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위함이 아님을 애써 설명하고 더구나 현재의 국력으로 볼 때 더 이상의 전쟁의 확대를 감당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
북경 점령 후 대한제국은 청제국에 서태후의 퇴진과 광서제의 친정을 골자로 하는 강화안을 제시하였으나 서태후는 이를 필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서 협상은 결렬되고, 대한제국군은 황하(黃河)를 경계로 중국의 동북지역을 완전히 점령하여 청 황실과 조정을 내부에서 고사시켜 나가는 장기적인 봉쇄정책을 시행하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대한제국군에 의한 북경 점령은 그나마 어렵게 명맥을 유지해 오던 청제국의 숨통을 결정적으로 틀어막는 계기로 작용하였으며, 대륙의 서쪽 깊숙이 서안으로 도피해 있는 황실의 권위는 물론이고 통치력도 현저히 약화되어 각지에서 군대를 지휘하며 무장력을 갖추고 있던 지방 군벌들에 의해 완전히 분할 통치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전쟁의 추이를 불안하게 지켜보던 구미열강들도 극단적인 반외세 성향의 서태후와 상대하는 것보다, 군부의 주력을 이끌고 퇴각하여 남경과 상해일대를 장악한 원세개에게 접근하게 되었다. 원세개는 구미열강들이 대한제국을 견제하여 자신의 위치를 보전하여 주는 것을 조건으로 매판적이고 굴욕적인 자세로 일관해 온 터라 구미열강의 입맛에는 더욱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