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책을 읽다고 적어 놓은걸 요약 정리해서 올려 봅니다..
1. 원형 파시즘의 첫째 특징은 전통의 숭배이다.
2. 전통주의는 현대성의 거부를 함축한다.
파시스트나 나치 모두 테크놀로지를 숭상했다. 반면 전통주의 사상가들은 대개 테크놀로지를 전통적 정신 가치의 부정으로 간주하여 거부한다. 어쨌든 비록 나치즘이 자신의 산업적 성공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지라도, 현대성에 대한 그들의 찬양은 피와 땀에 기반을 둔 이데올로기의 피상적 양상에 불과했다. 현대 세계의 거부는 자본주의적 생활방식에 대한 비난으로 위장되어 있다.
3. 비합리주의 또한 행동을 위한 행동의 찬양에도 의존한다.
행동은 그 자체로 아름다우며, 따라서 어떠한 성찰도 없이 또한 성찰 이전에 실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기력함의 한 형태이며, 그러므로 문화가 비판적 행위와 동일시되는 한 “문화는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나는 문화에 관한 말을 들을 때마다 내 권총을 뽑아 든다”는 괴벨스의 선언에서, “지신인 돼지들” “지식인 나부랭이들” “급진적 속물들” “대학은 빨갱이들의 소굴이다” 등과 같은 표현들의 빈번한 사용에 이르기까지, 지식인 세계에 대한 의혹의 눈길은 언제나 원형 파시즘의 한 증상이었다.
4. 비판 정신은 구별 작업을 하며, 구별한다는 것은 현대성의 표시이다.
현대 문화에서 과학 공동체는 불일치를 지식의 진보를 위한 도구로 이해한다. 그런데 원형 파시즘에서 불일치는 바로 배반이다.
5. 그 이외에도, 불일치는 다양성의 표시이다.
원형 파시즘은 천성적인 차이에 대한 두려움을 과장하고 이용함으로써 일치를 찾고 증대시키려 한다. 파시즘 운동 또는 파시즘을 예고하는 운동의 첫 번째 호소는 침입자들에 대한 반대이다. 그러므로 원형 파시즘은 그 정의상 인종차별적이다.
6. 원형 파시즘은 개인적 또는 사회적 좌절에서 분출된다.
이것은 역사적 파시즘들의 전형적 특징 중 하나가 좌절된 중간 계층들에 대한 호소였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들은 어떤 경제적 위기나 정치적 모욕으로 인해 불안해하거나, 사회적 하층 집단들의 압력에 놀란 중간계층들이다.
7. 어떠한 사회적 정체성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유일한 특권은 모두에게 가장 공통적인 것, 즉 같은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원형 파시즘은 말한다.
이것이 바로 국가주의의 기원이다. 또한, 국가에 정체성을 부여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적들이다. 따라서 원형 파시즘의 심리 저변에는, 가능하다면 국제적 음모의 강박 관념이 있다. 피시즘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포위되어 있다고 느껴야 한다. 음모를 출현시키는 데 가장 손쉬운 방법은 외국인 혐오증에 호소하는 것이다. 하지만 음모는 내부에서도 나와야 한다.
8. 파시즘 추종자들은 적의 힘과 과시된 부에 의해 모욕감을 가져야 한다.
적들은 너무 강하면서 동시에 너무나도 약하다고 생각한다. 파시즘은 자신들의 전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왜냐하면 구조적으로 적의 힘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9. 원형 파시즘에는 삶을 위한 투쟁은 없고 오히려 투쟁을 위한 삶이 있다.
평화주의는 적과의 결탁이다. 삶은 영원한 전쟁이기 때문에 평화주의는 나쁜 것이라는 말이다. 적들을 패배시켜야 하고 또한 패배시킬 수 있으므로, 최후의 싸움이 있어야 하고, 그 결과로서 파시즘 운동은 세계를 통제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한 최종적 해결은 이어지는 평화의 시대를 함축하는데, 그 황금시대는 영원한 전쟁의 원리와 모순된다. 어떠한 파시스트 지도자도 그런 모순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10. 엘리트주의는 근본적으로 귀족적이기 때문에 모든 반동적 이데올로기의 전형적 특징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모든 귀족적, 군사적 엘리트주의는 약한 자들에 대한 경멸을 함축하였다.
지도자는 자신의 권력이 위임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힘으로 정복되었음을 잘 알고 있고, 따라서 자신의 힘은 대중들의 나약함, 너무나도 허약하여 지배자를 필요로 하고 또 그러기에 마땅한 대중들의 허약함에 기초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11. 이러한 전망에서 보면 각자는 영웅이 되기 위해 교육받는다.
원형 파시즘의 이데올로기에서 영웅주의는 일상적인 것이다. 이러한 영웅주의 숭배는 죽음의 숭배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원형 파시즘의 영웅은 죽고 싶어 안달한다. 그 안달 속에서, 사족을 덧붙여 말하자면, 아주 빈번히 다른 사람들을 죽게 만든다.
12. 영원한 전쟁이나 영웅주의는 모두 하기 힘든 게임이기 때문에, 원형 파시즘은 자신의 힘의 의지를 성(性) 문제로 전이시킨다.
이것이 (여성에 대한 경멸, 그리고 순결에서 동성애에 이르기까지 비순응적 성 습관들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비난을 포함하는) 남성주의의 기원이다. 그런데 성 또한 하기 힘든 게임이기 때문에 원형 파시즘의 영웅은 자기 남근의 대용품인 무기를 갖고 게임을 한다.
13. 원형 파시즘은 선택적 민중주의, 질적 민중주의에 기초한다.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은 개인적 권리들을 향유하지만, 시민들 전체는 단지 양적 관점에서만 정치적 충격을 가할 수 있다. (다수의 결정을 따른다) 그런데 원형 파시즘에서는 개인 그 자체로서의 개인들은 권리를 갖지 않으며, 민중은 하나의 질로서, 공통 의지를 표현하는 단일한 실체로 이해된다. 인간 존재의 어떠한 양도 하나의 공통 의지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지도자는 자기가 그들의 해석자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미래에는 텔레비전 또는 인터넷의 질적 민중주의가 나타날 것이며, 거기에서는 선택된 시민집단의 정서적 반응이 곧바로 민중의 목소리로 제시되고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질적 민중주의로 인해 원형 파시즘은 “썩어빠진” 의회 정부에 저항해야 한다. 어느 정치가가 의회가 더 이상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의회의 합법성에 대한 의혹을 던질 때마다, 우리는 원형 파시즘의 냄새를 느낄 수 있다.
14. 원형 파시즘은 새로운 언어를 말한다.
원형 파시즘의 요소들은 다양한 형태의 독재에 공통적이다. 나치즘 또는 파시즘의 학교 교과서들은 모두 빈약한 어휘와 초보적 통사를 토대로 하였는데, 바로 복잡하고 비판적인 사고를 위한 도구들을 제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형태의 새로운 언어를 확인해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대중적 토크쇼의 순진한 형태를 띠는 경우에도 말이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원형 파시즘이 있다. 때로는 사복으로 위장한 모습으로 말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세계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내고 “나는 아우슈비츠를 다시 열고 싶다, 나는 또 다시 검은 셔츠들이 광장에서 사열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차라리 마음 편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이란 그렇게 손쉬운 것이 아니다. 원형 파시즘은 아주 순진한 옷을 입고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우리의 의무는 그 가면을 벗기고, 매일 세계 각지에서 나타나는 이 새로운 형태 각각에 대하여 손가락을 겨냥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루스벨트의 말을 인용해보자. “만약 미국의 민주주의가 밤낮으로 평화적인 수단을 찾으면서, 살아 있는 힘으로 발전하는 것을, 또한 우리 시민들의 여건을 향상시키는 것을 중단한다면, 파시즘 세력이 미국에서 성장할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1938년 11월 4일) 자유와 해방은 절대 끝나지 않는 의무이다. 잊지 말라. 이것이 바로 우리의 좌우명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