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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경제사'통일 신라시기 호등제의 성격과기능에 관한 연구
게시물ID : history_476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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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110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6/19 12:12:51
지난 글 : '한국 고대 경제사' 통일기 신라의 토지 분급제도의 정비 머리말 "신라촌락문서"에는 신라에서 9등호제를 실시하였음이 나타나 있다. 1980년까지 촌락문서 연구를 주도한 하타다 등 일본학계에서는 호등을 인정(人丁)의 다과에 기준을 두고 구분했다고 파악하였다. 이에 따르면 호등제는 촌락민들에게 역역을 부과하기 위한 기초자료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경우, 촌락문서에 나타난 인정의 수와 호구 대응 인정수에다 각 촌의 등급연(烟) 수를 곱하여 산출된 정남의 수와 꼭 들어맞지를 않아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에 따라 1980년대 중반 이후 촌락문서 연구를 주도하게 된 한국학계에서는 각 호(=孔烟)가 소유한 토지(=연수유전답)의 면적에 기준을 두고 호등을 편성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토지의 면적, 즉 결부 수에 근거하여 호등을 산정했다면, 호등제는 조세(=전조) 수취의 기준자료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1. 고구려·고려 호등제의 기능 "수서"고려전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인세(人稅)로 포 5필, 곡(穀) 5석을 냈으며, 3등호제를 실시하여 (상)호는 1석, 차호는 7두, 하호는 5두를 냈다고 한다. 김기흥 등 종래 연구자들은 인세의 성격을 인두세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중국 수취제도를 살펴보면, 한대를 제외하고 당대까지 모든 가구원을 대상으로 세금을 부과한 경우는 없다. 따라서 7세기 고구려에서도 모든 가구원을 대상으로 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이는 아마도 정남을 의미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서"고려전에서는 부세를 거둘 때에 빈부에 따라 그 양에 차등을 두었다고 나온다. 여기서 빈부를 기준으로 책정된 것이 바로 "수서"에서 말하는 (상)호, 차호, 하호의 3등호제일 것이다. 즉 7세기 고구려에서는 3등호제를 실시하고 있던 것이다. 한편 "고려사"형법지를 보면 고려시대에 인정의 다과에 따라 호등을 설정하여 9등호제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정확한 시기를 알려주지 않고 있다. 사료상으로는 충렬왕대인 13세기 후반 이후 관련 사료가 나타나는데, 대개 3등호제를 실시하고 있고, 그 마저도 단속적으로 이루어진 듯한 느낌을 준다. 아마 고려후기에 호구파악이 부실해지면서 지속적으로 호등제를 실시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고려전기에 인정의 다과에 근거한 9등호제를 실시하다가 무신정변 이후 농민의 몰락과 유망이 증가하여, 고려후기에는 단속적으로 3등호제, 더러는 2등호제를 실시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후기의 호등제 관련 사료에서는 호등 산정 기준에 대해 분명히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단 1291년(충렬왕17) 원에서 사여한 강남의 쌀을 사여할 때에 가난한 자보다 부자에게 더 많은 양을 사여했던 점이나, 1362년(공민왕11) 쌀을 징수할 때 호등에 따라 징수액에 차등을 두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호등의 산정 기준이 인정의 다과가 아니라 자산의 다과였음을 시사한다. 단 이때의 자산이 곧바로 토지를 의미한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토지에서 나는 수확물의 다과에 근거하여 호등을 산정하는 방식은 조선 세종대에 가서야 마련되기 때문이다. 고려 우왕대에 가옥의 칸 수를 기준으로 개경의 호등을 산정하였던 점을 생각하면, 당시에는 토지를 포함하여 가호가 보유한 총체적인 자산 규모를 근거로 호등을 산정했던 것 같다. 2. 통일신라기 조(租)·조(調)의 수취와 호등제 1) 조(租)의 부과기준 호등제와 관련하여 종래 논란이 되었던 문제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용조 수취에 과연 호등제가 활용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필자는 전에 호등 산정 기준이 가호가 보유한 자산의 다과라고 주장하였다. 당과 그 이전의 중국 왕조들이나 고대 일본, 그리고 고려에서 요역은 주로 인정 수에 근거하여 징발하였던 바, 신라에서도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자산의 다과에 근거하여 설정된 호등제는 요역 부과의 직접적인 자료로 활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제 호등제가 조(租)·조(調) 수취의 기본자료로 활용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데, 먼저 조(租)를 거론하겠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고구려에서는 가호 단위로 균액의 조(租)를 부과하였다. 고려가 전결의 수, 즉 결부 수에 근거하여 수취하였음은 재언할 필요가 없다. 종래 통일신라에서도 고려시대처럼 결부 수에 근거하여 조(租)를 징수했다고 본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이를 주장한 연구자들의 주된 근거는 당시 결부제를 실시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 이미 춘추전국시대부터 경무법에 입각하여 토지를 계량하고, 또 토지의 위치까지도 정확하게 파악하면서도, 남조의 송 및 제와 균전제 실시 이전 북위에서는 경무 수에 근거하여 전조를 수확하지 않은 적이 있다. 중국의 사례는 결부제에 입각하여 토지를 세밀하게 파악하였다는 사실 자체만을 근거로 전조를 징수했다고 보는 생각이 위험함을 알려준다. 결부 수에 의거하여 전조를 부과하려면, 반드시 토지의 비척도나 전품(田品) 등의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해, 결부 수에 근거하여 전조를 부과하였음을 입증하려면 신라시대에 토지의 상태에 따라 세율을 조정하였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수로왕묘의 제사에 관한 기록에서 '상상전(上上田)'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종래에는 이를 두고 9등전품제의 실시를 추측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삼국유사"가락국기는 당대의 사료로 보기에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있다. 신라 당대 사료인 "김유신행록"을 전거로 삼은 "삼국사기"김유신열전에 나오는 문명왕후(=무열왕비)의 계보와 판이하게 다른 것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그대로 취신하기 힘들다. 또한 "삼국유사"남부여전백제에 보이는 '소부리군전정주첩(所夫里郡田丁柱貼)'을 8세기 초반에 작성된 신라의 토지대장으로 해석한 견해도 있다. 부여 일대가 소부리군으로 지칭되었을 때가 8세기 초반을 전후한 시기라는 판단에 의해서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신라본기나 금석문 자료를 살피건대 신라 말~고려 초에 이전의 원래 지명을 사용한 경우가 많기에 이 전정주첩을 어느 시기의 산물로 보아야할지 막막해진다. 더욱이 이 전정주첩은 고려 당대의 양전장적에 보인다고 하는데, 신라시대의 전정주첩이 일체의 가감 없이 고려대까지 전해졌을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전정'이라는 용어를 신라시대에 사용했다는 실례를 찾을수도 없다. 신라시대에 양안과 같은 토지대장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당시 호적에 호구와 토지상황에 관한 내용을 모두 기재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고대 일본이나 당의 경우를 참작할 때, 호적에 호구상황에 대한 내용을 기재한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당과 같이 호적에 토지상황을 기록했는지 여부인데, 호적을 근거로 작성된 촌락문서에 호구상황과 더불어 전토에 대한 상황을 모두 기재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호구상황만을 호적에 기재하고, 가호가 소유한 전토의 내용을 양안에 기재하였다. 호적에 호구상황만을 기재한 이유는 전조를 전결 수에 근거하여 부과하였으므로, 거기에 토지상황을 자세히 기록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호적에 호구상황과 토지상황을 모두 적기한 신라의 경우에는 양세법 실시 이전 당의 경우처럼 전조 부과를 위한 기초문서로서 양안과 같은 토지대장을 별도로 작성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요컨대 신라에서 전결 수에 근거하여 조(租)를 부과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와 관련하여 균전제를 실시하지 않았으면서도 정남(정녀)을 대상으로 균액의 조(租)와 조(調)를 부과한 중국 남조의 양·진이 주목된다. 이전의 송이나 남제에서는 민호의 자산을 헤아려 세를 부과하였다. 그런데 자산을 헤아려 호등을 설정하고 그에 의거하여 세를 부과함이 지나쳐 농민들이 유망하였고, 그 결과 502년 양무제는 기존의 세제를 인정 수에 의거하여 균액의 조조를 부과하게 개편하였다. 그런데 정(丁)이나 가호를 단위로 균일한 세액을 과세하려면, 정이나 가호의 재산 정도를 대략 엇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요구된다. 균전제는 바로 '균전소농'을 창출하고 그들에게 균일한 세액을 과세하려는 목적에서 정비된 토지제도이다. 북위는 487년(효문제 태화10) 무렵부터 균전제를 실시하여 원칙적으로 균전소농을 대상으로 조조를 거뒀다. 통일신라에서 가호나 정남을 단위로 균액의 조(租)를 부과했다면, 이것은 중국의 균전제와 같은 토지제도의 실시를 전제로 세제를 운영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결부를 물론이요, 속(束) 단위까지 토지의 면적을 파악하고 있는 촌락문서를 볼 때, 과연 신라에서 균전제와 비슷한 제도가 실시되었을지 의문이다. 나아가 어떤 사료에서도 균전제를 실시했음을 여실히 이야기해주고 있지 않다. 요컨대 통일신라시대에는 전조를 전결 수에 따라 부과했다거나, 또는 균전소농을 전재로 균액의 조(租)를 부과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통일신라시대에 조(租)는 무엇을 기준으로 부과했을까? 신라시대에 수취의 기본단위가 가호였음은 촌락문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균전제를 실시하지 않았던 당대 이전의 중국왕조, 그리고 당대에 균전제가 적용되지 않던 지역에서 가호마다의 경제적 형편이나 호등에 근거하여 조(租)를 부과했던 사실이 유의된다. 균전제를 실시하지 않았으면서도 자산의 다과에 따라 설정된 호등제를 실시하였던 통일신라의 경우, 호등에 입각하여 조(租)를 부과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호등에 입각하여 조(租)를 부과했다는 것은 각 가호의 경제 형편을 고려하여 과세했다는 것이며, 이는 가호 단위로 균일하게 5석을 징수하던 7세기 고구려의 상황보다 진일보한 셈이다. 호등에 근거하여 조세를 징수한다면 토지의 사정, 즉 전품이나 비척도, 경작작물 등에 따라 세율을 다시 조정할 필요는 없게 된다. 통일신라시대에 전품이나 토지의 비척도에 따른 세율조정 관련 자료가 전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호등에 근거하여 조세를 수취하였을 때, 각 가호의 토지에 대한 상황을 세세하게 고려하지 않고도 수취가 가능하다는 의미다. 고려시대에는 호등에 입각하여 조(租)를 부과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전결 수에 입각하여 수취하는 방식으로 세제가 개편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당과 고대 일본에서도 엿보인다. 8세기 후반 당은 양세법을 시행하면서 토지면적에 기초하여 지세를 거둔 바 있다. 고대 일본의 경우도 9세기 말~10세기 초에 반전수수제(=균전제와 유사)를 기반으로 한 수취체제가 붕괴되자, 개개 토지에 대하여 징세를 청부하는 자를 확인하고 전율(田率)에 따라 조(租)를 징수하는 수취체제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8세기 말~10세기 초에 동아시아 3국에서 토지면적에 따라 조(租)를 과세하는 세제가 공통적으로 정비된 배경은 농민층의 동요와 토지생산성의 증대 등에 기인한다. 즉 농민들의 유망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가호나 인정을 대상으로 과세하는 것이 곤란해지자, 안정적인 과세가 가능하면서도 이전보다 생산성이 증대된 토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2) 조(調)의 수취와 호등제의 기능 신라시대 조(調)의 부과기준과 관련하여 10세기 이전 중국이나 일본에서 호등에 입각하여 조(調)를 부과하거나, 아니면 균전소농을 대상으로 균액의 조(調)를 부과하였음이 유의된다. 중국의 경우 후한 말~삼국시대에 걸쳐 장기간의 전란으로 인하여 농업생산이 황폐해지고, 또 농민들의 몰락과 유망으로 호구가 감소하면서 국가는 점차 가호단위로 부세를 부과하였다. 조위시대에 실시한 호조제(戶調制)가 바로 그것으로서, 이는 민호의 재산을 헤아려 등급을 나누는 호등제이다. 이러한 양상은 대체적으로 이어져 북위시대에도 9등호제에 근거하여 조(調)를 부과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즉 10세기 이전 중국이나 다이카개신 단계의 일본을 제외하면, 토지면적에 의거하여 조(調)를 부과한 경우는 없다. 고려의 경우도 토지와 호구를 모두 고려하여 조(調)를 부과한 경우는 발견되나, 전적으로 전결 수만을 기준으로 부과한 것은 고려말기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종래에 촌락문서 분석을 통해 조(調)는 촌 단위로 부과했다고 이해한 바가 있다. 이 주장은 촌락문서에 보이는 마전을 촌락의 공유지로 이해하고, 공동노동 형태로 포를 생산했다는 전제를 깔고 제기된 것이다. 그런데 촌락문서에서는 우마의 보유현황을 언급할 때, '合牛~', '合馬~'라고 표기하였다. 서원경 소속 실명촌 문서를 보면, '소 1마리가 연(烟)을 따라갔다'는 표현이 발견된다. 이 표현은 소가 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한 연, 즉 가호의 소유였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위 표현은 가호가 소유한 우마를 포함하여 촌 안에 있는 우마를 모두 합하여 몇 마리라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공교롭게 마전 역시 '合麻田~結'로 나오는 바, 마전 역시 촌락에 분산되어 소재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가호별로 마전을 소유하였음을 말하며, 그렇다면 포의 생산도 개별 가호단위로 생산하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가호단위로 포를 생산하였다면, 조(調)의 핵심 품목인 포의 공동납 형태, 즉 촌 단위 납부형태는 성립할 수 없다. 중국의 경우 균전제를 실시하지 않았던 단계에서 호조제는 호등제를 기초로 운영되었다. 통일신라의 경우도 균전제를 실시하지 않은 단계에서 호조제를 실시하였음이 분명한 만큼, 그것과 호등제는 밀접히 관련된다. 통일신라에서는 가호의 경제적 형편을 고려한, 다시 말하면 호등에 따라 조(調)의 세액에 차등을 두어 거두는 세제를 실시하였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 개인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글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아, 사족으로 보태자면 제가 조금 의문이 드는 마전의 공동경작을 부정하는 부분입니다. 우마와 마전의 기재 양식이 동일한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마전과 우마를 동일선상에서 보아야 할지에 대해선 조금 회의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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