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0-21년이면 아무리 로마사를 우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라도 그 신비로운 막장성을 빠트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동생이 애인에 감시인을 붙였다가 형을 죽여 버렸다든가 그 때문에 아버지가 충격을 받아 갑자기 죽었다든가 할아버지가 이 때문에 원인 제공자의 호적을 파버렸더니 이번엔 할아버지와 손자가 내전을 벌이는[1]...(그나마 그 두 명의 인물은 이름도 같죠) 그래서 그런지 이 시기의 경제적인 상황을 바라보아도 긍정적인 면모를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실제로 국가 재정은 재정 개혁 이후에도 금화 100만 닢을 거두어들이는 정도였고 그나마도 금은 50% 정도밖에 들어있지 않은 실정이었습니다.[2]
하지만 시민의 생활 수준에서 경제 상황을 조망해본다면 어떨까요? 저는 이 부분을 접하면서 다소 의아한 점이 있었습니다. 제국은 540년쯤 인구 1,900~2,600만에 1,017만 솔리두스의 세금을, 1025년에 인구 1,500만[3]에 540만 노미스마의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1가구를 5~6명으로 계산하면, 540년경에는 1가구당 1.96~3.21노미스마를, 1025년경에는 1가구당 1.80~2.16노미스마를 세금으로 부담했습니다. 한편 1320년에는 인구 300만(50만~60만호)이 총 90만 히피르피론의 세금을 감당했으니 약 1.50~1.93히피르피론의 세금을 감당했습니다. 좀 더 자세한 양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몇 가지 사항을 표로 옮겨보지요. (추가. 이 당시 인구의 양상은 추측하기 어렵습니다. 200만이 제시되기도 하고, 흑사병 이전의 몇몇 단편적 자료를 감안한다면 300만이나 400만도 가능할 수 있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합니다.)
가장 특기할만한 점은 ‘세금 추정’ 부분이지요. 5~6인 가구를 기준으로 하여 산정된 것입니다. 잘 보시면 1320년경의 세금 부담 수준은 1180년경과 얼추 비슷한 수준입니다. 되려 540년과 1025년에 비하면 비슷하거나 낮은 상황입니다. 이를 ‘중세(重稅)’라고 표현할 수 있으려면 엄밀하게 말하자면 전체 소득 대비해서 상당히 높아져야 하겠습니다. 아니면 1320년의 증세가 다소 충격적이었다든지요.[5] 이제 그 계산을 해볼 차례입니다. 우선 그것을 위해서는 1320년의 전반적인 경제 지표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추가. 물론 위 지표상으로 명목상의 세금 부담율은 1320년이 가장 낮은 축에 속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상기의 지표는 순전히 '중앙정부의 세액 총액'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점차 분권화가 대세가 되어가는 흐름을 감안한다면 특별히 세금의 수준이 낮아졌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경우에 따라 조금 더 높아진 것으로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주 지나친 중세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Bartusis 교수의 의견에 따르면 (가정이 많이 이루어지지만) 농업 생산 500만 히피르피라에 도시의 비농업 생산 250만 히피르피라, 도합 총생산은 750만 히피르피라입니다. Ang. 교수는 이 시기의 도시화율은 12세기 이래로 비슷하거나 약간 더 상회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참고로 흑사병이 1년전 휩쓸고 지나간 1348년의 테살로니카 시 인구는 15만 명이었습니다. 그래서 1320년경의 테살로니카-콘스탄디누폴리의 인구는 각각 20만 정도로 설정[6]하고 기타 중소 도시 인구로 20만 명을 설정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소 의심이 가는 수치인 20% 정도로 도시화율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Angeliki 교수는 12세기의 도시화율을 15%내지 약간 상회하는 정도로 제시하였고[7], 이런 고 도시화율[8] 추세는 이후 제국 멸망 시까지 대체로 유지됐다고 보기 때문에 이 맥락에서 아주 틀린 수치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에 따라 농촌 인구는 총 240만, 도시 인구는 60만이 됩니다. Bartusis 교수는 1320-21년경 안전하게 경작, 수확이 가능한 토지를 3천만 모디오스(=3백만 헥타르)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240만의 농촌 인구는 40만~48만 호 정도 되기 때문에 농촌 1가구당 평균 68.2모디오스(6.82헥타르)의 경작지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프로노이아나 대토지 소유자, 수도원 등이 수백, 기천 모디오스가 넘는 토지를 소유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일반 농민들은 25~50모디오스의 경작지 내지 과수원을 보유(보통 99:1의 비율)했습니다. 다만 농민들은 대지주가 인력의 한계로 경작할 수 없는 다수의 토지를 경작하고 그 몫을 지주와 나눠가지는 추가 수입원을 가졌으므로 차후에 이 부분도 따로 계산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기 일반 농민 가구는 평균 6.25 히피르피론의 기본 수입을 거두어들이고 텃밭을 가꾸거나 닭을 기르는 등 부업을 같이 했고 지주의 토지 일부를 빌려 경작하기도 했습니다. 전적으로 농민 소유의 토지는 최소 1,100만, 최대 2,200만 모디오스에 달하는데 평균에 가까운 1,650만 모디오스라고 가정해보지요. 그럼 대토지 소유주나 황제가 소유권을 가진 토지는 1,350만 모디오스가 됩니다. 보통 ‘부역’제도를 통해서 농민들이 이들 토지를 경작할 수 있는 한계는 라브라 수도원의 경우처럼 잘 봐줘야 20-24%정도라고 합니다.[9] 그렇다면 제법 후하게 계산해도 최소 76%의 토지는 농민들이 경작하면서 지주에게 ‘수확의 1/3과 과수의 결실로 마련한 포도주의 1/2’로 몫을 나누어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10] 총 1,026만 모디오스의 토지를 440,000호의 가구가 나누어 경작한다고 할 때, 평균 23.32 모디오스의 경지를 추가로 경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 평균 3.89 히피르피론의 추가 수입을 거두어들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텃밭과 닭, 돼지 등 징세의 대상이 아닌 부분은 0.5 히피르피론으로 일괄 처리했습니다. 그럼 농가 1호의 수입은 총 10.14+0.5 히피르피론이 됩니다. 토지세는 보통 토지의 질에 관계없이 무조건 50 모디오스당 1 히피르피론으로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농민들은 황제에게 속했건 귀족이나 수도원에 속했건 그 종주권자에 1-자신 소유의 25~50 모디오스 토지에 대응하는 0.5~1 히피르피론을 납세했습니다. 이를 통해 농촌 백성들은 1-평균치로 해서 약 330,000의 1차적 토지세가 우선 부과되고, 2-농민들은 빌려 경작한 토지의 임대료 명목으로 1.31 히피르피론을 종주권자 측에 납세했습니다. 이로써 576,400 히피르피론이 징수됩니다. 제국이 직접 징수하는 세금이 30% 수준이라면[11] 약 50만 3천 히피르피론을 거두어들일 수 있겠죠. 그럼 나머지 약 40만 히피르피론은 도시민이 부담하게 되는데 약 4.21 히피르피론의 세금을 내는 것입니다. 이외에 최저 생계비도 파악해봤습니다. (추가. 이 무렵 서유럽의 대략의 도시화율은 10% 내외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대토지 소유자들의 토지 대리 경작률의 경우, 라브라 수도원의 76% 하나만 본문에서 제시되어 있었긴 합니다만 당시 전반적인 수준으로 감안했음을 알려드립니다.)
.......비록 엄청난 ‘가정’과 ‘전제’들의 폭풍우가 밀어닥치긴 했어도 어느 정도 결과를 볼 수는 있게 되었습니다. 도시의 경우는 약 20%, 농촌은 약 19%의 세율을 기록했습니다. 물론 근대나 현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지만 생계 유지비를 제외하고서도 꽤 많은 여유가 남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소득)/(소득-생활비)[12]의 백분율로 볼 때는 충공깽(...)이긴 하지만 전근대로서는 조선에 비교할 수준은 아니더라도 중세 일본이나 여타 서유럽 제국(諸國)(녹색- 추가부분)보다는 나은 수준입니다. 특히 백분율로 볼 때보다 여유 자본을 보면 도시 가정의 경우 12 히피르피론이 남는데 무위도식하는 5-6인의 한 가정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평균의 함정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도시의 일반 가정들은 농촌 가정과 비슷하거나 엎치락뒤치락 하는 수준일 것입니다. 그만큼 도시의 고소득 창출은 상대적인 소규모 경제에서 금융업이나 아직 존재하는 산업 시설의 역량 등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1320년쯤이면 8세기 중반 이래 계속 진행된
인구 증가 추세는 많이 약해지고 사실상 정지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13세기 중반부터 진행된 많은 전쟁과 약탈로 인한 잠재적 생산력의 약화도 한 몫 합니다. 잠재적 발전 가능성이 훼손되면서 1320년대에 조금 더 빨리 맬서스적인 한계에 봉착했던 것이지요. 농민들이 얻는 여유 자본이 저렇게 작은 것도 그 한 방증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1347년을 향해서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미칠 듯한 내전과 미쳐버린 흑사병을 향해서요. (결론) * 1320년대의 로마인들은 고세율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어찌되었든 안드로니코스 2세의 증세로 인한 여유금 감소는 로마인들로 하여금 불안한 정치 상황과 더불어 불안감과 불만을 늘렸다. 1인당 GDP는 2.5 히피르피론.[13] * 여유 자본에서 농사 경비 명목의 금액이 더 빠져야하나 비교적 소소한 수치로 예상되어 생략되었다. * 고대 로마 경제에 대해 분석을 시도한 Allen 박사의 복지비율 공식을 적용해보면, 전국 평균으로는 1.76을 구할 수 있고 도시와 농촌은 각각 3.07, 1.44의 수치가 나온다. 이는 쉽게 말하자면 도시의 한 가정은 최대 3 가정까지 부양할 수 있으며 농촌 한 가정은 최대 1.44 가정을 부양하며 전체적으로는 평균 1.76 가구를 부양할 수 있다는 뜻이다. *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이 시기의 최저 생계에 해당하는 금액이 한화로 약 400만원(2010년 기준)이라면 농촌 1가구는 576만원을 벌고, 도시 1가구는 1,228만원을 벌어들이며 전체적으로 1가구는 704만원을 번다는 뜻이다. *
그러므로 당시 비잔틴 국가 자체는 점점 가난해졌지만 그것은 국가의 직접 세입원이 감소하고 지출해야 할 곳이 점점 늘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지, 국민 경제 자체가 가난해졌던 것으로 보기 어렵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 발생하는 것은 1347년 이후의 일이다. * 지니계수는 원천적으로 계산하기 불가능해보이나, 도시민의 평균 소득 양상을 보면 당시 빈부간의 격차가 상당히 심각하고, 이것이 사회 내부에 항상적으로 불만이 팽배하게 만든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4세기부터 시행되고 있던 수도원-국가의 구제 정책이나 교육 혜택의 배려가 내전이 심각해지기까지는 불만이 즉각적으로 터져나오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하는 주석입니다.) [1] 안드로니코스가 정부를 감시하려 고용한 감시인이 그의 형인 마누일을 죽였고 이 때문에 이미 딸의 사망으로 건강이 좋지 않던 미하일 9세는 그 충격으로 사망합니다.(1샷 2킬?) 그러자 노(老) 안드로니코스 (2세)는 자신의 다른 아들인 콘스탄디노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하고 소(小) 안드로니코스와 의절함으로써 동서고금에 흔치 않은 조손간의 내전이 터졌습니다. [2] Angeliki. E. Laiou and Cecile Morrisson, Byzantine Economy, Cambridge Press, 2007, pp. 220 [3] Angeliki. E. Laiou, The Human Resources, extract from The Economic History of Byzantium: From the Seventh through Fifteenth Century, pp. 47-51. 이 부분에서 앙겔리키 교수는 1320년대 마케도니아 인구 밀도를 34명으로 추정하고 1025년도의 인구 밀도를 이의 절반인 17명으로 추정하였습니다. 물론 교수 자신도 이 부분에서 14세기의 인구 밀도를 15명으로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며-물론 그게 흑사병 전후 어디냐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하지만 지형적 차이에 따른 인구 밀도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계산한 바람에 총인구가 1,900만~2,000만에 육박할 정도로 산출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부분을 임의로 수정하여 120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 중 인구 밀도가 높은 부분(30%, 제곱킬로미터당 17명)과 낮은 부분(70%, 제곱킬로미터당 9명)으로 나누어 수정 계산해본결과 약 1,400만 명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고 여기에 도시 인구 100여만 명을 포함해서 총 1,500만명 정도로 결론지었습니다. 물론 30%, 70% 수치 자체도 실증적 자료로 얻어낸 결론은 아니라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4] 이 징세액은 전체 재정 중에서 상업세 부분을 제외한 것, 즉 순수한 세금으로 구성된 부분을 상정합니다. 하지만 775년도의 상업 소득인 20만 노미스마의 자료를 가지고 상대적인 영토와 경제력 당시 상업 여건 등을 감안해서 주먹구구로 셈하여 제한 수치이므로 실제적인 신뢰성은 0%에 수렴합니다. 다만 눈여겨볼만한 거리로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5] 실제로 1321년이나 1324년에 안드로니코스 조손들이 내전을 벌이고 있었을 때 소 안드로니코스에게 큰 지지를 가져다준 데는 ‘증세 철회 및 감세’ 정책의 제안 때문이었습니다. [6] 콘스탄디누폴리는 1180년경 인구가 40~50만 정도였습니다. 1204년에 도시의 절반이 타버렸다고 하면 피란민과 사망자 등의 유출 이후 즉각적인 인구는 약 20만 정도였을 것입니다. 이후 오랜 기간 인구가 유출되긴 하였습니다만 1261년 이후 미하일 8세가 다시금 수도에 유이민을 여러차례 안집시켜 방위력을 강화하려 했고, 14세기에도 여전히 수도 자체는 괜찮은 시장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20만이라고 해서 무리한 숫자는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7] Angeliki. E. Laiou, The Byzantine Economy: An Overview, extract from The Economic History of Byzantium From the Seventh through Fifteenth Century, 2002, pp. 1155 [8] 도시화율을 추산하는데 있어서 특히 여기서 수치가 상당히 커지게 된 것은 규모 3천 정도의 대형 마을 또한 도시로 설정했던 까닭인 듯싶습니다. 도시의 범주를 어느 정도로 정하느냐에 따라 이 수치는 상당히 변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 이런 ‘도시’들은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도 많았을 것이지만, 이 경우는 추산이 근본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제외했으며 실제로도 전체적인 추산에 대단한 영향을 주기엔 규모나 숫자가 작습니다. [9] Svoronos, Le domaine de Lavra, pp. 165–7. 이 시기의 부역은 주로 1년 12일에서부터 24일 그리고 한 지역만 52일 정도였습니다(마케도니아의 경우). 그러므로 12일에 해당하는 지역은 24일을 부역으로 하는 지방의 50%도 경작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마케도니아는 경작율이 상당히 높을 수 있으므로 그 평균에 가까운 24일치로 계산하는 것이 가장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앙겔리키 교수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Angeliki. E. Laiou and Cecile Morrisson, Byzantine Economy, Cambridge Press, 2007, pp. 179 [10] 이 당시의 정식 법률로는 당연히 토지 자본을 소유한 지주에게 모든 소유권이 돌아갑니다만, 이 법률이 실제 적용되는 데 많은 제약과 추가 조치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당대에는 농민의 ‘노동’에 의해 소유권이 성립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으며 보통의 경우 농민은 지주의 토지를 빌려 경작한 다음, 수확의 1/3과 이 경작지에서 새로 짠 포도주의 1/2만 바치면 나머지 수확물은 그대로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11] 이건 정말로 순수한 가정입니다. 이 시기의 토지 대장을 찾을 수 있게 된다면 정말로 실증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현재로선 힘들어 보입니다. 다만 11세기 이래로 토지 소유권과 분리된, 토지 징세권의 양여가 계속 누적되어 왔으므로 30% 정도의 수치는 가설적인 수준에서 합리적인 수치로 받아 들일만 합니다. [12] (세금)/(소득-생활비)의 비율을 구하면 도시는 약 23.8%, 농촌은 약 63.6%, 전국 평균은 42%가 됩니다. [13] 1000년경 비잔티움 제국의 소득 분배....와 같은 제목으로 된 포스트를 찾아보면 당시의 1인당 소득은 약 6.22 노미스마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세금 제도를 알 수 없는 한, 이것이 1320년대와 비교해서 더 넉넉한 때였는지 알기는 불확실합니다. 다만, 이때는 인구 증가 속도가 빨라지던 때였으나 비교적 인구 대비 경작지가 충분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일반 시민들에겐 조금 더 넉넉한 삶의 여건이 제시되었을 개연성은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