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의 참담한 결과를 목도한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는 자신들의 운명이 중국과 같은 처지가 되지나 않을까 경악과 우려에 전전긍긍하며 개항과 쇄국정책사이에서 방침을 정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게 되고, 청제국의 몰락보다는 대한제국의 부상에 더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30년 전, 조일전쟁의 패배로 쓰시마섬(對馬島)을 상실하고 큐슈(九州) 전역도 거의 대한제국의 반식민지로 전락할 지경에 처해 있던 만큼 나날이 강성해져 가는 이웃 대한제국에 공포에 가까운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던 터였다. 영국이 무력으로 중국을 굴복시키자 네덜란드 국왕 빌헬름 2세는 막부에 친서를 보내 일본이 개국할 것을 권유하고, 외국선박과의 사소한 충돌도 중국의 경우처럼 대규모의 전쟁으로 비화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전하여 왔다.
네덜란드 국왕의 이러한 친서는 2백년 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해온 호의이기도 했지만 영국의 중국진출에 위협을 느낀 상태에서 일본을 완전히 개방시켜 일본시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는 의도에 다름 아니었다. 막부는 네덜란드의 사자를 후대하고 충고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나 쇄국은 조상 대대로 지켜온 정책이므로 변화할 수 없다는 내용의 회답을 아울러 표명하여 정중히 거절하였다. 결국 도쿠가와 막부는 세계적 흐름을 외면한 채 굳게 빗장을 닫고, 바스러져 가는 자신들의 봉건적 기득권을 부여잡기 위해 안간힘을 고수하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산업의 급속한 발달에 따라 국제교역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기선(汽船)의 발명으로 인한 해상교통이 활발해 지는 시점에서, 지정학적으로도 구미열강들과의 접촉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던 일본 막부의 쇄국정책의 고수는 오히려 내부의 심각한 분열을 자초하는 결과를 야기하게 되었다.
미국은 독립전쟁 이후 원주민과 충돌 속에 대륙의 서부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한편 자국 내부의 정비를 어는 정도 끝내고 해외로 눈을 돌려 뒤늦게 식민지 확보에 나서게 되었다. 태평양을 건너 중국에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제일 먼저 일본을 주목하게 된 미국은 수 차례에 걸쳐 에도의 막부에 교섭을 요구하나 일본은 무대응으로 일관하였다.
어느 초여름날, 낯선 네 척의 거대한 검은 군함(黑船)이 우라가(浦賀) 앞 바다에 닻을 내렸다. 돛대에서는 미국의 성조기(星條旗)가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평화스러운 한적한 어촌인 우라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하고 막부는 서둘러 교섭에 나섰다.
흑선들은 미국의 극동함대 소속으로 페리(Perry) 제독이 지휘하고 있었다. 페리제독은 미국 정부로부터, 양국간의 교역의 허가와 미국 선박에 대한 편의의 제공을 골자로 하는 요구안을 관철시킬 것을 명령받고 있었다. 페리제독은 이러한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일본의 최고관리가 아니면 상대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요구조건을 수락하지 않으면 무력침공을 불사하겠다고 협박하고 나섰다.
막부에서는 외국과의 한정적 교역을 허용하고 있는 나카사키에서 교섭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페리제독은 막부의 이러한 요구를 무시한 채 오히려 막부의 턱 밑인 에도만에 측량선을 보내 요코하마 가까이 깊숙이 들어갔다. 이러한 미국의 강경한 태도에 적잖이 당황한 막부는 마침내 회담을 허락하게 되고, 페리제독은 일본의 개항을 촉구하는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국서에 대한 회답은 내년 봄까지 연기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고압적인 통보를 하고는 함대를 철수시켰다.
다음 해 7척의 군함과 다시 돌아온 페리제독은, 에도만 깊숙이 들어와 닻을 내리고 막부와 에도 시민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미국 함대의 강경한 태도에 압도당한 일본 막부는 결국 개항을 허용하도록 굴복하고 미국과 요코하마에서 화친조약을 맺게 되었다. (1853년)
일. 미간의 조약에서 페리제독은 만일 일본이 다른 외국에 대하여 미국에 부여하지 않았던 권익을 수여했을 때에는 이와 동일한 권익을 미국에도 보장한다는 최혜국조항을 두기를 강요하였다. 미국과의 조약에 이어 일본은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와도 연이어 화친조약을 맺어 나갔다.
일본 막부가 일미 양국간의 화친조약을 수용하게된 배경에는, 영국의 후원으로 대한제국이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자 이에 위협을 느끼고 미국의 도움으로 대한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술책도 아울러 작용했던 바이었다. 외국과의 잇따른 통상조약체결이 천황의 칙허없이 조인 된데 대해 반막부세력의 다이묘(大名)들은 크게 반발하고 나서 존왕양이(尊王洋夷)운동을 벌여 나가게 된다.
미국과의 조약이 체결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모노세키에 있던 한국인 상관(商館)이 정체불명의 사무라이들의 공격을 받고 조선인 수명이 살해되고 상관이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즉각 에도에 있는 막부에게 범인의 색출과 재발의 방지를 요구하게 되나 이미 막부의 권위는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죠슈번의 다이묘는 범인 색출에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는 대한제국을 전쟁에 끌어 들여 막부를 곤경에 빠트려 타도한 후, 천황을 옹립하여 입헌군주국을 수립하려는 일본 내 반막부세력인 도막파(倒幕派)들이 꾸민 음모의 일환으로 치밀하게 짜여진 각본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었다.
청국과의 전쟁으로 국력이 소진된 대한제국 정부는 그 틈을 타 일본이 전격적으로 구미 열강과 수교를 맺자,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제국의 동남해안에 구미 열강의 군대와 전함이 드나드는 잠재적 불안을 일소하기 위해 일본 정벌을 결정하였다.
대마도에 주둔하고 있던 남해함대와 해병대 병력 1만으로 시모노세키와 가고시마의 상륙작전에 성공한 제국군은 곧 이어 육군 3개 사단 5만 명을 추가로 투입하여 한 달만에 전격적으로 큐슈 전역을 점령하고 봉건영주들을 차례로 축출하여 나갔다. 한편 이순신호를 앞세운 제국 남해함대는 큐슈와 시코쿠를 거쳐 일부는 황궁이 있는 쿄토의 관문 오사카를 봉쇄하고 주력부대는 곧장 막부가 있는 에도로 돌진하였다.
에도만에 도착한 제국 남해함대는 강력한 함포 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한 뒤 해병대를 상륙시킬 태세를 보이자 무력한 도쿠가와 막부는 자신들의 정권유지를 보장받는 선에서 서둘러 항복하고 말았다. (1855년) 막부의 항복소식이 전해지자 제국 내각 일부의 강경파는 이번 기회에 막부를 완전히 타도하여 임진왜란의 복수를 갚아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히 내세웠다.
그러나 제국 군부는 현실적으로 각 번마다 다이묘의 군사력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서 일본 전역을 통치하려면 이들과 일일이 전쟁을 벌여 각개격파 해나가야 될 것이고 그러기에는 우리 측 손실도 만만찮을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을 내리고, 오히려 막부를 유지하여 친한 괴뢰정권을 구성하여 일본을 간접통치할 것을 건의하고 막부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일단 수락하였다.
종전 후 요코하마에서 맺어진 한일간의 조약에서, 일본은 기존의 시모노세키와 가고시마 외에 오사카와 요코하마를 추가로 개방하며 재일 거류민에 대한 보호를 명분으로 개방된 4개항에 제국 해병대 1개 대대병력이 각 주둔하기로 합의하였다. 또 일본의 개방을 돕고 구미열강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막부정권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감독하게 하고 일본이 외교적 권한을 행사할 때 승인을 얻도록 하였다.
초대 통감으로 대한제국 정부는 거국적 차원에서 자유당의 중진이지만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박규수가 임명되어 부임하게 되었다. 한일전쟁으로 사실상 막부통치는 막을 내리게 되고, 일본은 대한제국의 간접지배에 의한 반식민상태로 빠져들게 되며 대한제국군의 군사력이 미치지 않는 내륙 지방에서는 봉건영주들의 군웅할거로 거의 무정부 상태의 혼미한 정국이 거듭되었다.
대한제국이 전격적으로 일본을 점령하자 일본과 이미 수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내심 불쾌했으나 크림반도에서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던 터라 어쩌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본을 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던 미국은 강력히 반발하며 일본 전역에서 대한제국 군대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대한제국 정부는 군대의 주둔은 한일 양국간에 체결된 조약에 근거하는 것으로 감히 미국이 거론할 일이 아니라며 대꾸조차 않자, 미국은 대한제국에 선전포고를 내린 뒤 극동함대를 동원해 공격을 감행하고 나섰다. 미국이 대한제국에 선전포고를 내리고 함대를 발진시키자, 영국은 미국독립전쟁의 패배로 상한 자존심도 회복하고 미국의 아시아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음성적으로 대한제국의 편을 들고나섰다.
주력함 이순신호를 앞세운 대한제국의 남해함대는 미국의 극동함대에 맞서 요코하마 앞바다에서 치열한 해전을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미국은 사실 독립 이후 강대국간에 제대로 맞붙은 전쟁을 수행해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더구나 해전은 거의 처음 치르는 상태나 마찬가지여서 실전 경험이 풍부한 대한제국 함대에 패배하고 태평양 멀리로 도주하고 말았다.
청제국과 일본을 압도한 대한제국의 막강한 군사력에 놀란 구미열강은 점차 아시아의 신흥 강대국인 대한제국의 위용을 견제하기 시작하였고, 한편으로는 일본과 만주에서의 자국활동을 안정적으로 보장받기 위해 대한제국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