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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 경제사' 신라의 녹읍 1. 토지제도 정립의 배경 1)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농업경영의 변동 철제농기구는 4세기 무렵 한반도 전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는데, 백제나 신라 지역에서의 제방 축조는 철제 토목용구 발달의 소산이었다. 보습, 괭이나 쇠스랑, 호미, 낫 등 철제농기구의 광범위한 보급은 농업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켰다. 또한 6세기 무렵이면 가야 지방을 포함한 경상도 일원에서 우경이 널리 실시되었다고 여겨진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농업경영 양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즉 개별 농가가 농업경영의 단위로 성장함으로써 개별 농가의 토지소유가 촉진되었고, 그 결과 소농 중심의 농업경영 체제가 확립되었다. 6세기 무렵 호민층이나 자영농민층의 무덤으로 보이는 고분군이 출현한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농업경영 방식의 변화에 따라 개별 농가의 토지소유 상태를 기준으로 조(租)를 거두는 방식으로 수취체제도 정비되었다. 이 과정에서 토지소유관계를 명확히 파악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2) 주군제의 시행과 정복지 6세기에 본격화된 주군제의 시행으로 소국과 읍락 단위의 정치체는 해체되고, 지방관이 직접 지방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주군제의 시행은 국가가 민과 토지를 직접 파악하고 장악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주군제의 시행과 지방관 파견은 토지의 전면적인 파악과 그에 기초한 재정운영, 토지분급제를 시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창녕 진흥왕순수비"(561년)는 6세기 전반 정복지의 토지를 직접 파악하고 지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비는 새로 정복한 지역을 진흥왕이 순수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비문에 토지·강역·산림·산염·하천 등 토지 및 경제와 관련한 글자가 많이 보이는 점으로 보아, 어떤 경제적인 조치도 함께 취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핵심이 되는 제5행~8행 사이는 대등 이하 신라의 관원으로 하여금 이 지역의 토지와 산림, 하천 등을 조사하여 처리하도록 명령한 것이거나, 그들 관원이 조사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파악은 주군제 아래서 지방관의 임무였을 것이다. 3) 재정운영체계의 정비와 녹봉제의 실시
재정운영체계의 정비과정은 재정관서의 정비에서 나타난다. 가장 이른 시기에 등장한 것은 '물장고'이다. 251년(첨해왕5)에 글씨와 계산에 뛰어난 한기부 사람 부도에게 물장고 사무를 맡겼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 후신이 태봉과 고려 초의 '물장성'으로 보이는데,
물장성이 공기보장(工技寶藏)을 관장하였으므로, 물장고 역시 그와 유사한 직무를 수행했을 것이다. 재정관계 관서가 본격적으로 정비되는 것은 6세기이다. 왕실의 재정관서로 585년(진평왕7)에 대궁·사량궁·양궁 3궁에 사신(私臣)을 두어 재정을 관장케 하였으며, 이 3명의 사신은 622년(진평왕44)에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통합되었다. 한편 '품주'(=집사부의 전신)는 565년(진흥왕26) 무렵 설치되어 국가의 공적인 재산을 관장하였는데, 584년(진평왕6)에 '조부(調府)'가 설치되면서 공부(貢賦)는 조부로 이관되었다. 이어 651년(진덕왕5)에는 '창부(倉部)'를 품주에서 분치함으로서 재정 업무를 정치에서 완전히 분리시켰다. 또한 663년(문무왕3)에 남산신성에 장창(長倉)을 신축하여 우창(右倉)으로 삼고, 천은사 북쪽에 좌창(左倉)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창부·조부가 공부를 관장하는 총책임을 맡고, 좌·우창은 재물의 보관 및 출납을 담당하게 되었다. 원활한 재정운영은 수송체계, 즉 조운망의 확보를 통해 가능하다. 438년(눌지왕22)에는 민에게 소수레 이용법을 가르쳤으며, 487년(소지왕9)에는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관도(官道)를 수리하여 운송로를 정비하였다. 또 505년(지증왕6)에는 선박이용제도를 정하였고, 678년(문무왕18)에는 선부(船部)를 설치하여 선박운송 업무를 전담케 하였다.
수로와 해로를 이용한 운송제도 마련은 조운망 정비가 일단락되었음을 의미한다. 490년(소지왕12)에 처음으로 경사에 시장을 열었다고 한 것이나, 509년(지증왕10)에 동시(東市)를 추가로 개설한 것은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재정운영체계의 정비과정에서
토지제도 정비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수년사조(遂年賜租)의 시행이다. 태종무열왕 초기에 학문이 뛰어난 강수에게 해마다 신성의 조 100석을 하사하였고, 673년(문무왕13)에는 강수를 사찬으로 삼아 조를 200석으로 증봉한 것이 그것이다. 강수는 왕경의 진골귀족 출신이 아니라, 경제기반이 미약한 6두품 학자관료였다. 강수와 같은 처지의 관료는 이 시기에 많이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부류의 관계 진출은 녹봉제 실시를 촉구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수년사조, 즉 세조(歲租)는 이들처럼 녹읍과 같은 물질적 기반을 갖지 못한 처지의 하급 관료들에 대한 대우방식으로 등장한 것이다. 봉록으로서의 세조의 등장과 토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훗날 녹읍이 새롭게 전환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 준다.
녹봉제의 정비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건은 677년(문무왕17)의 좌사록관(左賜祿官), 681년(문무왕21) 우사록관의 설치이다. 사록관의 직능이 '녹=녹봉'과 관련되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유추가 가능하다. 좌·우사록관의 설치는 본격적으로 녹봉제를 실시하기 위한 준비조치로 볼 수 있겠다. 단 이 시기의 녹봉제는 아직 정밀하게 정비되지 못하였다. 녹봉이라면 그것이 어느 지역의 세곡이든 관계가 없어야 할 것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하였다. 무열왕대 강수에게 지급된 세조는 '신성조'로 지역이 명시되었다. 712년(성덕왕11)에 김유신의 처에게 지급한 '남성조' 1000석 역시 마찬가지다. 남성과 신성은 일정 지역의 명칭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주현의 조세를 용도에 따라 배정하는 방식으로 재정을 운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세조의 성격이 그러하였다면, 이는 토지 자체의 지급은 아니지만 특정 군현의 조에 대한 권리로서 인식될 수 있었다.
이러한 권리는 토지제도 발달의 추세에 따라 특정 토지에 고착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고, 그것은 관료전의 지급으로 구체화되었다. 녹읍이 혁파됨으로써 세조는 관료에 대한 일반적 대우로 보편화되었고, 757년 녹읍 부활 이전까지는 월봉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여겨진다. 재정기구의 확충 및 조운로의 정비 등으로 인해, 지정된 지역에서 각기 관료가 거두어야 할 조, 즉
세조를 국가가 일괄적으로 수취하여 중앙에서 지급하는 형태로 발전한 것이 월봉이 아닐까 한다. (-> 사록관의 녹을 녹봉으로 볼 수도 있지만, 녹읍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녹읍 관련 기구로 이해한다면, 이 시기의 양상 이해가 달라지게 됩니다. 단순히 자신의 취지와 맞는다고 하여 별다른 근거 없이 녹을 녹봉으로 이해한다면 연구자로서 문제가 있다 하겠습니다. 한편 세조와 월봉을 구별하여 파악하였는데, 이전 시기 연구자들이 세조와 월봉을 비슷한 실체로 보았던 것에 비하면 진일보한 견해라 하겠습니다.)
2. 국가적 토지분급제의 정립 1) 관료전의 지급과 직분전제(職分田制) 지금까지는 대체로 687년(신문왕7)의 이른바 관료전 지급을 문무관료의 직전(職田) 지급으로 이해하였다. 하타다는 "신라촌락문서"의 내시령답과 같은 직전이라 보았고, 박시형과 김철준 역시 그 견해를 이어갔다. 이에 비해 관료전을 사전(賜田)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이경식에 따르면 687년의 관료에 대한 토지 지급은 심화된 지배층 내의 경제적 불균등과 이로 인해 조성된 격심한 갈등을 조정하고, 이들 전체의 공로를 기리는 취지에서 지급된 사전으로서, 후대의 공훈전 및 공신전 사급과 같은 맥락이라 하였다. 단 "신라촌락문서"의 내시령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나아가 토지제도가 정비되어가던 대세상 이 무렵 관료에 대한 일반적 대우로서 토지가 지급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고찰이 결여되었기에 타당성이 부족하다. 그런데 687년의 관료전 지급이 보다 적극적 의미를 가지려면 그 존속기간도 문제가 된다. 관료전의 존속시기에 대해서는 일시적으로만 존재했다는 견해와, 687년 이래 신라 말까지 존속했다는 견해가 있다. 전자, 즉 관료전의 일시존재론을 본격적으로 논한 이는 강진철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관료전은 687년에 녹읍에 대치되어 지급되다가 757년 녹읍이 부활하면서 혁파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관료전과 녹읍이 서로 대치 관계에 있다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 이어 박시형은 관료전이 지급된 지역을 녹읍이라고 보아, 관료전을 녹읍과 동일시하였다. 한편 후자, 즉 관료전의 지속존재론은 관료전이 신라 말까지 녹읍(혹은 녹봉)과 제도적으로 서로 무관하게 병존하였으며, 상호대치 관계에 있었던 것은 녹읍과 녹봉(혹은 월봉)이었다는 판단에 기인한다. 김철준은 관료전이 정비되어가는 전제정치체제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다는 동기에서, 즉 족장들의 전통적인 수취양식이던 녹읍으로 발생되는 모순을 없애기 위해, 세조나 월봉으로 대체하는 것과 같은 선상에서 새로 등장하여 녹과 병행한 제도로 이해하였다. "신라촌락문서"를 815년에 작성된 이른바 후기녹읍문서로 파악한 다케다나 기무라도 같은 입장이다. 필자는 후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 이유는 첫째, 관료전 지급이 중단되거나 폐지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녹읍이 혁파되면서 취해진 대안은 조(租)의 지급이고, 녹읍이 복구되면서 다시 월봉이 혁파된 것은 녹읍이 녹봉과 같은 계열임을 말한다. 녹읍이 부활될 때에도 월봉만 폐지되고 관료전은 유지된 셈이다. 이미 관료전은 토지분급제의 일부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둘째, "신라촌락문서"에 내시령답을 비롯하여 토지분급제와 관련한 여러 종목의 토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내시령답은 4개 촌락 가운데 사해점촌에만 4결이 있는데,
이것은 내시령이라는 관료의 토지, 즉 관료전이다. 내시령답 4결은 답(畓)의 전체 합계 속에는 포함되어 있지만, 연수유답이나 관모답과는 구분된다. 따라서
내시령답은 연수유답, 즉 농민의 소유지 위에 설정된 것은 아니다. 만약 연수유답에 포함되거나 그 위에 설정되었다면 촌주위답처럼 연수유답의 일부로 기록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시령답은 국유지였을 것이다.따라서 관료전의 지급은 토지 자체의 지급을 의미하며, 그 때문에 그 경영에는 수급자가 직접 간여하였을 것이다. 한편 관료전이 녹읍에서 분화되었지만, 지급의 방법과 그를 매개로 한 인민지배 방식에서 녹읍과는 그 성격을 크게 달리하였다. 관료전은 발전하는 생산력과 정비된 관료제 및 지방제를 바탕으로 하여 성립된 토지제도로서 이후 인민지배와 국가의 경제운영이 토지를 기반으로 전개될 것을 예고하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관료전의 일환인 내시령답 4결을 받은 내시령에 대해서는 내성(內省)의 장관, 현 아래의 촌사(村司)에서 조세관계 업무를 담당하도록 중앙에서 파견한 하급 관원, 서원경의 소경사신(仕臣), 내성에서 조세의 수취 혹은 그것을 생산하고 운반하기 위해 파견한 하급관리로서 내성 직속의 사령(使令) 등으로 보고 있다. 현재로서는 그 실체에 대해 명확히 말하기 곤란하다. 고려의 전시과에서는 최고 110결에서 최하 21결의 전지를 지급하였다. 전시과와 비교하면, 그 규모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그것은 고려의 관료와 신라 관료의 성격 차이에 기인한다. 신라시대 관료제는 소수 진골귀족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세습적으로 유지시키는 기능을 한 골품제에 의해 제약을 받는 관등제를 기반으로 성립하였다. 그러므로 이들 진골귀족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경제적 배려를 할 필요는 절박하지 않았다.
따라서 관료전은 이들 상급 귀족관료의 생활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라기보다는,
생활 유지라는 측면에서 녹봉과 토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던 부류, 이를 테면 6두품 이하 관료들을 주 대상으로 하였기에 면적도 소액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관료전은 고려의 전시과보다는 오히려 중국의 직분전과 유사하다. 직분전은 북위의 균전제 아래서 처음 등장하였다. 당시 북위 관료들은 녹봉을 받지 못하여 생활이 곤란하였기에, 균전제를 시행하면서 모든 관료들에게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1경씩 지급하였다. 이후 484년(효문제 태화8년)에 경관에게는 품계에 따라 녹봉을 지급하고, 외관에게는 6경~15경의 토지를 직분공전(公田)으로 지급하여 녹봉을 대신케 하였다. 이후 당에서는 관품에 따라 2경~12경의 직분전을 지급하였다. 내시령답 4결은 당의 직분전과 비교하면 그렇게 적은 액수라고 할 수 없다.
이 시기 관료의 경제기반은 관료전이라기보다는 사유 토지와 녹읍이고, 관료전은 최소한의 생활보장 의미를 가진 토지였다. 관료전은 관직을 기준으로 지급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점은 내시령답이라는 표현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관료전은 관료의 경제생활을 보장할 정도의 규모가 되지 못하였지만, 항상적인 토지분급제로서 그 위치를 굳혀가고 있었다. 2) 상수리(上守吏) 소목전(燒木田)과 역전제(役田制)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의 이복동생인 거득공(=예원)이 총재(=중시)가 되어 민심을 순찰하던 중 무진주에 이르자 주리(州吏) 안길이 후대하였는데, 안길이 마침 상수(上守)할 차례가 되어 왕경으로 올라왔으며, 후일 안길의 이야기를 들은 문무왕이 성부산 아래를 무진주 상수의 소목전으로 삼아 백성들의 벌채를 금하였으며, 산 아래에 밭이 30묘 있었는데 씨앗 3석을 뿌렸는데, 이 밭의 풍흉 여부에 따라 무진주의 풍흉이 가름되었다고 한다. 거득공인 예원이 총재, 즉 중시가 된 것은 671년(문무왕11) 정월이므로 상수리의 소목전은 671년 무렵에 지급된 것 같다. 671년 당시는 아직 대당전쟁이 지속되어 내부 안정과 결속이 절실할 때였을 것이다. 지방 유력자의 상수제, 특히 무진주처럼 과거 백제 영토였다가 새로 편입된 지역의 유력자들을 중앙 관청으로 불러들여 근무케 하는 것은 지방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따라서 상수리제도가 671년 당시 제도로서 법제화되어있지 않았다 해도, 무진주 혹은 무진군 등 지방의 리(吏)가 중앙관청에 상수하였고, 그에 대한 대가로 소목전을 지급한 것은 사실이다.
소목전은 그 역(役)에 대한 반대급부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상수에 대한 보상 내지 포상의 의미로 지급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차츰 상수가 이역화(吏役化)함에 따라 소목전도 역전(役田)으로 정착되었을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상수리에게 산림을 지급한 일이다. '성부산 아래를 무진주 상수의 소목전으로 삼았다'는 것은 산림의 지급을 의미하며, 그 내용은 '타인의 벌채를 금'하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공동소유 및 공동용익의 대상이었을 산림의 이용권을 특정인에게 독점적으로 허용한 것은 산림의 사유화 추세를 반영한다. 또한 시지와 함께 산 아래의 밭 30무도 지급했다고 보아야 한다. 시지와 같은 산림의 지급에는 경작 가능한 토지가 포함되었을 것이고, 그것이 '산 아래의 밭 30무'일 것이다. 소목전으로 지급된 성부산은 경주 남쪽의 산으로 여겨지는데, 안길의 출신지가 아닌 경주 인근에 소목전을 지급한 것은 소목전이 주리가 상경하여 생활하는 데 소용되는 비용을 조달하는 산림과 토지였기 때문이다. 즉 상수하는 동안 지급받은 소목전은 안길 개인의 토지가 아니라, 상수리로서 역을 담당하는 주리가 체식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토지와 산림을 '무진주 상수 소목전'으로 삼은 데서도 알 수 있다. 상수리 소목전은 각 주 상수리의 상수역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모든 주의 상수리에게 지급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성격의 상수리전은 고려시대 기인전(其人田)의 선구적 형태이다. (-> 안길이 받은 상수리 소목전을 보편적인 제도로서 파악한 점은 의의가 있습니다. 다만 저본이 되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토지는 안길에게 특례로 내린 것처럼 나옵니다. 과연 이를 보편적인 제도로서 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이 부분에 대한 안병우 선생의 해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3) 촌주위답(村主位畓)과 역전제(役田制) "신라촌락문서"에는 사해점촌에 촌주위답 19결 70부가 있다고 한다. 촌주란 명칭은 503년(지증왕3)에 건립된 "영일냉수리비"에 처음 나타난다. 그러므로 촌주위답 역시 6~7세기에 설정되었을 것이다.
촌주위답은 직역자로서의 촌주가 수행하는 역에 대한 반대 급부로서 설정되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앞서 살펴 본 상수리의 소목전과 유사하다 하겠다. 하지만 소목전이 상수리의 소유 토지와 무관하게 지급된 데 비해, 촌주위답은 촌주의 소유지와 관련하여 그의 촌락에 설정된 것은 명백한 차이점이다. 촌주위답은 촌주의 연수유답을 촌주위답으로 설정해주는 방식으로 지급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촌주위답은 엄밀한 의미에서 토지 지급이라 할 수는 없고, 촌주로서의 경제적 지위를 인정하는 조치였다. 아마
국가에 납부해야 할 조세를 면제하는, 즉 면조권의 지급을 근간으로 했을 것이다. 그러한 점은 촌주위답의 면적이 19결 70부라는 데서도 추측할 수 있다.
면적이 '결'에서 그치지 않고 '부'까지 이른 것은 그것이 국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지급되거나 설정된 토지, 즉 국가의 수조권 위임 등에 의해 설정된 토지가 아니라,
촌주가 본래부터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인정해준 것임을 반증한다. 단 촌주위답이 촌주 소유지 전부를 대상으로 한 건 아니라고 여겨진다. 천주위'답'만 있고 촌주위'전'은 없기 때문이다. 즉 촌주의 토지 가운데 일정 액수 이내의 토지만 인정받았을 것이다.
"신라촌락문서"에 따르자면 촌주위답의 상한은 20결 정도였다고 여겨진다. 4) 왕위전·사원전과 위전제(位田制)
왕위전은 능묘전(陵廟田)의 일부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661년(문무왕1) 3월에
수로왕묘에 토지를 지급하여 제사 비용을 마련하도록 한 것이 시초이다. 이 왕위전은 능묘를 관리하는 직역자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설정되는 역전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국가기관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에 준하는 기관으로서
사찰에 지급된 토지도 위전(位田)으로 볼 수 있다. 452년 금관가야의 김질왕이 허황후를 위해 왕후사라는 절을 세우고 근처의 평전(平田) 10결을 측량하여 공양하는 비용으로 삼게 한 것이나, 693년(효소왕2) 만파식적과 관련하여 백률사에 왕이 밭 1만 경을 시납한 것이 그 예이다.
3. 마전(麻田)과 국가적 토지경영 1) 마전과 촌락 공유지의 잔존 마직물은 중요한 의료 소재였으므로, 마 재배와 마직물 생산의 의의는 컸다. "삼국사기"소나열전을 보면 675년(문무왕15) 당시 변경지방인 아달성 주민들이 마를 재배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주목되는 것은 성민들이 태수의 명에 따라 '일제히 나가 마를 심은' 점이다. 이러한 방식은 마전 경작의 특수성을 반영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점은 "신라촌락문서"의 마전 기록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 마전은 4개 촌락 모두에 존재하는데,
마전을 일반 작물을 심는 전답과 구분하여 기록한 것은 마전을 별도로 파악하였음을 말한다. 또한 "신라촌락문서"에는 각 촌락의 전답 면적이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1결 정도를 마전으로 설정한 점은 공통된다. 이는
마전이 일정한 면적을 기준으로 하여 촌락별로 할당되었거나, 군현별로 할당된 것을 군현이 다시 촌락에 할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마전을 일반 전답과 구분하여 파악하고 관리한 것은 마의 재배가 매우 중요한 농업이었기 때문이다. 마 재배는 일반 작물보다 훨씬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사였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마 재배는 당시의 농업기술 수준에서 개별 농가가 해내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러므로 농민들이 일제히 나가 마를 심었다고 해도 각자의 마전에 개별적으로 마를 심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태수가 일제히 나가 마를 심도록 명령하고, 말갈이 이 기회를 틈 타 성에 침입한 것은
마를 심는 작업이 개별 농가의 작업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작업에 속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공동경작은 촌락공동체의 그것에서 유래하였다. 마전은 아마 촌락공유지의 잔재일 것이다. 그러한 마전의 소유관계는 촌락문서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여기서는 마전의 면적을 기록하면서 '합마전(合麻田)'이라고만 썼을 뿐, 그 내역을 별도로 기록하지 않았다. 2) 국가적 토지경영과 전사법(田舍法)의 수용 국가적 토지소유와 경영방식을 유추할 수 있는 예는 변경지대와 같은 군 주둔지일 것이다. 군량은 후방에서 운반되기도 했지만, 평상시에는 해당 군현의 생산물로 군량을 충당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에 산견되는 주창(州倉)은 바로 군현의 곡식을 비축하는 창고였다. 그런데 군대 주둔만으로는 지역을 방어할 수 없었고, 농업생산 기반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이 항상 뒤따라야 했다. 그러므로 적군의 계속적인 침입을 견제하면서 농사를 짓는 효과적인 방법이 모색되었다. 이른바 둔전의 설치와 경작이다. 삼국시대에 둔전을 개설한 직접적인 사료는 없다. 다만 변경지역의 성이 다량의 군량을 비축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수의 우마를 보유하고 있던 점, 정복지 처리와 사민과정에서 둔전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 671년(문무왕11) 문무왕의 서신에 따르면 백제지역에 주둔한 당군이 둔전을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가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는 점, 671년 설인귀의 서신에서 신라가 둔전을 경작하고 있음을 언급한 점, 군 주둔지에서 무기류와 함께 농기구가 발견되는 점 등을 감안하면, 최소한 변경지역에서는 둔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농업방식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단양적성비"(6세기 중엽)의 '전사법'이다. 전사는 어의 자체로는 농가를 의미한다. 그러나 비문의 전사는 보통 농가라 할 수는 없다. 전사는 자영농과 구분되는 농가였을 것이다. 전사는 일정 면적의 토지와 농업 도구, 이를 테면 소 등이 속한 농업경영 단위로서 국가의 직접적인 지배와 통제를 받는 영농단위였을 것이다. 이들은 영농단위인 동시에 군사 단위로 편성되었을 것이다. =============================================================================================== 6~7세기의 토지제도와 관련한 문제들을 하나 하나 다뤘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다만 여러 주제를 다루다 보니, 개별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힘든 면이 없지 않습니다. 나아가 수조권 지급을 강조하려면 결부제에 대한 긍정, 나아가 그 타당성 입증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상세히 이루어지지 않은 점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