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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칼럼] 박근혜, 최악의 대통령
게시물ID : sisa_4720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olidarite
추천 : 13
조회수 : 1371회
댓글수 : 39개
등록시간 : 2013/12/25 10:23:30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16853.html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이 글을 쓰기에 앞서 한 가지 고백해야 하겠다. 실은 나는 대통령을 누가 하는가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다. 대통령은 누가 되든 1997년 이후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한 번도 바뀌거나 수정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금 문제가 된 철도를 보라. 철도청을 철도공사로 바꾸는 등 대자본이 철도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최초로 만들어낸 것은 노무현 때였다. 또 고속철도 여승무원의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다단계 간접 고용도 노무현 때에 이루어진 것이고, 여승무원들이 2006년 이후로는 몇 년간 이에 맞서서 투쟁을 했는데도 ‘민주적’ 정권으로부터 받은 것은 탄압밖에 없었다. 2009년에 철도 파업을 탄압해서 169명의 해고자를 만든 것은 이명박이었다. 오늘날 파업은 바로 이와 같은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고, 2000년대에 접어들어 민영화 입법 철회를 위한 최초의 철도 파업은 김대중 시절인 2002년에 이미 일어난 바 있다. 과연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김대중이나 노무현과 같은 자유주의 정권과 그 후의 극우정권의 차이는 그렇게까지 클까?

대통령이 누가 되든 간에 정책의 핵심을 대통령이 주체가 되어서 정하는 것은 아니다. 삼성경제연구소를 비롯한 국내 재벌들의 두뇌집단들과 해외 대자본의 요구를, 당선에 성공한 정객들이 알아서 가감해서 경제정책이라고 내놓는 것이다. 사실 외교정책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대통령이 햇볕정책, 곧 햇볕이 행인으로 하여금 옷을 벗게 하듯 북한의 시장화를 유도하겠다는 차원에서 제한적인 대북 경협 정도 할 권한까지 있다. 노무현 초기처럼 중국에 대한 친화적 제스처를 할 권한까지 부여돼 있으며, 또 워싱턴의 천자(天子)가 이라크 출병과 같은 일을 명령할 때에 내색을 하여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을 자유도 있다.

그러나 일개 후국(侯國)의 후왕(侯王)으로서는 제국의 출병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경쟁 제국인 중국에 제스처 이상으로 정치·군사적으로 가까워진다는 것은 대통령이 누가 돼도 거의 상상 밖의 일이다. 행여나 다시 한 번 노무현의 적자들이 정권을 잡아도, 예컨대 남북 공동의 군축을 해가면서 북한과 군사·안보협력을 시작하는 등 실제적인 미·일·한 삼각 동맹의 틀 깨기는 지난할 것이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 간에 기존의 보수적 기본틀이 남아 있는 한, 곧 어떤 급진적 변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경제적 신자유주의와 정치·군사적 미 제국에의 복종은 우리에게 그저 존재의 기본 조건일 뿐이다. 그러기에 대통령이 누가 되고 대통령이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 일희일비할 것이 있는가?

형식적 민주화 이후의 지난 25년을 통째로 돌아보면, 이 정도로 시대착오적이고 비상식적인 권력이 태어난 것은 처음인 듯하다. 사실, 이와 같은 수준의 극우정객이 정당 당수, 그리고 대통령 후보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한국 정치에 최고 선거직을 지향하는 정치인의 ‘품질’을 검증하는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박근혜의 지난 1년의 집권기간이 보여준 것은 극우 정객 출신의 대통령치고도 박근혜가 너무나 독보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형식적 민주화 이후의 지난 25년을 통째로 돌아보면, 이 정도로 시대착오적이고 비상식적인 권력이 태어난 것은 처음인 듯하다. 사실, 이와 같은 수준의 극우정객이 정당 당수, 그리고 대통령 후보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한국 정치에 최고 선거직을 지향하는 정치인의 ‘품질’을 검증하는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검증 시스템이 작동되었다면, 차후 보수에도 재앙이 될 ‘박근혜 집권’이라는 이름의 필패의 희비극을 사전에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근혜에 비하면, 남북기본합의서의 체결에 나선 노태우나, 김일성과 정상회담을 하려고 했던 김영삼마저 통일지향적 진보정치인으로 보일 정도다. 촛불 사태에 밀려 대운하 등 가장 망상적인 계획들을 그래도 철회하거나 대폭 수정한 이명박은 소통할 줄 아는 정치인으로 보일 정도다. 사실 대한민국의 진정한 ‘주인들’, 곧 재벌의 대주주들은 박근혜의 대통령직 수행 능력 수준이 다 들통난 지금쯤에 그들의 마름 격인 그녀를 해임해야 하지 않을까를 신중히 고려해볼 만하다. 이렇게 가다가는 종국에 가서는 그들의 부까지 ‘안녕’하지 못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의 전임자인 이명박의 대북 정책은 완패했다. 엄청난 돈과 노력이 들어간 햇볕정책을 포기했는데, 남한 보수 일각에서 기대했던 바와 정반대로 북한은 위축되긴커녕 정권 세습의 작업을 비교적 원활하게 하여 새로운 권력체계를 공고히 하는 한편 중국 투자와 대중국 무역, 그리고 밑으로부터의 자본주의라고 할 개인 소기업의 발전에 힘입은 경제성장을 계속해왔다. 이 와중에서 집권한 박근혜는 마음만 먹었다면 전임자의 실패를 교훈 삼아 자신처럼 선조의 후광에 기대는 평양의 새로운 권력자와 건설적 관계의 수립을 시도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 적대적 대북관계로 일관했으며, 대북관계 개선 대신에 과거의 ‘북풍’과 다를 바 없이 이북 문제를 계속해서 국내 정치에 이용해왔다.

정상적 대북 협력관계를 지속해온 노무현은, 거기에 힘입어 미국의 후국 신세를 비록 벗어나지 못했다 해도 그나마 동북아 균형자론 등 미국과 중국 사이의 등거리 외교의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제스처로 중국에 호소라도 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박근혜는 대북대립노선으로 내달리는 이상, 방공식별구역을 둘러싼 지금과 같은 중-미 갈등에서 한반도 주민들의 실질적인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계속해서 미국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으로 일관하여 대륙(중국·러시아 등)으로부터의 소외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박근혜는 대일관계에 있어서는 겉으로는 강경자세를 취함으로써 미·일·한 삼각 동맹에 사실상 올인한다는 사실을 덮으려 하지만, 극도로 편향된 대외정책이라는 것을 과연 감출 수 있겠는가?

박근혜의 국내 정치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대민(對民) 투쟁’이라고 할 만하다. 신자유주의적 의제로 일관하는 것은 김대중이나 노무현과 별 차이 없지만, 그러면서도 노동계에 그때그때 양보도 하고 대화도 진행할 줄 알았던 김·노와 달리 그야말로 소통도 대화도 없는 무식한 탄압일 뿐이다. 역대 정권 중에서는 전교조와 갈등하지 않았던 정권은 없었지만, 박근혜는 전교조를 아예 법외노조로 만들어 대한민국을 산업화된 형식적 민주국가 중의 유일한 교원노조 없는 나라로 만들었다. 전교조와 공무원노조 등 대표적 공공부문 노조에 대한 탄압의 압권은 바로 이번의 철도 파업에 대한 파쇼적이라고 할 정도의 초강경의 대응이었다. 박근혜는 ‘자유민주주의’를 들먹이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파업을 벌이는 노조의 지도부를 무조건 무더기로 구속하지 않는다. 참고로, 박근혜가 영국의 극우 국무총리 대처를 롤모델로 삼는다고 하지만, 대처마저도 1984~1985년의 광업노동자 파업 투쟁을 탄압하면서 그 지도부를 구속한 적은 없었다. 거의 1년 가까이 진행되면서 3명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20세기 후반기의 유럽역사상 가장 치열한 투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박근혜는 과연 ‘자유민주주의’ 의미를 알기나 하는가? 노조에 대한 살인적 배상금 청구, 가압류, 노조원 직위해제와 해고 등이 예사인 대한민국에서마저도 박근혜식 ‘대노(對勞) 전투’는 이미 비상식으로 보일 정도다. 그 수많은 ‘안녕들’ 대자보에서 철도 파업이 자주 언급되는 것은 과연 우연인가?

보수화돼가던 학생층까지 이제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에서 나타나듯이 저항모드로 급거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최악의 대통령이 된 박근혜를 여태까지 밀어준 재벌가 등 이 나라의 실질적 ‘주인’들은 이제라도 그 오류를 반성하여 선후책을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박근혜는 커다란 오판을 한다. 그가 실제로 지향하는 것은 일종의 ‘반쪽 파시즘 사회’인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북한과 연계했다”고 해서 가장 규모가 큰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을 마구 잡아 가두어도 되는 사회이면서도 아직도 물고문과 전기 고문, 그리고 학도호국단과 신문에 대한 보도지침이 없는, 그런 ‘중간적 파시즘’ 사회 말이다. 그러나 파시즘 건설에서 ‘중도’는 없다. 박근혜가 그 부왕(父王)의 말기와 같은 전체적인 파탄을 아예 각오하고 전체적인 유신의 부활로 가지 못하는 이상 초강경 ‘대민 투쟁’은 그저 민중의 커다란 반격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이거야말로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보수화돼가던 학생층까지 이제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에서 나타나듯이 저항모드로 급거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최악의 대통령이 된 박근혜를 여태까지 밀어준 재벌가 등 이 나라의 실질적 ‘주인’들은 이제라도 그 오류를 반성하여 선후책을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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