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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밤
게시물ID : humorstory_36482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JL
추천 : 2
조회수 : 43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2/20 12:13:50

가장 아름다운 밤 The Most Beautiful Night

기사본문 이미지

이라크에서 전사한 남편의 시신과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는 어느 여인

“나는 여러분의 생명을 책임질 수는 없다. 하嗤� 나는 가장 먼저 들어가고 맨 나중에 나올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조국에 돌아갈 것이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영화 에서 무어 중령 역을 맡았던 멜 깁슨이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전장에 배치되기 전에 대대장으로서 부하들에게 한 당부의 뼈都求�.

‘나는 여러분의 생명을 책임질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가장 먼저 들어가고 맨 나중에 나올 것이다.’는 군인으로서의 군인관과 사생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조국에 돌아갈 것이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살아서 자기 발로 돌아가든지 죽더라도 언젠가는 조국에서 자신의 뼈조각이라도 반드시 찾아낼 것이라는 조국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담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 군인들의 충성심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리더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들이 많이 있지만 동서고금을 통 털어서 가장 많이 회자되어 온 표현이 ‘솔선수범’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장교로서 ‘위험한 곳에 가장 먼저 들어가고 맨 나중에 나오겠다’는 의미는 솔선수범과 그 맥락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 세상에는 수십만 가지의 직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경우에 따라 목숨까지 버려야 할 직업은 과연 몇 가지가 될까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성직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방관과 경찰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군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군인을 직업으로 선택한 점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이 교수로서 생도들을 가르치는 일이지만, 만약 전쟁이 일어나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언제든지 달려가 조국을 위해 이 한 목숨을 바칠 각오와 다짐을 매일 아침 중령 계급장에 손을 얹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군인의 길을 선택한 저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군인을 대할 때 ‘나를 대신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던져 가면서 국가의 이익(national interest)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제가 미 해사 교환교수로 근무했을 당시에 출근은 주로 사복으로 하였는데, 가끔씩 근무복 차림으로 출근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주자창에 차를 세우고 20m정도 떨어져 있는 백화점까지 가는데 모자를 벗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주 오던 머리가 백발인 할머니 한 분이 “아니, 복장을 보아하니 장교 같은데 왜 모자를 벗고 다니시오?”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망치로 머리에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할머니로부터 복장 불량으로 지적을 받았던 것입니다. 저는 할머니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앞으로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연구실에 돌아와서 저의 행동을 돌아보며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아하, 미국에서는 군인들을 존경하는 만큼 그에 따른 행동을 요구하고 있구나! 그런 점에서 미국은 건강한 사회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가끔씩 그때 일을 떠올리며 잠시 군인의 신분을 망각했던 저에게 일침을 주신 할머니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저는 무심코 신문기사를 읽다가 사진 한 장을 보고 그만 목에 메이며 가슴 뭉클함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2005년 8월 21일, 이라크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미 해병대 제임스 캐시(James Cathey) 소위가 임무 수행 중 전사하여 그의 아내인 캐서린 캐시(Katherine Cathey)가 남편의 장례식 전날 밤, 남편의 시신이 잠든 관 옆에서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기를 원해서 남편이 생전에 좋아했던 노래 을 노트북을 열어 틀어놓은 채 임신 5개월 된 아들과 함께 관과 나란히 누워 엎드려 잠이든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여러분, 가슴이 찡하지 않습니까? 이 사진은 2006년 퓰리처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사진이 퓰리처상을 받았기 때문에 유명해진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퓰리처상이 이 사진 때문에 더 유명해 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신 옆에는 예복차림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해병대원이 관을 지키며 서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비록 남편이 시신일지라도 차가운 땅속에 묻히기 전날 마지막 밤을 여느 때처럼 같이 보내고 싶어서 매트리스와 이불을 펴고 만삭의 몸으로 남편의 베개를 곁에 두고 누워있습니다.

엎드려 잠든 젊은 아내의 가슴이 저릴 만큼 애틋한 사랑이 일상생활에 지친 저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이를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예복차림의 해병대원을 부동자세로 관 옆에 세워 정중하게 경의를 표하는 미국정부의 배려와 최후의 밤을 남편과 같이 보내고 싶어하는 젊은 아내의 마음이 감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 여인은 마치 남편이 바로 옆에 누워 있는 듯이 함께 지냈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대화를 나누다 잠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꿈속에서 남편과 곧 태어날 아이와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는 아름답고 소박한 모습으로 만났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편지의 제목을 <마지막 밤>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밤>으로 정했습니다.

조국을 위해 전사한 젊은이에 대해 마지막 순간까지 최대한의 예우를 하고 있는 미국정부와 그 옆에서 마지막 밤을 같이 보내고 있는 아내의 사진 한 장이 가슴 뭉클하게 만듭니다.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군인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아낌없이 보내는 사회, 단 하루를 살아도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날이 머지않은 장래에 오겠지요? 아내로서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는 더욱 숙연하게 만듭니다.

나무상자가 너무 차갑지 않으세요?

오리털 담요를 유난히도 좋아했던 당신,

딱딱한 그곳에 눕게 해서 미안해요

모랫길에 아팠던 눈,

나라를 위해 총을 메었던 어깨,

이제 당신은 차가운 시신으로 제 곁에 돌아오셨군요.


밤과 낮 뜨거웠던 사막

어제와 오늘 조국 위한 일념 하나로

살아왔던 당신

이제 비록 시신으로 돌아왔지만

당신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 가정은 안전하고 나의 조국은 굳건히 설 수 있습니다.


밤새워 우리의 사랑을 노래하고 싶어요.

당신의 숨결을 듣고 싶어요.

당신의 영혼이 나를 감싸고 있어요.

숨이 멈출 때까지 당신을 곁에 두고 싶어요.

아무도 당신을 데려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그건 내 욕심이겠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만 생각하나 봐요.


천사들이 안내하는 그 동산으로 먼저 가세요.

기다림에 지친다며 눈물 흘리지 말고

제가 보일 때까지 사과나무를 심어 주세요.

당신이 누워있는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네요.

이 비가 이대로 강물이 되어 당신을 데려가려나 봐요.

행여나 바람이 거칠어지지 않도록 기도드릴게요.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슬픈 미소 보이지 않을게요

지금 이 순간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서서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후손들에게 어떤 나라를 물려주어야 할까요?

오늘 이 모습 이대로는 안 됩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후손들에게 지금보다 더 살기좋은 나라, 건강한 나라를 유산으로 물려주기 위해 내가 오늘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실천에 옮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생도시절 저의 졸업 앨범 한켠에 남겨두었던 프로필 마지막 구절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 이 아침입니다.

“너(해사)와의 만남을 통해 나는 나의 삶을 그냥 그렇게 그럭저럭 살아서는 아니됨을 깨달았다. 나는 나의 삶을 그냥 그렇게 그럭저럭 살아가지는 않으리라!”

<필자소개>

해군중령 조덕현 :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 겸 군사전략학교수 해사40기 / 배정고, 해군사관학교(공학사), 고려대학교 사학과(문학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서양사학과(문학석사),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역사학과(문학박사, 군사사 전공) / 미국 해군사관학교 교환교수(2007. 7~2009. 7)로서 미 해사 생도들에게 미국해군사(American Naval History), 한국사(Korean Hisotory) 강의 / 현재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 겸 군사전략학교수,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역사학과 자문위원, 미국 군사사학회 정회원, 미국 해군사관학교 역사학과 자문위원, 한국서양사학회 정회원

/ 월간조선

퓨리쳐상을 받은 사진중 일부만 발췌했습니다

Katherine Cathey and 2nd Lt. James J. Cathey.

Todd Heisler’s Pulitzer Prize Winning Photographic Series

At the first sight of her husband’s flag-draped casket, Katherine Cathey broke into uncontrollable sobs, finding support in the arms of Major Steve Beck.

When Beck first knocked on her door in Brighton, Colorado, to notify her of her husband’s death, she glared at him, cursed him, and refused to speak to him for more than an hour. Over the next several days, he helped guide her through the grief. By the time they reached the tarmac, she wouldn’t let go.

Two days after she was notified of Jim’s death in Iraq, she found out they would have a boy. Born on December 23, 2005, he was named James Jeffrey Cathey, Jr.

The night before the burial of her husband’s body, Katherine Cathey refused to leave the casket, asking to sleep next to his body for the last time. The Marines made a bed for her, tucking in the sheets below the flag.

Before she fell asleep, she opened her laptop computer and played songs that reminded her of “Cat,” and one of the Marines asked if she wanted them to continue standing watch as she slept.

“I think it would be kind of nice if you kept doing it,”

she said. “I think that’s what he would have wanted.” 그이가 원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James John Regan (who was killed by an IED explosion in Iraq in February 2007) at Arlington National Cemetery, May 27, 2007.

Katherine Cathey with Jimmie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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