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상징 독수리
1920년대 초에 입안된 대영제국을 완전히 파멸시킨다고 작정하고 입안된 작전 War Plan Red는 1930년대가 다가오자 점점 현실화에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1929년에 미국의 주식들을 모조리 휴짓조각으로 만들어버린 대공황이 들이닥친것입니다. 거기에다가 경기는 정부의 개입으로 인해 한번더 꼬여 더 수렁에 빠지기시작하고 국민들의 불안과 소요는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대공황 당시 실업자들 당연지사 국가들끼리의 호전도도 올라가기 시작하고 동시에 당시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타 극단의 이데올로기들이 대세를 타게됩니다. 실제로 민주주의나 이런 평화론적이고 애매한 이념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것처럼 보였습니다. 당시 세계는 사실상 유럽이라고 봐도 무방했는데, 이 유럽에서 유럽의 헌병역할을 자처하던 러시아는 공산주의의 이념에 물들어버렸고 독일및 이탈리아등 유럽 프랑스와 영국과 어깨를 나란히하며 싸우던 유럽의 중요 강대국들에선 파시즘이 점점 대세를 타기시작했으니까 말입니다. 당시 이념의 양극화와 민주주의 존립의 위기. 거기다 여기에 기름을 얹은것은 대공황이 닥치기 2년전 제네바협정에서의 군비경쟁을 제한하기위한 군축조약이였습니다. 여기서 영국은 경전열함을 더 많이 보유하고 있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전함들은 중전함들에겐 의미가 없을정도로 매우 약하였기에 중전함 생산을 중단하는 협정을 맺자고 합니다. 미국 또한 경전함및 중전함을 더욱 생산해야하는판에 이런 협정은 영국에게만 독단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하였지요. 게다가 영국은 각국가들에게 70개의 함대와 60만군대로 병력에 제한을 두자고 제안하는데 이것 때문에 미국의 대표는 협정을 박차고 나가게됩니다. 그뿐아니라 당시 영국의 필요에의한 독트린이란 정책은 "국가방어에 필요한만큼만 해군을 생산하자" 였는데 미국은 "다른 국가에 비례한 해군만큼을 생산해야한다는" 정책을 밀고나갔고 일본또한 기타 열강들의 해군을 따라잡아야하는 입장이라서 일본도 동의하지않음으로써 제네바 협정은 해산되다시피합니다. 1927년 제네바 협정 이런 상황이오자 미국에선 영국이 이틈을 타 다시금 한번 국제패권을 되찾을려는 시도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동시에 이 경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War Plan Red 를 가동시켜 대영제국의 잠재적인 위협성을 완전히 뿌리뽑아버리면서 군수물자의 생산과 함께 경제를 활성화시켜야한다고 미 의회 뿐아니라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조차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영국 조지는거 동의 예산내줌. ㅇㅋ 고마움. 영국놈들 너무 짱자리 오래해처먹었음. War Red Plan의 목적은 영국의 전쟁계획의 목적인 단순한 White Peace 의 평화협상이나 영국을 건들지말라는 정도의 유리한 포지션을 점한다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무려 캐나다및 북대서양, 영연방에서의 모든 영국 육군 세력 말살 및 해군 괴멸 그리고 영본토, 캐나다를 점령및 합병해서 미국의 주로 편입한후 대영제국을 완전히 해산및 멸망 시키는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평화조약에서 점령한땅은 돌려주지 않는다고 계획에 명시해놓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로써 영국의 대공황 당시 식민지들과의 보호무역을하던 무역로들을 모조리 다 끊어버리고 비슷한 문화권이던 영국및 캐나다를 미국의 주로 편입하여 대미국을 건설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원래 아내는 결혼하면 남편성 따르는거임 ㅇㅇㅋ. 크고 알흠다운 신대륙에서 시작하여 겨우 100년만에 상국을 역병탄하려드는 대 아메리카나의 위엄. 기서 약간 의문이 드는점은 왜 영국의 아프리카식민지나 인도연방들은 공격하지 않는가? 인데 이들은 다른문화, 다른 인종 등으로 영국과 이질감과 마찰이 심했고 영국의 억제력이 없으면 사실상 협조할리가 만무했고 독립운동을 겨우겨우 영국입장에서 민족주의의 광풍이 불고있음에도 자립을 막고있던입장이였기때문입니다. 그러니 본국만 무너뜨리면 그들은 알아서 통제에서 풀려나 캐나다나 여타 호주와같은 영연방과 다르게 협조하지않고 독립할께 뻔했으니까요. 인도놈들 꺼져.racist 하나의 미국 단결된 미국. 그뿐아니라 당시 극심했던 인종주의를 생각해보아야할필요가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문화-인종이 흡사한 캐나다와 영국을 편입하고 싶었으며 경제적인 이유에서도 전에 설명했듯이 식민지는 미국입장에서 오히려 손해였지요. 미국은 여기서 설명한바대로 '하나의 미국'으로 재탄생시킬려했기때문입니다. 경제적인이유와 유색인종과 이질적인문화등으로 인한 차별문제, 민족주의 자립문제등을 해결하기 싫은점등 여러가지가 있었지요. 해군성 육군성: 맥아더성님 피쉬앤칩스 간나새끼들 이참에 아예 밀어버리죠. 아 앵글로색슨놈들 스코티쉬의 매운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이 계획을 동의한자들은 미의회,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당시 군부 최고의 직위에있었던 '맥아더' 입니다. 모두들 이 계획을 실시하는데 찬성하였습니다. 즉 이 계획은 의회-대통령(행정부)-군부 모두 의견이 일치한 언제든 시기만 오면 바로 가동될수있는 작전이었습니다. 이 작전은 '가정' 용 유사시 '대비용 계획' 이라기보다는 침략용 전쟁 계획이라고 보는게 더 옳습니다. 1차세계대전의 항공전 영웅 Charles Lindbergh 이 계획이 가동되기 위해서-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지도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기 위해- 미국은 준비작업부터 철저히 다지기 시작합니다. 1931년 미국의 1차세계대전 항공전 영웅이면서 나치즘 동조자였던 Charles Lindbergh가 캐나다 동부-중부에 걸친 허드슨베이로 가서 취약점및 얼마나 방어시설이나 군사들이 강력한지등에 대한 탐색을 펼치고옵니다. 영국에 박살나는 독일. 그리고 이건 전초전에 지나지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1차세계대전때 영국이 초강대국의 지위에 도전하는 독일을 한번 분쇄한것을 직접 목격한 목격자였기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은 대영제국을 아예 지도상에서 없애버리는수준의 대규모 공격을 먼저 감행해야한다고 믿고있었습니다. 미국 나치당의 뉴욕에서의 길거리 시위. 거기에 더하여 당시 영국이 독일과의 악감정으로인해 반나치 감정이었던데에 비해 1930년대 초 뉴욕에선 대규모 나치 동조자 시위가 종종 벌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이념적으로도 크게 비틀어지기 시작하고있었던겁니다. 그리하여 1935년에 미국 역사상 최대의 군사징병과 탄약생산이 이루어집니다. 수십만에 달하는 대육군은 Fort Drum 이란 캐나다와의 국경에서 겨우 30분내지 35분 거리인 미국에서 '가장 거대한' 군사 기지로 집결합니다. 포트 드럼. 캐나다의 국경과 바로 맞붙어있다. 이 거대한 군사기지가 이런 위치에 점해져있었다는것은 미국이 대영제국을 칠준비를 하고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이것을 당시 미국내 고위장성및 의회에서 평하기를 '아포칼립스적(종말론적)' 전쟁이 될수도있다고 평하기까지합니다. 이 기지가 지어지기 시작한 이유와 시점은 1차세계대전 직후입니다. 1918년에 미국 해군성에는 이런 보고서가 올라왔습니다. " 영국은 역사적으로 해상의 지배권을 두고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등과 경쟁하였고 그 네국가는 모두 영국에게 패배를 맛보았다. 현재 미국은 독보적으로 강력하진 않지만 5번째로 영국과 경쟁하게 될 위치에 놓여져있다. 지금 영국의 견제는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역사적인 선례를 보았을때 우리 또한 먼저 영국을 견제할 필요가 있다" 허나 이런 보고서에서 나타나는 미해군의 영국해군에 대한 우려감을 제쳐놓고 엉뚱하게 이 전쟁 계획 입안을 제기한것은 미 육군 측이었습니다. 당시의 미육군은 일본또한 잠재적국으로 여겼으며 이 두국가에 대항하는 계획을 동시에 진행토록합니다. 그리고 이 계획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1930년에 육해군합동본부가 등장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시스템적인 계획은 프러시아의 슐리폔 계획과 같은것에서 가져온것이였습니다. 즉 실행하는 즉시 기계가 짜맞춰돌아가듯 진행이 되야 했습니다. 물론 프러시아의 그것과 다른점은 기본적으로 군부가아니라 행정부 측에서 검토하고 전략을 개정할수있는 여지가 있었다는것입니다. 야 미국이 우리 침략하면 우리 완전 좆망이다. 그니까 게르만분파인 잉글랜드는 우리 나치독일과 동맹맺고 미국을 공격한다. 이 전쟁은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 조차도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능한것은 아니며 상시 대비를 해야할것이다" 라고 말 하였으며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조차도 영국과 미국의 전쟁이 일어날것이라고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히틀러는 영국이 미국을 이기길 바랬는데 그 이유는 영국이 독일과 같이 연합하여 미국을 공격할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이 독일에게 최선의 선택이 될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역시 아돌프 히틀러는 미친놈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여타 열강들의 수뇌부들의 생각은 정확했습니다. 미국의 수뇌부및 여론이 영국에게 느꼈던 바는 영국은 최강국의 지위를 빼았기지 않으려고 계속 전쟁을 일으킬려고 한다고 느꼈고 그리하여 미국은 영국이 바다에 발을 담그는것을 더이상 용납할수 없다고 까지 생각이 미치게됩니다. 당시 War Plan Red 계획도. 블루가 미국 Crimson(진홍)이 캐나다 Red는 그레이트 브리튼 본토. 핑크는 미국의 작전계획에 의미없는 아프리카쪽의 식민지들 (별 전쟁에 의미없다고 생각. 알아서 영국에서 자립하리라 생각함) 호주는 다홍색 뉴질랜드는 석류색, 인도는 루비색으로써 뉴질랜드와 호주는 영국이 무너지고나면 알아서 미국의 위성국화됨으로써 미국의 영향권내에 들어오리라 예측했습니다. 인도의 경우는 간디등의 독립세력이 알아서 자립하게끔 간섭하지 않도록하였습니다. 이로써 미 해군정과 미 육군정에 의해 동의되고 마지막으로 맥아더에 의해 동의받은 이 초대규모 작전은 Crimson(캐나다)와 Red(영국본토)를 접수하는 형태로 계획되어있었습니다. 그이후에는 태평양의 사실상 미국에 전혀 군사적 위협을 가할수없는 세력(호주 뉴질랜드등 영국잔여세력)들을 굴복시켜서 미국의 문화적 경제적 영향권에 편입시킴으로써 미국의 충실한 충복으로 만드는것이 이 계획의 마지막이라고 보시면됩니다. 호주는 편입안하는가? 하면 어차피 호주는 점령하여 주로 삼기에는 너무나 거리도 멀고 기본적으로 당시 미국은 태평양까지 군대를 배치하여 본국처럼 관리하긴 무리가있었기도했고 먹을 전략적 경제적가치도없었습니다. 그리고 영-미-캐나다권과는 약간의 문화 차이도 어느정도 있었지요. 기본적으로 이들은 캐나다 접수는 적어도 1-2일 내에 끝내리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인구는 1억2천-1억4천가량에 육박하고 캐나다인구는 1000만대였기때문에 1/13이란 극악의 인구적 열세뿐아니라 캐나다의 기후특성상 90퍼센트의 인구가 미국국경과 50-60km 거리에 살고있어서 주요거점들을 점령당하는순간 캐나다는 저항할 인구조차도 마땅히 없었습니다. 그것은 워싱턴 포스트가 공개한 한 장교의말에서 잘드러납니다 " 캐나다놈들의 90퍼센트가 미국과 100마일도 안떨어진곳에서 사는데 뭐가 문제인가 국경을넘기만하면 우리가 이기는것이다!" 캐나다 인구 밀집도. 미국측에선 이미 의회에서 이 계획에 5700만 달러란 거액의 예산을 의회에서 군부에게 사용하라고 허가를 내립니다. 이 예산은 캐나다 동부 국경 5대호 지역에 군용 공군기지를 3개 만들고 민간용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비용이었습니다. 즉 미군은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이미 탐색이 끝난 캐나다의 주요 군시설을 공군폭격으로 모조리 장악하고 캐나다의 공군을 무력화 시킬준비를 마치고 있었던겁니다. 그리고 공군에의한 캐나다 주요시설 장악이 끝나면 가장 캐나다 국경과 가까우며 가장 거대한 군사기지인 드럼포트에서 미육군이 할리팍스로 진격하여 로열 네이비 주둔기지를 점령하고 캐나다 점거때 고작 인구 총합 천만의 캐나다에게 무려 육군 "600만"을 한번에 미동부쪽에 동원할 계획이였습니다. 3대 작전. 오퍼레이션 바바로사(독일의 소련 침공계획) 오퍼레이션 바그라티온(소련의 독일 침공계획) 오퍼레이션 다운폴(미국의 대일본제국 몰락계획) 이는 바르바로사의 390만, 바그라티온의 230만 다운폴 100만-150만을 훨씬 상회하는 역사상 듣도보도 못한 초대형 작전이였습니다. 왠만한 중소국의 인구가 모두다 전쟁에 투입되는 수준이였으니까 말입니다.(물론 미국에겐 인구 10퍼센트도 안됩니다) 거기다가 맥아더는 생화학 무기 살포까지 제안하여 수천톤(7-9000톤)의 생화학무기 및 2만-2만 5천대의 전투기가량이 생산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해군은 20대-30대 의 항공모함 생산 및 8-9백 척에 달하는 전열함들을 생산하여 영국 해군과 수송선을 대서양에서 한번 결정적으로 대파해서 끊어버리고 그이후 약화되고 분열된 로열 네이비를 모조리 수장시키는 계획이었습니다. 일본에 핵이 떨어지지 않았을때 일본이 항복을 안하고있을시에 시행됬을 다운폴 작전보다도 훨씬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고 보시면됩니다. 이런 미친작전이 실제로 시행될뻔했습니다. 이 캐나다의 점거 전략은 매우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일단 요약하자면 기본방침은 영국이 캐나다를 전초기지로 사용하는것을 방지하는것이었습니다. 캐나다의 자원,공항,항구 들을 모조리 사용을 못하게 막아버리고 영국의 지원또한 차단하는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일단 첫번째로 말한대로 노바 스코티아 지역의 할리팍스 지역을 최우선적으로 타격한다고 계획을 세웠는데 이 에 동원되는 군대는 35-50만 가량이라고 수뇌부에서 예측했습니다. 미 육군성에서 예상하기에 이것은 1차세계대전 서부전선의 가장 격렬한 전투인 베르됭전투에 비견될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1935년에 이미 미국은 캐나다와의 국경에 상시 35000명가량의 군대를 선제 공격이 가능하게 하기위해 주둔시키고 있었고 펜실베이니아에 후방병력으로 15000명가량을 또 주둔시키고 있었습니다. 이 군대들은 첫번째 점거목표인 노바스코티아의 선봉으로 나설 병력들이였습니다. 그리고 이 작전을 위해서 당시 미국은 사실상 캐나다의 모든정보를 다 파악하고 있었다고 보입니다. 예시를 들면 (1)개괄 캐나다는 2번째로 영연방에서 거대한 산업국이다 온타리오와 퀘벡이 가장 중요한 산업중심지로써의 역할들을 하고있으며 온타리오 퀘벡을 포함한 여타 프로빈스들의 경제력은 이러하다. 온타리오 $1,000,000,000. 퀘벡 650,000,000. 브리티시 콜롬비아 * 146,500,000. 마니토바 91,000,000. 앨버타 55,000,000. 노바 스코티아 53,000,000. 뉴 브룬즈윅 45,000,000. 사스 캐취완 36,000,000.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3,000,000. *유콘 테리토리 또한 포함한다 -49- 캐나다의 주요 산업들(1932) are: 제지 $123,415,492. 전력 117,532,081. 강철 100,561,297. 육류 92,366,137. 밀가루 83,322,099. 낙농 80,395,887. 석유 70,268,265. 제빵 51,244,162. 면화 51,197,628. 출판 50,811,968. 여성용 옷 44,535,823. 자동차 42,885,643. 고무 41,511,556. 양말류 40,997,210. 제재소. 39,438,057. (2) 탄약제조소. (a) 공군. 밑은 육대 캐나다 공군 납품 회사들이다. Canadian-Vickers...............퀘벡 몬트리올 De Haviland....................온타리오 토론토 Curtis Reid....................퀘벡 카터빌 Fairchild......................퀘벡 롱귀엘 Boeing.........................브리티쉬콜롬비아 벤쿠버 Ottawa Car Mfg. Co.............퀘벡 오타와 에어로 엔진은 세개의 회사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암스트롱 시들리 모터스 코퍼레이션 퀘벡 에어로 캐나다 엔진 ,몬트리올 퀘벡 프랫 휘트니 공군 제조사 ,롱귀엘 퀘벡 그리하여 이 Crimson(진홍) 계획은 대략 5가지로 나뉩니다. 동부 -> 중부 -> 초원지역 -> 서부 이런식으로 캐나다 전역을 최소 일 최대 2일 내에 모조리 점령한다는 계획입니다. 고위 장성들은 하루내에 완전히 제압가능할거라 예측하였습니다. 2부로 계속 출처 - 다음 유로파 카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