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대영제국의 영토와 대영제국의 태평양및 대서양 제도들이
미국에게 침공당할수도 있다고 시사한 광고들중 하나입니다.
1920 년대 1차세계대전 직후 신흥 초강대국 미국과 이빨은 빠졌지만
아직 사자로써의 위엄은 건재하던 대영제국 이 두국가들이 세계에서 가장 큰 파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힘의 균형이 어느정도 이 두국가들에 의해서 어느정도 맞춰지고 있었습니다.
1920년대 뉴욕과 함께 양대 문화의 중심지 파리.
영국의 친미정책으로 1차세계대전 이후 바야흐로 평화의 시대가 올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미국과 영국사이에는 국제적인 무역에 관한 갈등이 상당히 있었던데다
옜날 1812년전쟁에서의 케케묵은 감정이라든가 수많은 아일랜드 이민자들등 이 온존했기때문에
미국은 영국을 좋게 보지않던차였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미국의 가장큰 잠재적국이 될수있었다고 생각했기때문이지요.
물론 가상적국이나 잠재적국에 대한 대비해놓는 전쟁 계획들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짜놓습니다.
한국만하더라도 미국, 일본, 러시아등까지도 계획을 짜놓지요.
하지만 대부분 이것들은 거의 국가 멸망위기에까지 몰리는
극단적인상황일때나 발동되는 계획이거나 또는 방어적이거나 소규모공세 견제 등의 계획이 다수입니다.
즉 수비적인 계획들이지요.
당시 미국에선 Color Coded Plans 라고 하여 각 국가들마다 상징적인 색깔을 넣어 전쟁이날시
그 국가들에 대처하여 압박적인 공세를넣거나 수비를한다고 전쟁 계획안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상정한 주요위협국가들의 계획을 살펴보면
War Plan Black ( 독일이 프랑스를 패배시키고 점령하였을때) 에서는 캐리비안해로
독일군이 넘어와서 미국의 위협이되는걸 미해군으로 독일해군이 대서양을 넘어올시
박살내는것으로 방지한다정도이고 심지어 태평양에서 해군으로 위협이 될수있었던 일본의경우도
War Plan Orange 에서
일본의 해상 식민지 (대만)의 항구들을 일시점령 또는
봉쇄하여 본국과 차단시키고
일본 본토에 해상봉쇄를 가함으로써 패배를 시인케하고 배상금을 받아낸다 정도입니다.
심지어 멕시코에 대비한 전쟁 계획인 War Plan Green을 보면
이미 전쟁경험이 있었던 멕시코조차도 멕시코에 반미정부가들어서면
멕시코의 항구와 수도를 장악하여 친미정부를세우는것,
아주 만약에 프랑스와 전쟁을 붙게되면 War Plan Gold 가 발동하여
프랑스령 캐리비안 제도들을 장악한다 정도입니다.
즉 소규모 해상전투 및 자국 방어등이 보통 최대이고
그외 사실상 '위협 가능성이없는' 가상적국들에 대한 계획들은(War Plan Silver:이탈리아, War Plan Brown: 인도네시아지역) 등은 사실상 가능성이 없었고
이 계획에서는 무역로를 끊고 해상적인 압박을 취하여 교섭을 받아낸다 정도에 그칩니다.
러시아의 경우 미국에서 보았을때 해상적 위협이 전혀 안된다생각하여
War Plan Pink 라고 계획은 세워놓았지만 구체적이지않았고
어느지점에서 방어를 한다정도의 대략적인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들과는 다르게 War Plan Red는 매우 구체적이였으며 사실상 일어날뻔한 계획이었습니다.
1918년 1차대전 이전 19세기부터 가끔씩 캐나다와
미국사이의 국경분쟁으로 마찰이 몇번있어왔지만 영국이 캐나다보다
미국에 손을들어주는등 크게 문제없이 넘어갔습니다.
우드로 윌슨
영국에 의해서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는 미국을 풍자.
하지만 1차세계대전 종전당시 독일이란 가상적국 위협이 당시엔 사라진듯이 보였고
우드로 윌슨과 미국 외무부의 미숙한 외교력때문에 미국측은 노련하고
오래된 영국의 축적된 외교기술에의해 끌려다닌데다, 영국이 유리한쪽으로 요구를 들어주는 꼴이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더하여 영국에게 빚까지 30억달러가량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게되면서 지게됨으로써
국민적으로도 정부적으로도 반감이 상당하였습니다.
1차세계대전 최대 지원국중 하나인 미국이 얻은거라곤 유럽열강들에게
어느정도 외교적으로 비슷한 포지션으로 인정받았다는것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영국은 미국이 보기에 지금과같은 동맹이라기보다는 잠시간의 조력자에 불과했던 존재였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상황이 겹치고 세계패권을 다투게 될수있다고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자 미국은 대영제국에 대해 전면전까지 불사할수있다고
작정하고 전쟁계획을 입안하기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영국은 어떤 대비를 갖추고 있었을까요?
영국수뇌부측은 그다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들은 매우 낙관적이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당시 대영제국의 R.N(로열 네이비) 해군성 장관이란 Earl Betty란 작자는
무려 "미국은 우리 대영제국의 혈맹이다" 라고 공언할정도였으니까 말입니다.
1차대전 이후에야 대영제국은 약간 미국에 대한 경계심을가지고
우리의 라이벌이 될수도 있고 가상적국의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1924년에 미국의 외교적 입지가 좀더 단단해지고 보다
더 위협이됨으로써 중국 홍콩에 나가있던 R.N 해군 중장 Arthur Leveson은
미국에 대항하기위하여 일본과의 동맹을 맺는 영일 동맹을 수립해야한다고
영국정부에 건의하기까지합니다.(20년후에 무슨일이일어나는지 아는 현재의 우리로썬 웃기지만말입니다.)
영일동맹 풍자.jpg
1927년으로 가면 미국과 영국과의 conflict 가 절정에 가까워진다는것을 보여주는 한 기록이 있습니다.
영국대사 Sir Esme Howard와 미국의 상무장관 후버 사이에는 흥미로운 대화가 오고갔는데
"캐나다가 중립을 선언하면 미국의 공격계획은 브리튼 본토와 캐나다의 대서양무역을 중단시키는 정도로 멈출것이다"
라고 말하고
하워드 또한 "우리도 그렇다 양대 함국결전은 서로에게 상당한 피해만될뿐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미국의 말은 다 "거짓" 이었습니다. 영국은 상당히 솔직하게 털어놓았지만 말이지만말입니다.
이미 상당한 전쟁의 조짐이 보이던 이시기 1년 이후 영국 육군을 만약을 대비하여
캐나다지원용으로 2만명가량 보내놓습니다.
당시 브리튼 하이랜더 육군들의 규모는 20만-30만대였던걸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파견한셈입니다.
그리고 다시 주제로 돌아가자면 영국이 가장중요하게 여기던 관건은
유사시 어떻게 미국을 상대로 하여 자국과 식민지의 최대한 피해를 줄이면서
미국에게 중요한 승리를 거두어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느냐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가장 쉽고 간단한 수단은 로열 네이비를 이용한
해상봉쇄및 선박나포등 경제적압박을 통한거였습니다.
(지금 미국이 악의축 국가들에 대해서 사용하는것처럼)
그러나 영국측에서도 이방법은 자급자족이가능하고 내수시장이 활발한 미국에게는
큰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는걸 알고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생각하기엔 이 방법이 미국내 반전여론에 탄력을줘
미국측을 협상테이블로끌어낼수 있을거라고 믿고있엇습니다.
그러나 영국에겐 미국보다 훨씬 큰 디스어밴티지를 안고 가야했습니다.
영국은 섬나라의 그리고 식민지를잇는 제국의 심장부의 특성상
해상장악과 해상을통한 무역이 어떤것보다 우선시되어야 했고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러니 대서양에서만서라도 미국이 힘을쓰게된다면 영국은 아사하게 될판이었죠.
당시 영국의 목재의 60-70 퍼 가량은 캐나다에서 수입되는정도였으니까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영국은 미국에 공세적으로 나아가 미국이
대서양을 장악하지 못하게 하는걸 최우선 목표로 해야 했습니다.
캐리비언 해, 유럽, 미국 중심에 위치한 서반구의 전략적 요충지: 버뮤다섬.
그에 따라서 서반구에 영국해군을 집결시킬필요가 있게되었습니다.
미해군의 발을 묶어두기에 서반구에서 가장 적합한 위치는 버뮤다 지역이였는데,
버뮤다는 대서양지역의 해로의 중심지로써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버뮤다는 드레드노트급같은 대형군함으로써는 공격하기 힘든지역으로써 지리적으로써도
미국함대에게 이점을 가질수있던 위치였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미국함대가 멍청하게도 버뮤다를 봉쇄하고 공격한다면
항공기와 잠수함 함대의 공격으로 미국의 함대를 간단히 무력화시킬수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가장큰 의문이 생깁니다.
왜 영국은 캐나다및 영연방들과 합세하여 미본토에 대한 직접적 타격을하지않으려했던것인가?
2편에서 이해가 쉽게 당시 국가들의 국력을 설명하면서 같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 다음 유로파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