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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핥기 로마사(23) - 유스티니아누스
게시물ID : history_47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악진
추천 : 4
조회수 : 230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06/15 18:13:23
가운데 후광이 그려진 인물이 유스티니아누스. 1. 물려받은 상황 유스티니아누스는 오늘날의 세르비아 지역 출신으로서, 황제인 삼촌을 도와 중앙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삼촌의 통치 말년을 사실상 대리통치하였고, 삼촌의 제위를 계승했다. 즉위하기 전 만난 테오도라와 결혼을 한 것은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다. 테오도라가 비천한 가문 출신인 점은 이견이 없는 지점이고, 창녀 출신이었으며 이미 한 번의 첩결혼이 파탄난 상황이었다는 것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도 제위의 유력계승자는 테오도라와의 결혼을 법까지 개정하면서 강행했고, 테오도라는 황후로서 동서 로마사 통틀어 최고의 여걸이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황후 테오도라. 그녀는 첫번째 첩결혼이 파탄난 후 알렉산드리아에서 극적인 종교체험을 하고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 때 그녀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동방의 단성론 기독교였고, 훗날 황후가 되었을 때에 단성론자들을 비호했다. 2. 정복사업 명장 벨리사리우스. 그의 군사적 업적은 초한쟁패의 한신, 원명교체기의 서달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다. 젊은 시절부터 평생 지중해세계 곳곳을 동분서주하며 싸웠다. 527년 즉위한 유스티니아누스는 영토 수복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고, 대부분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로마의 과거의 영광이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도 비잔틴 측은 영토를 전혀 잃지 않았다. 비록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거액을 지불해야 했지만, 조약 자체는 비잔틴 측에 유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평화조약으로 인해 페르시아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자 영토수복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희대의 명장 벨리사리우스를 기용하여 약화된 로마군을 다시 강화시켰고, 벨리사리우스는 아프리카를 반달족으로부터 되찾았다. 554년에는 벨리사리우스가 로마에서 동고트족을 완전히 몰아냈고, 이로 인해 이탈리아는 다시 로마의 땅이 되었다. 아.....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게르만의 틈바구니에서조차 명맥을 유지하던 로마는 비잔틴 군대에 의해 황폐화되었다. 이런 점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의 영토수복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에스파냐에는 속주가 세워졌고 비잔틴 해군이 서부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100여년간 이 곳은 비잔틴 제국의 바다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수복한 지역까지 포함한다면, 리즈시절의 영토 대부분이 수복되었다. 수복하지 못한 것은 브리타니아와 갈리아 뿐이다. 3. 정복의 뒷이야기 하지만 광대한 영토를 수복한 상황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6세기 말 이탈리아는 롬바르디아족에게 넘어갔다. 동유럽에서도 야만족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실은 유스티니아누스 당시에도 게르만들을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다. 게르만의 뒷꽁무니를 따라오던 슬라브가 동유럽에 등장하자, 비잔틴은 슬라브에 묶여서 엄청난 압박을 받게 된다. 게르만/슬라브류의 야만인들은 문명화된 로마의 부를 1번이라도 맛보게 되면 절대 그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자마자 불가르족이 트라키아를 점령했다. 오늘날의 불가리아 말이다. 게다가 7세기에는 이슬람이 등장했고, 그들에게 팔레스타인과 아프리카, 이집트를 넘겨주게 된다. 4. 유스티니아누스의 업적 -외교술 : 유스티니아누스의 정복에는 교묘한 외교술의 존재도 한 몫했다. 이이제이 전략/공물을 하사하는 수법/칭호를 부여해서 매수하는 법/기독교로 개종시키고는 대부가 되어주면서 유대관계를 맺는 법 등이 동원되었는데, 이런 외교술은 후대의 황제들에게도 유용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코카서스를 개종시키지 못했다면 동로마는 멸망했을 것이다. 크리미아의 고트족 역시 위협적인 존재였지만 동로마와 동맹관계가 되었다. -소피아 대성당 : 즉위 초기 콘스탄티노플에서 반란이 일어난 적이 있는데, 이 때 콘스탄티노플이 크게 파괴되었다. 소피아 성당도 파괴되어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를 재건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대는 동로마제국이 매우 부강했기 때문에 성소피아 대성당을 필두로 하여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베이루트 등에 수많은 공공건물, 교회, 목욕장이 건설되었다. 성 소피아 대성당. 유스티니아누스는 재건된 이 성당을 보면서 자신감이 폭발하여 "아아!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능가했도다!"라는 말을 남겼다. 투르크에게 이스탄불이 넘어간 이후 이 성당은 이슬람 사원이 되었다. -로마법 대전 : 유스티니아누스의 최대치적은 뭐니뭐니해도 로마법 대전이다. 고전시대 이래 1000년간 축적된 로마법을 정리하여 4부로 이루어진 <로마법 대전>이 발행되었다. 이는 가히 인류사의 쾌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문명의 정수이다. 우리가 흔히 로마법이라고 부르는 법체제가 이 때에 확립되었다. <로마법 대전>은 수백년간 유럽 문명에 영향을 미치면서 근대국가법의 모태가 되었다. 평가 사람들은 유스티니아누스를 실패한 인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의 업적 중 상당수가 사후에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황제로서 당시의 사회가 요구했던 거의 모든 것을 달성하였다. 당대의 사람들이 군주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실천한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제국의 영토와 세력이 급격하게 위축되었음에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로마를 재통합하고 과거의 영토를 수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활발한 정복사업은 일시적인 성공에 불과했지만, 당대인들은 로마제국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찬란한 업적에 비해서 유스티니아누스 개인에 대한 찬사는 (다른 유명 황제에 비해)부각되지 않는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인간적인 매력은 없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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