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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중국의 경제 발전 - 그리고 자본주의 맹아론 (4) 5 영국의 산업혁명 산업혁명이란 주제는 역사학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며 그만큼 연구 성과 또한 엄청나게 많습니다. 따라서 영국의 산업혁명이란 과정을 고작 글 몇 줄로 정리하기에는 난감한 구석이 많으나 간략하게나마 도식화하여 말해 보겠습니다(그만큼 이설도 많으므로 여기선 제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가장 합당하다 생각되는 이론으로 말하겠습니다;)
보통 영국의 산업혁명을 설명할때 산업혁명에 선행하거나 동시에 진행된 4가지 소혁명을 언급합니다. 상업혁명, 농업혁명, 운송혁명, 그리고 에너지-기술 혁명. 유럽에 있어 상업혁명은 16세기 신대륙 발견과 약탈로 본격적인 궤도에 오릅니다. 물론 중세에도 중세 전기의 고립, 분산적인 자연경제에서 서서히 대규모 개간과 인구증가로 인한 상업의 발달이 일어납니다만, '자본주의 세계체제'라고 할만한 것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신대륙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유럽은 타 대륙과 교역할 만한 상품이 매우 부족한 형편이었으니까요 ㅡ,.ㅡ; 조방적으로 경작되는 밀은 그리 생산성이 좋지 못하고 유럽 내부의 교역에서만 통용되었습니다. 직물 생산 역시 인도나 중국과 같은 수공업 강국에 비하면 기술력이나 가격 경쟁력이 신통치 못하고 무엇보다 원료 재배에 불리한 환경이었죠. 그나마 금속 가공품이나 무기류등이 매매할 만하지만 이는 시장규모가 그리 크지 못합니다. 따라서 16세기 이후 유럽이 인도양-중국 교역권과 교역하기 위해선 '실탄' 즉 현금으로 통용되는 금과 은등 귀금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신대륙의 풍부한 귀금속이 유럽 상업에 '실탄'으로 작용했습니다. 실제로 17세기~18세기 아메리카에서 생산된 은이 총 11만 3000톤 가량이었는데, 이 가운데 유럽으로 향한 것이 약 8만톤 가량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은중 중국으로 향한 은이 약 3만 9000~4만 1000톤으로 추정되며, 유럽으로 향하지 않고 필리핀의 아카풀코로 향한 나머지 은중 약 1만~2만톤 가량이 중국으로 직행했습니다. 근세 동아시아 무역에서 중국은 은의 수채구멍이었고, 반대로 인도는 금이 활발하게 유입되는 장소였죠. 더군다나 신대륙의 식민화는 상업 자본주의 발전에 다른 중요한 요소를 제공했습니다. 유럽 본토의 부족한 생산성을 대체하여 대규모 플렌테이션의 조성으로 '상품작물'의 대량생산이 가능했던 것이죠. 유럽 본토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흑인과 인디오의 강제 노역 역시 싼 가격에 이러한 상품작물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러한 상품작물의 생산과 귀금속의 유입으로 원거리 해상교역이 강화되었는데, 영국의 경우 '대서양 삼각무역'이란 방식으로 많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고, 유효수효 또한 증가했습니다. 한편 원래 봉건적 전통이 약하고 절대 왕권의 성장 또한 미약했던 영국은 이러한 신흥 자본가들이 정치적인 발언력을 얻게 되고, 지주 계급과 함께 적극적으로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 그들에게 유리한 법령을 제정할 수 있었죠. 따라서 자유로운 상업활동과 자본의 축적에 유리한 방향으로 사회구조가 변화되었고, 근대적인 금융 제도의 성립 역시 이러한 경향에 영향을 받아, 더욱 더 자본축적에 유리하게 된 것이죠. 즉 신대륙 발견과 그 수탈은 유럽 본토에 귀금속의 유입을 가능케 하였고 이로 인해 상업 자본주의가 활성화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로 인해 자극받은 원거리 무역의 발전은 그만큼 유효 수효와 자본축적을 창출하였고 각 국의 지배층 역시 세원 획득을 위해 이들 상인 계급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농업 혁명은 흑사병으로 인해 감소한 유럽의 인구가 다시 회복되는 16~18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인구 회복에 의한 인구압의 증가가 생산력 향상을 위한 동기부여가 되었는데, '농업의 자본주의적 경영' 형태가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지는 곳 역시 영국이었습니다. 영국에서 농업의 개량은 17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18세기에 들어서선 다양한 기술개량과 경영의 합리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말이 끄는 파종기와 제초기가 사용되고 네덜란드에서 순무재배를 도입(지력을 향상시키는 사료작물임), 사료작물로 재배하였으며 질소고정식물인 클로버를 재배하여 이 역시 사료로 이용하였습니다. 사료작물, 클로버의 재배는 가축의 수량을 증가시키고 이들의 배설물은 다시 비료로 이용되어 토지 면적당 작물 생산량을 증가시키는데 기여한 것이죠. 이로 인해 영국의 농업 경영은 종래의 3윤작 시스템에서 4윤작 시스템으로 바뀌었고 이와 동시에 2차 인클로져가 진행되었습니다. 즉 투입시간 대비 작물 생산량이 늘어나 '경영의 합리화'가 가능해지고 이로 인해 종래의 소농가는 몰락, 지주의 토지 확대가 일어났습니다. 또 종래 촌락 공동체의 공유지등이 이들 지주의 사유지로 전환되기도 하는 등 전반적으로 소농의 토지 유리가 일어났죠. 이렇게 몰락한 소농은 도시로 유입되어 빈민층이 되어 이후 산업화의 진전에 필요한 노동자 계층으로 변합니다. 더군다나 이런 농업 혁명은 인구의 급격한 증가를 가능하게 하였고 이렇게 증가한 인구는 내수경제의 확대를 불러 일으켜, 초기 산업혁명의 대량 생산물을 소비할 수 있는 시장의 확대로 이어졌습니다. 즉 구매력의 상승으로 인해 공급량의 확대가 가능했던 것이죠(물론 식민지 개척으로 인한 해외 시장의 확대란 측면도 있습니다) 운송 혁명은 도로의 보수와 운하의 개설로 나타납니다. 특히 운하의 개설은 철도 붐이 일어난 1830년대 이전의 산업화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하였죠. 석탄과 철광석등의 화물은 무게 대비 가격이 너무 싼 상품이라 종래의 육상교통으론 운송비가 지나치게 올라가는데, 기존의 하천 수운을 운하 건설로 연결하자 공업 중심지에 싼 운임으로 연료와 재료가 공급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기계 생산으로 만들어진 대량 생산 제품의 판매에도 이들 운하등이 사용되어 운송료 하락을 초래, 이는 곧 가격 경쟁력의 상승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마지막, 상업 혁명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에너지-기술 혁명입니다. 종래의 수력-인력-축력 등의 에너지원에서 석탄 에너지로의 전환이 일어났고 석탄 에너지의 사용으로 대규모 기계의 이용이 가능, 대량 생산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영국에서 석탄을 이용한 증기에너지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기계는 1779년 크럼프턴의 '뮬 방적기'로 이전의 수력 방적기를 대체하는 기계였죠. 더군다나 이러한 기계의 이용은 철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키고 제철업의 성장은 연료인 석탄의 채굴과 개발을 더욱 증진시키는 선순환 구조를 형성하였습니다. 기계공업이 발전하자 기술력의 개발 역시 급상승 하여 1830년대 철도의 건설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중공업 시대가 시작된 것이죠. 이는 다시 19세기 중반의 2차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데, 혹자는 1차 산업혁명, 즉 방직업의 기계화와 초기 증기 기관의 사용은 엄밀히 말해 '혁명'이라 할 수 없고, 기술과 과학의 결합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2차 산업혁명이 진정한 산업혁명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지만,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 붐이 188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2차 산업혁명의 파급력과 진행속도는 가히 엄청난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영국은 이런 4대 소혁명으로 대표되는 산업구조의 변화를 겪었고, 이것을 종합하여 산업혁명이란 인류사의 대변환을 이끌어낼 수 있었죠. 신대륙의 개척으로 인한 귀금속의 유입과 상품 작물의 유통으로 인한 원양 무역의 발전이 상인 자본주의를 형성하게 하여 앞으로의 산업 자본주의를 예비할 수 있었으며, 농업 혁명으로 대규모 노동력을 부양할 농업 생산력의 증가, 그리고 국내 수요의 상승을 통해 대량 생산에 필요한 대량 수요를 양출할 수 있었고, 운송혁명을 통해 에너지 혁명에 필요한 운임의 하락을 도왔으며, 결정적인 기술의 혁신은 에너지-기계 혁명을 통해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원거리 무역의 발전, 그리고 유럽 각 국의 치열한 패권 경쟁은 필연적으로 군사기술의 발전을 초래했는데, 이는 동아시아의 외교구조와 사뭇 달랐습니다. 고만고만한 능력의 국가들이 대등하게 모인 유럽의 국제질서와 달리, 절대적인 힘을 가진 중국과, 간혹 이 중국을 정복한 북아시아 유목국가의 갈등은 지속적인 군사 기술 발전을 담보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육군 기술이 아닌 해군력에 있어선 해양진출에 무관심해 근세 유럽의 해군력 발전을 따라잡기 더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은 영국의 사례와 비교하면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요? 중국의 경우 송의 상업혁명으로 상인 자본주의가 완만하게 발전합니다. 하지만 이는 서유럽의 경우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적극적인 해외 진출로 진화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중국 자체가 유럽 전체와 맞먹는, 아니 생산성으로 따지면 현저하게 큰 '하나의' 시장이었기 때문이죠. 중국의 통일 왕조는 이러한 이점을 제공했습니다. 유럽 국가간 상업이 각 국가간의 관세나 자국 산업의 보호라는 벽이 있었던 반면, 중국은 대부분의 기간 그 넓은 영토를 통일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이에 힘입어 송대에 들어선 전국적인 시장이 확고하게 들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중국은 강남, 이후엔 사천, 그 뒤엔 운남과 귀주등 청대에 이르기까지 '한화'되지 않은 '내부 식민지'가 많았는데, 이 역시 해외 진출의 동기 부여를 가로막는 일이 되었습니다. 유럽의 해외진출은 본토의 '부족한 생산성'으로 인해 아시아산 상품 작물, 사치품들을 교역할 수 없었던 '절박한' 동기로 촉발된 것인 반면, 그 아시아산 '상품'의 중심적 생산지였던 중국은 딱히 해외 식민지 개척의 동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해군력이 좃망한 것임 ㅡ,.ㅡ;;_) 운송혁명에선 영국과 같은 전국적인 수로망이 형성되진 않았지만, 황하와 장강, 회하 같은 거대한 강과, 이들을 연결한 대운하의 존재는 충분히 전국적 시장망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농업혁명에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송, 원, 명, 청을 통해 지속적인 단위면적당 생산량의 확대가 있었지만 이는 영국의 '경영 합리화'와 달리, 노동집약적인 방향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이는 아마 조방적인 농경의 '밀'과 노동집약적 작물인 '쌀'의 차이로 인해 벌어진 것이겠지요. 하지만 중국의 급격한 인구증가는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대규모 잉여 노동력을 낳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대규모' 인구 증가가 '에너지-기계 혁명'을 가로막는 주 원인이 된 듯 합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청대의 중국 수공업은 수천~수만의 대규모 노동 조직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인력이 풍부했는데, 이로 인해 초기 기계공업의 발전 동기가 부족했던 것이죠. 사실 영국의 직물업에서 시작된 기계공업은 딱히 질 좋은 상품을 낳진 못했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의아하겠지만, 19세기 초기까지도 기계에서 생산한 상품은 수공업 제품보다 낮은 질의 상품이었죠. 더군다나 광범위하게 가내 수공업이 발전한 중국에선 농가 부업으로 만들어진 저가의 면직물이 보편화되어, '자본투자는 많이 들지만 정작 상품은 저질인' 초기 기계공업에의 투자를 꺼리게 된 것이죠. 이와 같은 이유로 중국은 스미스형 발전, 즉 잉여노동력의 대규모 조직과 분업화, 전문화의 방향으로 나아갔고, 이는 인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이 본격화 되기 전, 인도 면직업은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으나 기계 공업의 발전과 영국의 식민지배정책으로 인도의 수공업이 파탄이 난 것도 이러한 노동집약적 산업이 결국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을 따라잡지 못한 결과를 보여준 것이죠. 이상 명, 청시대 중국의 산업화와 근대 산업혁명에의 실패를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의욕에 비해 너무 엉성한 작품을 만들어 걱정이 드는군요. 여하간 이 글을 통해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주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1. 과거인의 합리성에 대한 존중 일전의 중국사 논쟁에서 부수적으로 나온 이야기지만, 역사학의 '법칙' 중 하나는 현재의 시선으로만 재단하면 과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입니다. 즉 당대인의 선택을 가장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인 역시 자기가 주어진 상황에 '나름'의 합리적 대처를 했다고 보는 것이죠. 사실 인간의 씨앗이야 동일한데, 서양인이 천재라서 산업혁명에서 성공하고 동양인은 바보라서 실패했다, 라는 해석이 그럴듯 하겠습니까?
2. 과연 유교가 산업혁명의 발전을 막았나? 앞의 논설과 연결되는 부분인데, 저는 아날 학파를 지지하는 쪽이라 주로 역사를 구조적인 면으로 봅니다. 물론 현대의 신문화사의 성과도 적극 수용해야 겠지만요. 그런 면에서 근본적으로 '하부구조의 영향력은 상부구조보다 크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과연 유교가 조선의 산업화를 가로 막은 것일까요? 하지만 중국의 경우처럼, 사회가 변하면 사상은 거기에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18세기까지 별로 중요치 않았던 계몽사상의 비중이 점차 커진 것은, 계몽사상이 사회를 바꾼 탓일까요, 아니면 사회가 그에 맞게 변화하여 계몽사상을 지원한 것일까요? 참고로 조선의 상업이 상대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던 것은(물론 조선후기엔 상당히 발전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일단 동아시아 국제 교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던 현실에 상당부분 기인한다고 봅니다. 동아시아의 경제구조 역시 '정치'의 영역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데, 가장 거대하고 생산성 높은 중국이란 시장에 '먹힐 수 있는' 즉 비교 우위를 가진 상품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남아시아 제국가는 '향신료'라는 열대성 작물을 주요 상품으로 할 수 있었고, 일본은 16~17세기 세계 은 생산량의 1/3을 담당하는, 주요 은 수출국가였습니다. 따라서 일본 역시 중국과의 교역에 활발히 참여할 '실탄'을 얻게 된 것이죠. 반면 조선은 중국과 유사한 산업구조를 지녔는데, 이는 바꿔 말하면 비교우위를 가진 상품이 딱히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삼이 예외입니다만 이는 시장규모가 그리 크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조선 후기 일본과의 중계무역으로 상당한 이득을 챙겼지만, 독자적인 상품을 통해 대규모 무역을 행하지는 못한 점이 조선 상업의 한계였죠.(혹은 제가 인삼 교역규모를 잘 몰라서 그런 것인지도;; 한국사 고수분들 헬프;;;) 결국 조선의 상업화가 진전이 더디었던 것, 그리고 성리학이 중국에서보다 비교적 오래동안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은 대외교역망에 적극적으로 참여치 못한 경제적 현실, 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상은 하부구조를 따라가니까요.(성리학은 중소지주 위주의 농업사회에 적합한 사상이죠)
3. 중국사의 순환구조 결론에서 요약할 내용은 아니지만, 뒤늦게 생각나서 끼워넣습니다. 중국사는 소위 '나선형' 발전구조를 보이는데, 즉 시대를 거듭하며 중앙정부의 통제력의 집중과 이완을 보이며 이로인한 분열과 재통일의 과정을 통해 점차 발전하는 역사구조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중국인들의 초기 역사 역시 '응집력' 즉 인민의 '조직'이란 점에서 만점짜리 문명이었단 것이죠;; 중국에서 발굴되는 고대 유적을 보면, 아주 이른 시기, 청동기가 발견되지 않아도 대규모 궁성터가 발견되는 유적들이 많습니다. 이는 청동기로 대표되는 기술 발전 이전에, 대규모 사회조직의 형성이 선행한다는 이야기죠. 또 은의 영향력의 범위가 고대국가로는 이례적일 정도로 방대한데, 직접지배가 아니더라도 상당한 수준의 통치질서가 형성되었다는 방증입니다.(재미있는 것은, 은대의 석제 농기구는 후대 철제 농기구와 거의 유사한 모양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이미 '기능'적으로 완벽한 진화를 했다는 이야기죠;;;;; 중국사에서 농업이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을 미리 짐작하게 합니다;;) 즉 중국사에서 이러한 '인민의 조직'이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중국의 환경과 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런 환경의 끈질긴 구속은 근세, 아니 현대에도 남아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중국 근대사의 비극은 사실 중앙 권력의 '이완기'였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청의 통치력이 이완되는 시점에서 이제 막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과 유럽의 침입이 있었고, 청조는 이를 한편으로 이용하여 자신의 붕괴를 막아, 개혁적 성향의 세력이 완벽하게 중앙권력을 차지할 수 없게 만들었죠. 이점을 생각하면 재밌는 이야기거리가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부족한 글을 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