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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 경제사' 신라의 녹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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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Lemonade
추천 : 3
조회수 : 192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6/14 21:04:54
지난 글 : '한국 고대 경제사' 신라 촌락 문서의 작성 연대와 용도 1. 머리말 이제까지 녹읍의 계통은 주로 관료전(=職田)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검토되어 왔다. 그 견해는 크게 둘로 나뉜다. 먼저 녹읍과 관료전을 동일한 계통으로 파악한 주장이다. 이 견해는 하타다에 의해 처음 주장되었는데, 그 후 북한의 강진철에 의해 더욱 보강되었다. 이에 대립되는 견해로서 녹읍과 관료전이 서로 다른 계통의 보수였다는 주장도 있다. 이 설에 따르면 녹읍은 오히려 세조·월봉과 같은 계통의 보수였다고 한다. 이를 처음 주장한 연구자는 김철준이다. 그리고 요시다·기무라·다케다·노태돈·김기흥 등이 이에 공감을 표했다. 한편 녹읍의 경영은 그곳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수취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중심으로 검토되었다. 이에 대한 견해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첫째, 녹읍에서는 수조(收租) 뿐 아니라 공부(貢賦)·역역까지 징수할 수 있었다는 김철준·강진철·노태돈의 주장이다. 둘째, 녹읍에서는 수조를 제외한 역역·병역 및 공부 등을 수취하고, 아울러 우마 등을 사육시킬 수 있었다는 기무라와 다케다의 주장이다. 셋째, 녹읍에서는 원칙적으로 수조권만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홍승기·김용섭·이경식 등의 주장이다. 그리고 김기흥도 757년(경덕왕16)에 부활한 이른바 '후기녹읍'의 경우에 녹읍주의 수취는 전조(田租)에 머물렀다고 언급하였다. 이처럼 녹읍에 대해서는 아직 해명할 부분이 남아 있다. 이하에서는 그에 대해 상론하겠다. 2. 녹읍의 계통-관료들의 보수체계와 관련하여- 687년(신문왕7) 관료전을 차등 있게 지급하라는 조치가 내려지고, 2년 뒤인 689년(신문왕9)에는 녹읍을 혁파하고 세조(歲租)로 이를 대신케 하였다. 만일 녹읍과 관료전이 서로 대치될 수 있는 성격이었다면, 관료전을 지급하고 곧이어 녹읍을 혁파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관료전 지급과 녹읍 혁파 사이에 2년이란 공백이 있을 뿐더러, 녹읍의 대용으로 세조를 지급하였다. 녹읍과 대치될 수 있던 것은 세조(or 월봉)이다. 689년 녹읍 혁파 시에 신문왕은 '수년사조(遂年賜租)'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았다 한다. 이 '수년사조', 즉 해마다 지급하라고 한 조가 바로 "삼국사기"강수열전에서 강수가 받은 세조(歲租)가 아닐까 한다. 이와 관련하여 757년 녹읍 부활과 함께 월봉을 폐하였다고 한다. 월봉은 세조를 월별로 나누어 지급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수년사조=세조=월봉'임을 알 수 있다. 이 세조(=월봉)이 녹봉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은 강수가 세조를 더 받은 것을 '증봉'이라 한 예를 통해서도 유추 가능하다. 689년 녹읍 혁파와 세조 지급 기사만을 보면, 세조 지급 이전에는 모든 관인이 녹읍을 받은 것처럼 여기기 쉽다. 그러나 673년(문무왕13) 정월에 강수가 사찬에 제수되면서 세조 200석을 받은 점을 감안하면, 녹읍 혁파 이전에도 녹봉으로서 세조를 지급받는 관인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689년 녹읍 혁파 조치는 기존에 관인에 따라 녹읍 또는 세조로 나누어 지급되던 방식을 세조로 일원화한 것이다. 역으로 757년 녹읍 부활 조치는 689년 이전 체제, 즉 녹읍과 세조(=월봉)로 보수의 이원화가 이루어진 것을 뜻한다 하겠다. 3. 녹읍의 지급과 경영 녹읍의 지급 기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열기열전이 주목된다. 이에 따르면 김유신은 열기와 구근의 관등을 사찬으로 올려주기를 청하며 작(爵=벼슬=관등)과 녹(=보수, 녹봉)은 공에 대한 보답이라는 발언을 한다. 즉 녹봉은 관등을 기준으로 지급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녹읍 역시 관등을 기준으로 했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겠다. 아마 일정한 관등을 기준삼아 그 이상은 녹읍을, 그 이하는 세조(=월봉)를 지급받았으리라고 여겨진다. 강수가 제7위 사찬의 관등까지 올랐으나 녹읍을 지급받지 못한 것, 또 강수가 6두품 출신이란 점을 감안하면, 녹읍은 제5위 대아찬 이상의 관등을 소지한 관인들, 즉 진골귀족을 대상으로 지급된 것이 아닐까 한다. 중고기 이후 성골·진골 계층이 누린 특권 중에는 이러한 경제적 혜택도 포함된 셈이다. 녹읍은 관료전보다 개인의 권력 침투가 용이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관료전의 경우 해당자가 관직에서 물러나면 회수되었다고 여겨지므로, 녹읍은 그보다 국가권력이 침투하기 힘든 구조, 즉 녹읍주가 관직에서 물러나더라도 관등을 상실하지 않는 한 유지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녹읍의 구체적인 지급 내용은 무엇일까? 세조란 '해마다 지급되는 조(租=곡식)'를 의미한다. 이 세조가 녹봉임은 앞서 밝혔다. 그러므로 세조는 녹봉으로서 해마다 곡물로 지급되었다 하겠다. 세조의 경우를 미루어 보면, 녹읍 역시 지급된 지역에서 녹봉에 해당하는 곡물(=租)을 수취할 수 있는 권리, 즉 수조권에 한정된다고 여겨진다. 이는 녹읍과 녹봉이 대치되었을 것이란 앞의 추정과도 부합한다. 더욱이 934년(태조17) 5월 고려태조 왕건이 예산진에 행차하여 내린 조서에서는 녹읍과 녹봉을 같은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 일정한 지역에 설정된 녹읍이 녹물로 지급된 녹봉과 동일시된 까닭은 녹읍주가 녹읍으로부터 녹봉에 해당하는 곡물을 수취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중대 이후 신라의 경제상황을 말해주는 "신라촌락문서"에는 촌주위전·촌주위답·연수유전·연수유답·내시령답·관모전·관모답 등 여러 지목의 토지가 있는데, 하타다의 견해에 따르면 관료전은 관료들에게 지급된 직전이요, 관모전·관모답은 관청에 지급된 공해전이며, 촌주위답·촌주위전은 촌주에게 주어진 보수이다. 그렇다면 녹읍주가 수조권을 행사할 수 있는 토지는 연수유전·연수유답에 국한된다. 연수유전·연수유답은 일반적으로 농민들의 사유지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녹읍이란 국가가 가지고 있는 일정한 지역의 농민 사유지에 대한 수조권을 녹읍주에게 이양한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원칙적으로 녹읍지에서의 경작은 녹읍주의 권한 밖 일로 해당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의 책임 아래에 있었을 것이다. 단 녹읍주는 진골 고위 관료들이었기에, 실제 운영상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녹읍에서는 녹읍주가 직접 수조하는 것이 원칙이었을 것이다. 934년 고려태조의 예산진에서의 조서에서 녹읍주인 공경장상들이 직접 가신들을 녹읍에 보내 취렴케 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녹읍주들은 이러한 수조 방식을 악용하여 녹읍 농민의 노동력까지 징발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이는 불법이다. (-> 저자는 녹읍과 녹봉을 동일선상에서 놓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양자 모두 '조=곡물'을 수취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았는데, 그렇다면 굳이 녹읍제를 폐하고 녹봉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할 근거가 부족합니다. 경제제도 상의 이러한 혁명적 변화는 분명 양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저자가 이러한 견해를 내세우는 문헌적 증거인 "고려사"의 기록은 신라가 멸망하기 1년 전의 일입니다. 이러한 말기의 녹읍 관련 사료를 토대로 중대 신라의 경제적 상황을 유추한다는 것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오히려 녹읍과 대치 가능한 세조가 '조'를 지급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녹읍은 조용조의 지급과 관련한 보수라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4. 녹읍의 혁파와 부활 녹읍 혁파 이후 관등에 따른 세조(=월봉)액은 각 관등에 따라 지급된 녹읍에서 합법적으로 수조할 수 있었던 곡물의 총액에 상당하는 액수를 책정받았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녹읍주의 경우, 원칙적으로 녹읍을 보유하고 있을 때나 세조(=월봉)를 지급받을 때나 그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경제적인 이익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에서 번거롭게 녹읍을 혁파한 까닭은 당시 녹읍주들이 직접 수조의 이점 등을 악용하여 국가가 가지고 있던 녹읍에 대한 여러 가지 관리를 잠식해 들어갔지 때문으로 여겨진다. 특히 민에 대한 수탈은 그 정도가 심했을 것이다. 국가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녹읍에서의 지배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녹읍으로부터 직접 수조할 수 있는 권리를 앗아가는 조치가 급선무였다. 물론 이러한 조치가 대해 녹읍주들은 크게 반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신라는 전제왕권 시기였기에 가능하였다. 녹읍의 혁파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자체가 또한 왕권의 강화에 도움을 주었다. 녹읍을 받았을 대아찬 이상 고위 진골관료들을 견제하고 강력한 전제왕권을 이루는 데에 녹읍 혁파는 큰 디딤돌이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6두품 이하 관료들은 신문왕의 입장을 지지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녹읍의 혁파, 즉 세조(=월봉)의 지급은 6두품과 진골 관료들 사이에 놓여 있던 상하 차별의 벽을 어느 정도 허물어뜨리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전제왕권에 대한 진골 관료들의 지속적인 반항과 그에 따른 왕권의 쇠퇴로 말미암아 757년 결국 녹읍은 부활한다. (-> 무엇보다 먼저 지적하고픈 것은 경덕왕대를 과연 왕권의 쇠퇴기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경덕왕은 관제 및 지명의 한화를 도모한 인물입니다. 관제의 한화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지명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역사상 지명을 전면 개정한 인물이 한국사상 경덕왕 1인 뿐이라는 점, 외국의 사례를 보아도 이러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당시 녹읍의 부활을 왕권약화와 연관시켜 이해하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를 표하기 어렵습니다.) 5. 신라하대사회와 녹읍 대략 혜공왕대, 즉 녹읍이 부활한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했다고 여겨지는 "신당서"신라전에는 신라 재상의 집에는 녹이 끊이질 않고 노동(=사내 노예)이 3000천이라 합니다. 여기서 녹이란 녹읍에서 수취한 곡물을 뜻하고, 노동의 대다수는 재상의 집에서 떨어진 지방에 거주하던, 즉 당인의 눈에는 노동으로 비추어질 정도로 부림을 당하던 존재들, 즉 녹읍지의 농민들로 볼 수 있다. 그 만큼 녹읍이 부활한 이후 녹읍주의 자의적 수탈과 녹읍민의 빈한 처우는 심화되어갔던 것이다. 혜공왕대부터 시작된 신라의 무질서한 상황은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시켰고, 진골귀족들 사이에서 세력 다툼이 벌어질 때면 녹읍주들은 녹읍 농민들을 사병화하여 동원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는 물론 불법이었겠으나, 신라의 국가권력은 이를 통제할 힘이 없었다. 그런데 하대 말기, 대체로 후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녹읍주들은 점차 녹읍에 대한 지배권을 잃어갔던 것 같다. 935년(경순왕9) 10월 경순왕은 고려에 귀순할 뜻을 밝히면서 사방의 토지가 모두 남의 소유가 되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영토의 상당 부분이 이미 신라의 지배력에서 벗어난 상태였기에, 그 지역 안에 있던 녹읍에 대한 녹읍주의 지배력 또한 상실되었음을 의미한다. 녹읍에 대한 지배력 상실은 녹읍주들에게 경제적·군사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하대에 접어들어 치열하게 전개되던 왕위쟁탈전이 후삼국시대 이래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그러한 측면의 반영이다. ============================================================================================== 전체적으로 읽기에도 좋고 주장도 뚜렷이 나타나는 글입니다. 다만 이희관 선생의 다른 논문에서도 나타나는 문제점, 즉 이러한 주장이 나오는 데에 필요한 전제에 대한 논증은 별반 다루지 않은 점이 문제입니다. 녹읍에서의 수조권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통일신라기에는 결부제가 시행되었다는 점을 밝혀야 합니다. 이희관 선생의 논조에 동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와 상관 없이, 전제의 출발을 이루는 틀에 대한 논증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입장에서 개진되었다는 점에 이 글은 후한 평가를 내리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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