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게에 쓰는 첫글인데, 부족함이 많은 글입니다. 즐겁게 읽어주시면 저도 매우 즐거울 것입니다.
만약 제가 글에 잘못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면 가감없이 말해주시면 그것도 매우 즐거울 겁니다.
이전시대부터 시작하여 18세기 산업혁명으로 폭발한 서구의 기술혁신은 서세동점의 시대를 열었다.
각종 무기의 발달은 물론이거니와 교통, 통신의 발달은 서양세력이 지구상 그 어느 곳에서라도 그들의 무력을
투사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이는 비서구권 국가들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동아시아권에서는 그들이 이른바 “서양오랑캐”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 근본적인 이유였던 정신문명의
우월함이 서구의 물질문명, 더 나아가 그들의 정신문명에게도 완전히 뒤떨어졌다는 것을 깨끗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특히 서양세력의 장갑함을 비롯한 근대군함은 군사력의 척도임과 동시에 비서구권 국가들에게
그들의 국력을 과시하여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동아시아 3국에게도 서구의 근대 군함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만 예외적으로 한국에서는 근대군함을 접하기는 하였으나 제반 상황의 어려움, 재정의 절대적 부족,
육군 방비마저 제대로 이루어지고 않아 해군에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반면에 청, 일 양국은 그들의 역량을 동원하여
근대 해군 건설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이 글은 청일전쟁 이전 양국의 해군 경쟁과, 청일전쟁 상황에 대해서 간략하게 서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서양의 신기술은 매우 폭력적인 충격으로 동아시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대표적으로 아편전쟁에서 서양열강에게 타격을 입은 청나라는 그들의 해군력으로 서양열강을 해양에서 저지하는 것
체가 불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이로서 청나라는 군사개혁과 근대해군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었고
이런 청나라의 군사개혁의 목적과 방법을 가장 잘 나타내는 구절이
“오랑캐의 장기를 배워 오랑캐를 제압한다.”였다.
일본 또한 페리제독의 흑선이 도래하여 에도막부가 저항을 포기하고 개국함에 따라 서양의 발달한 무기체제를
도입하여 방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양국은 넓게는 서구열강에게서 자국을 지키기 위해 좁게는
주변의 경쟁국들을 압도하여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근대 해군 건설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청나라의 해군 건설은 태평천국의 난을 겪고 있던 동치 원년(1862년), 이홍장이
영국에서 군함 7척을 구매한 것을 시작으로 한다. 그러나 다음해인 동치 2년, 7척을 이끌고 온 영국장교 오스본과
청국이 고용한 영국 용병들이 청나라와의 계약상의 마찰로 영국으로 돌아감에 따라 함대를 그대로 해체되어
매각되었다. 이런 해프닝 후, 청나라는 동치 5년(1866년) 좌종당이, 복건성에 조선소(복건선정국)을 설치하고
복건선정국,
해군 선정학당을 설립하여 근대해군 건설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후에도 군함의 완전한 국산화는
이룩하지 못했지만(주력 군함은 수입) 이시기 선정학당이 설립됨에 따라 근대 함선을 운용할 근대 교육을 받은
인적 자원이 본격적으로 육성되기 시작하였고 이들이 북양함대의 핵심을 구성하게 된다.
일본의 근대해군 건설 출발은 시기상 청나라와 비슷하지만, 근대 함선을 접한 것은 중국보다 훨씬 일렀다.
일본은 1855년 네덜란드에서 증기추진 코르벳함인 칸코오마루(觀光丸)를 입수하여 운용해 본적이 있었고,
(칸코오마루, 복제함이 현존)
막부해군이 정식으로 설립된 이후에는 연습함으로 운용되었다. 여기에 1866년에는, 중국보다 2년 먼저
일본 최초의 국산 증기함선인 치요다(千代田)를 건조했다.
사실 일본이 청나라에 비해 국산 군함을 조기에 취역시킬 수 있었던 것은 막부 말기부터 명치 초기까지
일본의 군비정책이 해군을 우위에 놓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긴 해안선을 보유했기 때문에 대량의 함선을
보유해 자국을 방어하고자 했다.
이렇게 양국에서 근대 해군이 태동하고 있었을 때, 양국은 모두 서구열강과는 우호적 관계를 가지고 자신들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인근 국가를 장악하려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양국은 자연스럽게
주적이 되었고, 류큐(오키나와)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양국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경쟁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서양의 군함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는 군함의 국산화, 서양의 함선을 모방함으로써
그들과의 기술격차를 줄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는 청나라의 위기감을 매우 고조시켰다.
더욱이 일본이 류큐를 시작으로 대만 일대에서 청나라에 대해 공세적 입장을 취함에 따라,
청나라의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결국 일본과의 마찰이 현실화되자 청나라 내부에서 이시기 까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던 자강운동, 군사적 근대화의 성과가 비판 받기 시작했고 이것은 해군력 강화의 새로운
동력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특히 대만침공 당시 일본이 보유했던 초기 단계의 철갑함인 장갑 프리깃함 코테츠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인데,
이는 청조의 철갑선 보유 욕구를 매우 자극하였다. 이런 이유로 1874년을 기점으로 청나라의 해군 건설은
구체적인 목표를 두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하였다. 이시기 이홍장은 해안방어를 위해 근대 함선을 수입하여
함대를 건설할 계획을 세운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복건선정국에서 생산한 함선의 질이 매우 떨어졌기 때문인데,
1866년에서 1873년까지 프랑스인 기술자가 참여하면서 생산된 15척의 대형 증기선 중 가동하는 것은 3척 정도에
불과한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12척 중 10척은 가동하기에 성능이 부적합하거나 비용이 많이 들어
항구에 머무르고 있었고 2척은 철의 질이 나빠 녹이 슬어 운용에 어려움을 겪었다. 더욱이 이 15척은 모두 장갑함이
아닌 증기선이었기 때문에 이홍장은 복건선정국의 결과물에 대한 실망감이 매우 컸다. 이런 상황에서
이홍장은 빨리 함대를 확충하기 위해 외국에서 군함을 들여와야 하며, 특히 일본이 보유한 것과 같은 장갑함의 확보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비슷한 시기 일본 또한, 품질이 조악한 국산 함선 문제와 너무 빨리 발전하는 서구열강의 기술을 따라가기 어렵다는
이유로 소형함 혹은 다용도함을 제외한 주력 군함의 국산화를 일시 포기하고 1874년 영국에 후소(扶桑)를 주문하는
것을 시작으로 최신예함을 수입하기 시작한다. 일본이 후소를 비롯한 주력함을 주문하기 시작한 것도 대만침공 당시
주력함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주력함 수입이 이 시기에는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된 반면, 청나라의 군함 수입은 그렇지 못한 편이었다.
그것은 당시 위구르 일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청나라의 재정이 위태로운 상태였고 정부 내에서도
해군력 증대보다는 남하하는 러시아를 막기 위한 육군력 증대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세력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더욱이 청나라 조정에서는 복건선정국이 운영되고 있으므로 자체 생산을 통한
주력함 생산에 대해서도 낙관적인 분위기가 존재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컸다. 이홍장의 주장은 받아들여졌으나,
위구르 반란 진압-육군력 증대에 비해 적은 예산을 배당받았고 청나라는 일본이 후소를 주문한 것과는
다르게 장갑함을 주문할 여력이 비교적 적었다.
그러나 이시기 복건선정국과 같이 설립된 선정학당 학생들이 돌아와 서양의 발전하는 기술을 보고함과 동시에
최신예 함의 도입을 주장하고 일본의 해군력 증강이 가시화되자 이홍장은 독일에 군함을 주문한다.
1880년, 독일에 장갑함 2척과 어뢰정 10척을 주문하였고 이것이 청나라 해군의 최초의 장갑함이자 당시
일대의 최강의 함성이었던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이었다.
정원과 진원은 당시 동아시아 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함선이었다. 기준 배수량이 약 7,300톤,
만재 배수량 약 7,700톤, 최대 시속이 15.7노트에 달했고 측면장갑은 약 356mm에 달했다.
주포는 12인치(305mm) 25구경 2연장 회전포탑이 2개 있었고 부포는 5.9인치 포 3문 14인치 어뢰발사관을 3개
가지고 있었다.
정원과 진원은 독일해군조차 보유하지 못했던 최신예 함선으로 막강한 화력과 두꺼운 장갑으로 비슷한 시기
서양열강의 주력함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특히 청나라와 경쟁하고 있던 일본의 주력함인
후소(25cm 주포 4문, 장갑 231mm, 13노트)와는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하지만 이시기 2척의 최신예함 도입 이외에
청나라의 해군력에는 막대한 타격이 입혀졌는데 베트남을 두고 프랑스와 벌인 전쟁에서 청나라가 건조했던
국산 함선들이 대부분 파괴되었고 \복건선정국이 프랑스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청나라는 북양해군 중심으로 해군을 편성하고 1888년에는 영국식 해군규정을 모방한 해군규정집인
북양해군장정이 완성되어 시행되기 시작했고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의 지휘아래 들어간다. 북양함대는 이후
낙후된 국산함선을 도태시키고 정원, 진원, 영국산 함선들, 독일산 수뢰정 등으로 구성하여 외적으로 보기에는
근대 해군을 탄생시켰다. 청 해군의 이러한 외적 성장은 청나라와 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던 일본에게 충격을
안겨주었고 이는 청일전쟁까지 이어지는 일본의 군비확장으로 나타난다.
일본의 상황은 청나라와는 조금 달랐다. 일본의 군사력 증강은 1870년대 후반까지 재정을 건전화하고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을 우선하고 있던 국가 정책 때문에 군비 확장이 저지되고 있었다.
이후 1883년 대형함 5척, 중형함 8척, 소형함 12척 등 총 32척의 함선을 확보한다는 계획이 나와,
영국제 방호순양함 나니와, 다카치호, 프랑스제 방호순양함 우네비 등이 주문되었다.
(나니와)
일본으로 오던 중 침몰한 우네비를 제외한 함선들은 1886년에 일본으로 인도되어 1878년 후소 이후 8년만에
확보된 신형 주력함들이었다. 일본은 청나라 해군의 증강에 대응하기 위한 함선조달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세금을
인상하고 1,700만엔 규모의 해군공채를 방행하였다. 이렇게 확보된 예산으로 정원과 진원에 맞설 수 있는 함선들이
급히 조달되었는데, 이것이 마츠시마, 하시다테, 이츠쿠시마 3척의 함선이었다.
다만 이 3척의 함선은 정원, 진원의 배수량의 절반에 불과했으나 강력한 320mm구경의 포를
장착한 소함거포의 특이한 함선이었다. 이는 부족한 예산으로 정원과 진원에
대항하고자 한 일본해군의 고민의 결과였다. (물론 성과는...)
(마쓰시마)
그러나 일본은 정원과 진원에 대항하고자 필요로했던 9,000톤급, 6000톤급의
함선을 구매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어뢰적 16척은 목표로 했던 숫자를 채웠지만 각종 군함의 화보에는 실패했기
때문에 청나라 해군을 압도하는 것에는 실패하고 청나라와의 격차를 줄이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이는 일본 제국의회에서 야당이 다수를 점함에 따라 군비를 이유로 한 조세 인상이 어려움에 부딫혔을 뿐만 아니라
군비확장에 제동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또한 대형함의 구입을 어렵게 한 이유는 대형함보다 소형함을 주력으로 하자는
청년학파의 대두에도 있었다.(청년학파까지 언급하면 너무 길어지니 넘어가겠습니다.)
이러한 난관을 돌파하기 위한 계기는 북양함대의 일본 공식 방문과 메이지의 의회개입이었다.
1891년, 1892년 일본에 공식 방문하는 북양함대를 자세히 관찰한 일본 각계는 북양함대의 위용에 두려움을 가지면서도
북양함대를 극복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또한 이시기 의회에서 해군 예산을 감액하자 메이지는 국무대신,
의회 양원 의장 등을 불러
“국가 국방의 일을 하루라도 늦춘다면 백년의 후회를 남기게 될 것이다. 짐은 이에 내저의 경비를 절약하여
6년간 30만엔을 보내고 문무의 관료에게 명하여 특별한 사정이 있는 자를 제외하고 같은 기간에 봉급의
10분의 1을 납입하도록 하여 이로서 군함제조비에 충당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통보했다.
군주가 직접 자금을 충당한다는 이러한 이야기는 일본 내부에서 엄청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우선 의회는 해군이 주장한 예산안을 다시 통과시켜 후지, 야시마, 아키시, 미야코 4척이 영국에 주문되었다.
이 중 후지와 야시마 2척의 도입가가 1,542만엔이었는데 이시기 일본 전체 세출 결산이 8458만엔에 달했던 것에
비교해보면 얼마나 막대한 비용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메이지의 이러한 칙어는 의회의 예산안 통과를 넘어 효과를 가져왔는데, 양원 의원들이
연봉의 1/4을 군함제조비로 헌납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의 화족, 자본가, 일반 시민으로부터 자금이 모금되기
시작하며 모금 총액이 103만에 달했다. 이로서 청일전쟁 발발 직전 일본은 최대한의 군비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이러한 일본의 노력이 빛을 발하였는데 일본은 청일 전쟁 해전에서 배수량 합게에서
우세를 점했다. 이는 정원이나 진원 같은 대형함을 입수하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꾸준히 3,000~4000톤의 중혐함들을 구입하여 군비를 확충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의 이러한 노력은 일본해군이 청에 비해 비교적 균질적인 함대를 구성하게 하여 많은 이점을
가져올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정원, 진원 이외에는 구식함과 다양한 함선들로 함대를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전에서 일본에 비해 매우 불리하였다. 또한 일본 함대가 신예함들로 구성되어 청나라 해군함대에
비해 빨랐을 뿐 아니라, 함대 각 함선들이 균일한 속도를 지녔던 것에 반해서 청 해군은 평균적으로 일본 함선에 비해
30%정도 느렸을 뿐 아니라각 함선마다 매우 들쭉날쭉한 속도를 지녔고 이는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다.
전체적으로 일본함대가 청함대를 압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함대는 그들이 두려워하고 목표로 삼았던
정원과 진원을 격침시키는 것에는 실패했다. 정원에는 159발, 진원에는 220발 이상의 포탄이 명중했음에도
양 함은 건재했고 오히려 일본함대의 기함 마츠시마의 측면을 관통시켜 막대한 피해를 안겨주었다.
이 해전에서 격침되지 않는 정원에 대한 일본해군의 집념에 대해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기함 마츠시마의 3등 수병이었던 미우라 토라지로가 정원의 공격으로 불타던 마츠시마에서 죽어가면서
부함장 무코우야마 신키치에게 죽어가면서 물었던 마지막 물음이 정원은 침몰하지 않았습니까? 라는
것이었다는 일화이다.. 이는 이후에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군가로 만들어지기 까지 합니다.
대략 이런 구절입니다.
<탄환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무수한 상처를 몸에 입는다해도 그 생명을 용기로써 붙들어 놓고 있는 수병은
(중략) 목소리를 쥐어 짜내어 묻는다. 정원은 아직 침몰하지 않았습니까?>
정원을 해전에서 격침하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일본은 여순을 잃어 선박 수리 능력을 잃고 위해위로 틀어박힌
북양해군을 포위하였고 그들을 지속적으로 소모시켰다. 정원도 일본 수뢰정의 공격에 피격당해 좌초하여 자폭하였고
북양함대 정여창은 일본군에 항복한 후 자결하였다. 자폭한 정원을 제외한 진원은 포함한 잔존함선은 일본이 노획하여
청나라 근대해군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이로서 청-일 양국의 해군 경쟁은 종결되었다.
조금 찾아보니 중국에서 만든 청일전쟁 해전 영화가 있네요.
25분부터가 마츠시마 포격에 대해 나오는군요.
여담이지만, 청 해군병의 훈련도가 전체적으로 일본 해군에 비해 떨어졌으나
(일본해군은 초창기부터 영국교관을 초청해 영어로 훈련을 하는 등, 기술 습득에 매우 열을 올렸습니다.)
정원과 진원은 청국 평균보다는 괜찮은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영상에서도 나오지만 군비경쟁, 훈련도와 별개로 청나라의 부패가 해군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