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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중국의 경제 발전 - 그리고 자본주의 맹아론 (4)
게시물ID : history_469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4
조회수 : 121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6/14 12:19:50
지난 글 : 근세 중국의 경제 발전 - 그리고 자본주의 맹아론 (3) 4 산업 발전과 자본주의 맹아 중국학계에서는 50년대 이후 자본주의 맹아 논쟁이 지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1954년 홍루몽의 사회배경과 역사적 의의를 논함, 이란 역사가 덩튀의 글을 중심으로 홍루몽의 역사적 배경과 자본주의 맹아와의 관게 여부를 논하는 글들이 나오게 되었죠. 전에도 말한 것처럼, 19세기 이후 서구 학자들은 중국사를 '정체'의 역사 라고 규정했고 이는 마르크스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아시아적 생산양식' 이란 형태로 중국의 경제발전을 정체된 것으로 규정했습니다. 맑스 베버 역시 경제 뿐 아니라 진한 시대 이후 2000년간의 정치변화를 '황제전제정치와 가산제적 관료주의'라고 규정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학계에서 자본주의 맹아론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큰 것입니다. (한국 학계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아 17, 18세기 자본주의 맹아론이 연구되었죠. 주로 요호부민의 성장과 상업발달에 관련한 연구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발견된 명청시대의 '자본주의 맹아'의 사례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명대 후기 직접적인 사료로서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부분은 두 분야에서 존재했습니다. 첫번째는 소주, 항주지역에 있었던 몇몇 비단 공장이며 두 번째는 광동의 야철업 및 불산의 초철공장과 철기 주조 공장이었습니다. 관영수공업이 쇠퇴하자 조정의 수요는 대체로 민간기호에게 생산을 청부하는 '영직'을 통해 수요를 채웠습니다. 대체로 영직을 담당하는 기호는 생산규모가 큰 대호였는데, 이들이 자신의 시설이나 노동력으로 요구량을 채우기 어려웠을 때는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소규모 기호에게 하청을 주었습니다. 이 가운데 대호와 소호 사이에선 서서히 고정적인 고용관계가 정착해 가고 있었습니다. 명대의 사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대체로 청 초기 소주의 직공이 이미 전문화되어 있었고, 노동시간에 따라 임금을 받았고, 각기 고정적인 주인을 가지고 있었음이 사료를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이는 인접한 명 후반에도 그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명 후기 이러한 자본주의 고용관계를 보여주는 사료는 세가지인데, 하나는 한 공장주가 남녀 직공 각기 수십명을 고용한 사례, 두 번째는 20여대의 직기를 소유한 공장주의 사례, 세번째는 소설속의 묘사로 주인공이 소생산자로 확대투자를 반복하여 10년만에 30~40대의 직기를 보유한 공방의 주인으로 발전하는 내용입니다. 이는 마르크스가 설명하는 자본주의 형성의 1단계, 즉 생산자가 자본가로 발전하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2단계, 즉 상인자본이 견직업에 투자하여 직접 생산과정을 지배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명대 상인자본의 확대양상을 생각하면 명 후기에는 있을 법도 합니다. 두 번째 사례는 광동의 철광 채련과 제철업 발달입니다. 이 지역에선 철광의 제련이 발달하여 24시간 가동하여 하루 3600근의 철을 생산할 수 있는 고로가 개발되었고, 4명이 동원해서 작동가능한 수동식 송풍기 등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연료로 건류(고체 유기물을 가열, 분해하여 휘발성분과 비휩잘성분을 분리하는 처리방식) 코크스를 사용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광동의 야철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이들 지역에서 공장제 수공업의 사례가 발견되는데, 광동의 소주, 혜주에선 철광을 채굴, 제련하는 광주는 적어도 5~6개, 많으면 10~20개의 고로를 설치했고, 고로 하나당 노동자는 무려 200~300명에 달했습니다. 나정 등지에선 노장 한곳에 대규모의 병형 고로 두세개가 설치되어 고로 하나에 200여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는데, 고로와 관련된 노동자 200명 이외에 채굴노동자 300명, 급수, 소탄 노동자 200여명, 운반용 소가 200마리, 운반용 선박이 50척에 달하여 투자액이 은 1만냥이 넘는 대규모 사업으로 발전했다 합니다. 이 곳의 생산물은 불산으로 운반, 초철업(무쇠를 가열 단조하여 숙철을 만들어 철기 제조 가능 상태로 가공하는 업종)철기제조업 공장에 공급되었습니다. 광동의 이런 야철업 기반을 바탕으로 불산에서 초철업이나 철기 제조업이 발달할 수 있었는데, 천계연간에 불산에서는 이미 초철, 주과, 철정, 철선, 제침등의 제조업이 상당한 발전을 이룬 상태였습니다. "초철을 담당한 점포가 수십개가 존재하고, 하나의 점포에 수십개의 모탕이 있고, 하나의 모탕에 10여명의 노동자가 붙어 작업하고 있다" 라고 하니, 초철업 점포 하나당 적어도 200명 이상의 노동자가 고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직능별로 분업이 이루어지고, 숙련공과 비숙련공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자본주의적 성격이 강한 공장제 수공업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선 노동자와 업주사이의 분쟁이 명말 두 차례나 발생했는데, 이 역시 자본주의적 속성의 하나라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청대에는 자본주의 맹아의 존재가 더 넓은 지역, 더 많은 직종에서 발견되니, 복건의 차제조업, 광서, 강서의 담배 제조업, 사천, 직례, 산동, 북방 5성의 양주업, 동북, 절강의 착유업, 광동 대만의 제당업, 강소 절강의 견직업, 강소 소주, 송강의 면포 가공업(염색, 단포업) 강서 만년 호남 형산 섬서 한중부, 강소 소주부의 제지업, 강소 소주 오현의 인쇄출판업, 섬저 종남산 일대의 목제채벌업, 광동 호남 진계, 섬서 종남산 일대의 야철업, 광동 불산진, 호북 한구, 안휘 무호, 호남 상담의 철기 주조업, 운남 동광업, 산동 박산, 북경 서부의 탄광업, 산서 하동의 지염업, 사천의 정염업, 상해의 사선업 등등이 발견됩니다. 이렇게 많은 사례가 발견되는 것은 명대에 비해 사료가 풍부하게 남아 있고, 상품화폐경제가 양적, 질적으로 더 발전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 많은 사례를 모두 열거 할 수 없지만, 대표적으로 강소, 절강의 견직업의 발달을 보면 명대와 다르게 상인 자본이 생산과정을 직접 통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역에선 명말에 비해 더 고정적인 노동관계가 이루어졌고, 심지어 노동시장까지 출현했습니다. 노동대가를 노동량에 따라 지급하는 성과급의 존재도 확인할 수 있고, 노동자의 행방조직도 출현하는 등,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실 사료 부족으로 확인할 순 없지만 이들 요소들은 이미 명후기에 나타났을 가능성도 큽니다. 앞에서 말한 상인자본의 생산과정 지배는 장방이라 불리는 상업자본이 확인되는 것에서 분명해집니다. 장방이란 상인이 스스로 경사, 위사를 사서 기호에게 주고 영직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장방은 휘하에 생사를 수집하는 상인자본인 사행, 염색과 표백을 담당하는 염방, 쌍경사를 만드는 차호, 경사를 직기에 연결시키는 견경접두, 직접 생산자인 기호, 그리고 기타 다양한 부속 행점을 지배하고 통제하여 견직업 전 생산과정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원료의 제공과 가공, 판매까지를 통제하는 장방의 출현으로 거대한 공업체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들 장방은 청후기에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되기에 이릅니다. 또 하나의 예는 사천 정염업을 들 수 있습니다. 소금은 해염, 지염, 정염등 여러 생산방식이 있고 그 중 정염은 전체 소금 생산량의 18%를 차지하였습니다. 정염은 지하 수십 미터~천 미터의 깊은 곳에 액체상태로 매장되어 있어, 이를 채굴하려면 많은 공구, 설비, 복잡한 기술,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공업인 겁니다. 명청시대 이래 노수(염분을 포함한 지하수)를 채취하는 도구와 기술이 혁신을 일으켜 도광 연간의 부영염장같은 곳에선 약 1035미터의 깊이까지 채취가 가능했습니다. 또 이 노수를 끓여 증발시키기 위해서 화력이 강한 천연가스를 이용할 수 있는 기술도 개발되었습니다. 청대 사천성의 인구와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고, 판로 또한 넓어져 사천에선 가경 17년(1812) 전매염 약 3만 2천만근이 생산되었고 사염은 약 7천만근이 생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이런 대규모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본의 축적이라는 근대 자본주의의 성격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많은 소규모 생산자가 정염생산에 종사하는 가운데, 그들 사이의 경쟁으로 일부 유력한 생산자가 자본을 축적, 생산규모를 확장하여 대규모 자본가로 성장하기도 했습니다. 예컨데 염원현의 염장에서 생산에 종사한 왕배신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더구나 급격하게 증가하는 사천염에 대한 수요는 상인자본의 생산참여를 불러와 섬서상인과 산서상인의 자본이 투입됩니다. 이들은 처음엔 소금의 운송과 판매에만 종사하다 나중에는 소금생산에도 참여, 산업자본으로 전환되기도 합니다. 부영염장의 왕삼외당이나 이사우당이 대표적 예입니다. 또 이 염장에선 생산과 그 관리가 매우 구체적으로 분업화, 전문화되어 있었는데 노동자를 감독하여 염정을 개착하는 염정의 관리자,노수를 끓이는 아궁이(염조) 관리자, 채취한 노수를 운반하는데 사용되는 대나무 관의 관리자, 소금의 저장, 운송, 판매 담당 관리자가 있었으며, 생산부문을 주관하는 정방, 조방, 수방등이 설치되었고 그 휘하에 각 분야로 나누어진 노동자들이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정방을 예로 들면 염정 개착을 주관하는 산장, 노수를 길어 올리는 대방거, 노수를 담는 대광주리를 만드는 멸장, 노수를 길어 올리는 데 필요한 소를 부리는 우패, 노수를 저장하는 일을 맡은 좌황통 등이 있었습니다. 노동자의 수도 방대하여 부영염장의 동장의 경우 전체 노동자수는 무려 30~40만명에 달했고 그 중 염정이나 염조에서 일하는 기술노동자만 1만에 달했습니다. 노수를 운반하는 막일꾼인 담수공역시 1만, 목공, 석공, 금속공 등의 기술노동자가 수백가였다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중국의 산업발전은 왜 영국식 산업혁명으로 발전하지 못했을까요? 사실 중국에서도 이러한 자본주의 맹아론의 인기는 점차 시들어가고 있는데,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5단계설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필요가 있냐는 의견도 개방화의 추세에 맞추어 점차 늘어가고 있습니다. 즉 마르크스의 연구 사례는 어디까지나 '영국 산업혁명'의 과정에 맞추어진 것이고, 산업의 발전이 꼭 그의 이론처럼 5단계에 맞추어 순차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가, 혹은 중국은 꼭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해야만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들이 그것이죠. 이런 견해를 대표하는 학자가 '우청밍'이었는데 그는 마르크스의 5단게 생산양식은 역사철학의 명제일 뿐이지 경제사의 명제는 아니라고 하며, 세계 경제사를 돌아보면 노예제가 없는 나라의 역사도, 봉건제를 결여한 지역의 역사도 있다, 고 주장했습니다 "중국은 실제로 자본주의 단게를 뛰어넘어 사회주의 단계로 진입했는데 만약 한 나라가 현대화하고자 한다면 자본주의를 뛰어넘을 수는 있지만 시장경제를 건너뛸 수는 없다""자본주의 맹아라기 보다 근대화의 맹아, 시장경제의 맹아라고 하는 편이 낫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종래의 중국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전통적 명제를 부인하는 것이었죠. 그의 견해는 리보중에 의해 발전적 계승이 되었는데, 그는 자본주의 맹아에 대한 신념이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중국의 역사를 편견 없이 실사구시적으로 분석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실제 세게 모든 국가중 영국만이 자발적으로 전근대 농업사회에서 근대 공업사회로 전환했고, 이러한 도약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석탄과 철에 의한 중공업의 발전-생산수단, 생산부문의 발전-이라는 것입니다. 즉 석탄의 이용과 철강산업의 발전이 선업혁명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며, 이의 유무가 근대 자본주의 성공을 결정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에 비해 명청시대 강남은 노동 분업과 전문화를 토대로 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시장규모가 확대되어 1700년과 1820년 사이 유럽의 경제규모를 능가하는 발전을 보였습니다. 이를 소위 스미스형 발전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영국과 비교하면 결정적인 기술혁신, 석탄, 철의 에너지 혁명을 결여하여 근대적 공업화가 불가능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중국은 이런 스미스형 발전을 선택한 것이었을까요? 그러기 위해선 우선 서유럽, 특히 영국의 상업발전과 그에 이은 산업혁명의 과정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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