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겨울같지 않던 어느 날.
"난 이거 먹을래."
"나는 이거. 딸기 올라간거."
"...이거랑 핫쵸코 두개 하고...아이스 까페라떼 샷 두개 추가해서 하나요...먹고 가요."
오마니가 서울올라오셨다가 두 꼬맹이들을 환자인 나에게 맡겨놓고 가셨다.
처음에는 아이고~우리 아들. 어쩌나!!!! 하시던 분이었지만,
이게 장기전으로 가다보니까, 사람은 적응의 동물.
그냥 거동이 조금 불편할뿐. 내 아들이니 어찌 잘 지내겠지.라며, 어머니는 씩씩하신건지 무덤덤하신건지 금방 평소대로 돌아오셨다.
동생들도 예전처럼 큰오빠와 하드코어하게 놀려들지않고,
셋이 나란히 앉아서 게임을 하거나, 큰 애는 굳이 안밀어도 되는 휠체어를 밀고, 막둥이는 내 무릎팍에 앉아서 눈은 스마트폰에 있으면서도 재잘재잘 나랑 계속 떠들어댄다.
"목말라. 음료수 사줘."
"그럴까? 나도 목마른데 잘됐다. 막둥이. 일어나봐. 여기 비탈길은 언니 못 밀고 올라가니까."
"네~"
"오빠가 끌고 올라갈테니까...야야. 손다쳐."
까페 앞에 있는 야트막한 비탈길을 올라가려는데, 막둥이는 얼른 내려서 언니랑 같이 묵직하기 그지없는 큰오빠와 휠체어를 밀어댄다.
다친다는게 니들 손이 아니라, 내 손이란다...내 흐름을 끊지 말아줘;;;;;
까페에서 파는 딱히 맛있지는 않은 케잌이다만, 애들은 맛있게도 얌얌하면서 먹는다.
막둥이 태어나기 전에는 누가 입에 떠먹여주지 않으면 지 손으로 뭐 하나 안하려들던 큰 애도,
이제 나이대가 두자리 수에 곧 있으면 중학생이 되다보니, 거동불편한 큰오빠 챙기랴. 8년째 막내라 여전히 어린애처럼 굴어대는 동생 챙기랴.
안 업어준다고 울어. 안 놀아준다고 울어. 안 사준다고 울어. 큰오빠 못생겨서 울어. 그저 울보였던 녀석은 어디로 갔나. 싶을 정도였다.
"다 컸네."
"그럼. 나 이제 브라자도 해."
"...내 감정 좀 깨지 말아줄래. 그 쪽으로 컸다는게 아니잖아."
"나도 할래!!!!"
"니 나이때 한다고하면 병원가서 성장호르몬 검사해야지. 까불지들 말고 먹고 마시셔."
"아. 짝은 오빠 전화다...여보세요? 응. 짝은 오빠. 여기 병원 앞에 까페. 응응. 전에 새언니랑 두부랑 왔던 데. 큰오빠가 먹고 싶대서.(내가 언제?) 오빠는 아메리카노? 큰오빠. 카드. 짝은 오빠 아메리카노 시켜주래."
"돈은 나보다 더 버는 놈이 한 푼을 형 앞에서는 안쓰려고 들어;;;;"
큰 애는 그렇게 내 카드를 받아들고 카운터로 갔고, 막둥이는 짝은 오빠 와? 새언니도 와? 조카도 와? 이러면서 어디어디? 라며 벌써부터 흥분해버렸다.
"큰아빠!!!!"
나온 커피를 들고 까페를 나서자, 조카가 나를 보고 우다다다!!!!하고 뛰어온다.
"두부!!!! 얼마나 많이 컸냐!!!!"
조카를 번쩍 안아든다.
"또또또. 아직 무리해서 서있지 말라니까."
큰아빠 또 쓰러진다. 아빠한테 와. 동생은 아들을 다시 안아든다.
"점심은 형네 집서 뭐 시켜먹자. 짐은 내가 차에다가 실어놨어."
"어. 이 몸은 소고기가 먹고 싶구나."
"뭐 시켜먹잔 말 안들었어? 얼른 타. A야. 두부 좀 데리고 있어. 큰오빠 휠체어 좀 싣게."
"응. 두부야~고모한테 와."
내 집 같지 않은 내 집.
이사하고 얼마 안되고 야근을 좀 했던 다음 날.
"...어...이상한데..."
출근하려고 이를 닦다가, 불현듯 등골이 싸한 기분에 119를 불러서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렇게 반신불수가 되버린지 1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오래는 안되지만, 이제 겨우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휠체어도 동생들이 나 재활하다가 넘어졌는데 하필 팔꿈치를 책상모서리에 부딫혀 전기올라와서 부들대는걸 큰 오빠 큰일 난 줄 알고 놀래서 엉엉 울어버려서(다른데는 아프지도 않았음...감각이 없을때라...),
아!!!! 걸을 수 있다고!!!!
안돼!!!! 휠체어 타라고!!!!
라고 30넘은 아저씨랑 12살 8살 꼬맹이들이랑 싸우다가 2대1로 싸워서는 못 이길것 같아서 휠체어 탄 거였다.
진짜 상태 안좋을땐 전동휠체어 구매를 진지하게 고민했었는데, 안 사길 잘했다. 비싸드만...그거...
"두부. 이리와. B. 너도. 집에 들어오면 손씻고 양치하랬잖아."
"너도 마찬가지야. 셋 다 이리와."
동생이 꼬맹이들 챙기는 동안, 오랜만에 내 방 침대에 누웠다.
곧 퇴원한다.
곧 복직한다.
장대리는 장과장이 되어 맞먹으려 들었지만,
나는 복직과 동시에 차장으로 진급하기로 되어있어서 복귀하면 직급으로 찍어눌러줄 작정이다. 후후훗.
재활 및 치료기간이 1년은 넘는대서 사직서를 냈다가 팀장님한테, 너때문에 내가 임원들한테 욕 얻어먹었다면서, 병가처리하고 기본급 계속 나갈거고, 너 차장 진급대상자였으니, 복귀하면 진급할거고, 영업에서는 빠지고 다시 본부 일 하게 될테니 그리 알고 닥치고 재활해서 복귀하라고 그랬다.
이 놈의 회사는 나를 어디까지 부려먹으려고 그러는건가.
"형. 애들이 피자먹고 싶다는데, 형도 그냥 피자 먹어라."
"어. 그려. 애들 먹고 싶은 걸로 시켜."
니들 어떤 피자 먹을래? 너 이거 맵다고 한입만 먹었잖아. 딴거 시켜. 이거 고구마 들어간거 맛있어.
거실에선 피자메뉴 고르느라, 시끌시끌하다.
내년 봄. 다시 사회로 복귀하기 전. 겨울같지 않은 겨울날이었다.
그 겨울같지 않은 겨울날이 오기 전. 어느 가을 날.
"...어떻게 알았대?"
"D가 울면서 전화왔으니까."
장대리...아니아니...장과장은 병문안을 핑계로 나를 심문하러 오셨다.
"어떻게...둘이서...나를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어요?"
"자. 내가 장대리...아니아니...장과장이 이뻐죽는 D랑 사귄다고 말했어. 어떻게 했을거야?"
"일단 때리고 경찰에 신고했겠죠. 혼인빙자간음 미성년자약취 뭐 이런걸로."
결혼.
D랑 있으면서 매일매일이 즐거웠지만, 단 한번도 D랑 그 후의 미래같은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랑에 국경이며 나이가 뭐가 중요하냐는 시대지만, D는 나보다 훨씬 좋은 남자 만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날은 술이 웬수였고....
그리고 충분히 그럴 만한 애가 뭐땀시 나같은 아저씨랑...
"D도 20대 성인인데 미성년자는 아니지..."
"됐구요. 나 둘이 그런 사이인지 모르고, 과장님 병원에 누워있다고 말했어요. 보러 온대요."
"말렸어야지."
"둘이 사귀는 줄 알았음 말렸지."
"하아...아...나 또 혈압 올라간다..."
"얼굴이 하애지고 있구만 뭔 소리예요."
"나 이래뵈도 환자야. 소중히 대해줘."
"자기는 그렇게 소중히 대하라고 입버릇 처럼 말하는 사람이, D한테는 왜 그래요?"
"..."
"과장님이...아니...오빠가 D를 어떤 마음으로 집에 데려왔고, 도와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결국 둘이 좋아한거잖아요."
"..."
"나 두 사람 응원할께. 응? D가 얼마나 울었는지..."
그리고, 나도 장대리...아니. 장과장한테 내가 얼만큼 D를 좋아했었는지, 그래서 왜 D를 더 이상 내 신세지게하지않고 하고 싶은 공부 할 수 있게 해주고 떠나보냈는지...같이 지낸지 1년 좀 넘었지만,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기간동안 얼마나 내가 고민하고 갈등했는지, 들려줬다.
그리고 약기운 돌아서 말 길게 못할 것 같으니, 오유에 내가 쓴 글 좀 보고 와서 다시 이야기하자고 돌려보냈다.
그리고 다음에 다시 온 장과장은 들고있던 빽으로 내 어깨를 때렸다. 아팠다.
"공부 열심히 했더라."
"누구한테 들었어?"
"재단에서 알려줬지. 내가 일 쉰다고 거기하고 인연끊긴것도 아닌데."
"오빠...진짜...괜찮은거지?"
"두 발로 서있음을 감사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요. 술먹고 네 발로 기어갈때도 느낀 적 없는 벅찬 감동이야."
D는 빙긋히 웃는다. 그 빙긋히 웃는 미소에 내가 얼마나 마음이 설레였던지.
"자. 나 이제 잘 지내는거 봤으니까. 얼른 가서 장과장이랑 놀아줘. 나 이따 꼬맹이들이랑 동생와."
D는 철봉을 잡고 있지 않은 다른 내 손을 살짝 잡는다.
여전히 손이 차네.
"너 학사받고 석사박사 고민하지 말고 공부 할 수 있는데까지 하고, 중간에 다른 길 보이면 그리로 빠져서 해봐. 내가 회장님한테 지원 좀 더 해주십쇼. 하고 비빌 껀덕지는 되니까."
"고마워...항상 고마워..."
"뚝. 눈물은 엔딩크레딧 뜰때 흘리시고. 왜 과정 중에 눈물을 보일라그래."
"내 맘이지 뭐."
할머니한테 차곡차곡 송금했던 돈으로 D는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고 한다.
D는 제법 범생이 유학생 같은 테가 났다.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해대는지 아니면 시차 때문인지 감추려고 해도 눈 밑에 다크서클도 얼핏 보였다.
재활운동하러 내려가는 길에 연락도 없이 온 D를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버려서 모두의 관심을 끌어버리긴 했지만, 얼른 간호사들이 부축해줘서 일어날 수 있었다.
-D. 한국들어와서 과장님 보러 갈거예요.
라는 장과장의 까똟은 잠결에 게임하다가 귀찮아서 넘겨버렸는지 안 읽은 채로 있었다.
결국 들통나서 만날때에 대비해서 온갖 시뮬레이션을 돌렸었지만, 막상 만나니까 그냥 벙쪄버렸다.
"전화 까똟 메일 무시하지마. 나 그냥 아는 동생으로 생각해도 좋으니까."
"그래. 알았어."
"오빠 몸 다 회복하고, 그때 다시 나 생각해줘도 좋으니까."
"D. 나같은 아저씨 말고 언제든지 멋진 남자 만나 진짜 가슴떨리는 연애를 해보도록 해."
D의 주먹이 올라갔다가 내려간다. 살짝 어깨팍에 힘주고 있었는데...
"못난 소리 그만하고...나 진짜 잠깐 온거라...금방 또 가봐야돼..."
"그래. 공부하느라 바쁠텐데, 와줘서 고마워. 마음은 그래 먹고 있었어도 너 직접 보니까 좋네."
나는 D의 머리를 토닥토닥 해주었다. D는 부끄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과장님. 여기까지 나와도 돼요?"
"오래 무리해서 못 걸어서 그렇지. 사실 걸을 수 있다니까. 잃어버린 근력을 찾으려고 운동하는거야."
"봐라. D. 이 아저씨 걱정안해도 되겠다."
"그래그래. 걱정하지 말도록 해. 나는 여러분의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이지, 걱정을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니까."
"말은 잘해요. 가자. D. 언니들이 너 먹고 싶은거 다 사줄테니까. 이 사람 걱정하지 말고 오늘 내일은 언니들이랑 신나게 놀자."
"...오빠..."
"그려그려. 얼굴 봤음 됐잖아. 처음 봤을땐 나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리더니, 이제는 얼굴에 혈색이 도네. 그리웠지? 한국의 미세먼지?"
"추워요. 과장님 옷이 너무 얇아요. D도 감기걸리겠다."
"별로 안 추운데 장과장이 너무 뚜껍게 입은 거야. D 맛있는거 많이 사주고...D.너도 잘 놀다가 들어가. 내가 건강만 좋음 공항에 배웅이라도 갈텐데, 힘들것 같애. 다음에는 모시러가고 모셔다 드릴께."
D는 끄덕끄덕 거리고, 장과장 차를 타고 병원을 떠났다.
이 가슴이 시린건지 뭔지 하는 감정이 사그라들지를 않을 즈음...
"아!!!! 큰고모!!!!! 큰오빠 또 휠체어 안타고 서 있어!!!!"
오마니가 두 꼬맹이들 데리고 병원에 들어서고 계셨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서 집 청소도 좀 하기로 한 날이었고,
오마니는 오랜만에 서울 올라오셔서 집 청소 도와주신다더니, 친구들이랑 약속이 잡히셨다고 한다.
이따가 동생이 데리러 온다고 그러고, 저녁에 다른 사촌동생들도 넘어온다고 하더라.
돌아가자. 일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