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근세 중국의 경제 발전 - 그리고 자본주의 맹아론 (3)
게시물ID : history_468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2
조회수 : 94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06/13 13:13:49
지난 글 : 근세 중국의 경제 발전 - 그리고 자본주의 맹아론 (2) 3 수공업 명초의 수공업은 다들 아시다시피 관영수공업이 중심이었습니다. 명대 관영수공업 전담기구는 중앙과 지방으로 크게 나눌 수 있고, 중앙은 공부가 관할하는 계통, 내부(황실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설치한 환관기구)가 관할하는 부분, 호부가 관할하는 부분이며, 지방 계통은 도사, 위소등 군사기구과 관할하는 부분, 지방관이 관할하는 부분으로 나뉩니다. 공부가 이중 가장 중심적인 기구입니다. 공부 산하엔 4부인 영선청리사, 우형청리사, 도수청리사, 둔전청리사가 있었는데, 영선청리사는 관영수공업 전체를 관장하여 궁전, 성관, 사묘등의 건설과 보수, 황제나 황후, 친왕의 행렬 의장이나 각종 악기, 윤반장과 주좌장(명초 장호匠戶로 편성된 이들입니다. 윤반장은 교대로 수도로 번상하는 이들이고 주좌장은 한군데 박혀있는 장인임)의 명단 관리, 각종 목재, 기와, 유리와등 건축자재의 보관등이 주요 임무였습니다. 우형청리사는 군기, 군장, 예기의 재료 공급, 군기, 군장의 제조와 검사, 도기, 철기, 동전의 제작과 관리였고 도수청리사는 하천과 도랑, 제방과 저수지, 교량과 도로등을 수축하고 선박과 수레를 제작하며 직조와 도량형을 관장하는 역할이었습니다. 내부에서는 황제와 황실이 필요로 하는 사치품을 제작했는데 환관에 의해 통제되었습니다. 내부 12감에는 황제의 일상용품을 제작하는 사례감, 궁궐의 일반 직인이 소속된 내관감, 황실에서 사용되는 공예품을 제작하는 어용감, 사설감, 상의감등이 있었습니다. 호부에선 지폐발행, 동전주조, 제염 및 수공업 원료, 생산품의 관리등을 맡았습니다. 한편 지방의 수공업 체계는 위소가 관리하는 부분과 지방관이 관할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명대 위소 수공업은 주로 군사물자의 생산과 관련 있는데 병사들이 소요하는 갑옷, 도검, 활과 화살, 병거, 전선등을 제작했습니다. 지방의 관영수공업은 포정사 및 부의 하부조직이었는데, 잡조국, 직염국, 군기국, 보천국등의 기구가 설치되었습니다. 강남의 견직물, 도자기 생산에도 이들 관영수공업이 큰 역할을 담당하였죠. 이러한 관영 수공업 체제에선 '장호'의 부역이 동원되었습니다. 주원장이 원을 물리친 다음 전국의 장적을 편제하였는데 이 장적은 원래 원대부터 이어진 수공업자들이었습니다. 그 수는 약 20만호였고 그 외에 각지에서 선발, 보충하고 죄수를 충당하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들은 윤반장과 주좌장으로 나뉘는데, 윤반장은 지역에 거주하며 경사(북경)로 번상하여 부역기간동안 관에서 쓸 제품을 제작했습니다. 이들은 사는 거리에 따라 5종류의 순번제를 가졌는데, 경태 5년 (1454) 일률적으로 모든 반차를 4년에 1반으로 고쳤습니다. 주좌장은 경사에 거주하며 복역하는 장인을 말하는데 이들은 매달 10일 일하였습니다. 따라서 4년 1반인 윤반장보다 비교적 복역기간이 길었지만 정부로부터 각종 물자를 보조받는 헤택이 있었습니다. 존류장이라 하여 지방 관영수공업 중심지에 거주하는 장인도 있는데 이들 역시 지방에 거주할뿐 주좌장과 거의 비슷한 부류였습니다. 이는 위소 주변에 거주하는 군장 역시 비슷한 형편이었습니다. 또 조호라고 하여 소금생산을 전담하는 신분도 있었는데 이 역시 상당부분 원나라 이래의 유제였습니다. 명대의 관영수공업 체제는 방대하여 장인은 30만, 장인과 장인 1인당 5명꼴로 배당된 일반 부역을 합치면 180만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사농공상이란 신분관념 때문에 사회적 지위가 낮아 차별적 대우를 받았고, 윤반장의 경우 부역을 위해 경사로 올라가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습니다. 길게는 1년에 달하는 이동시간동안 소모되는 경비는 자기 돈에서 나가니까요;; 따라서 부역을 면하고자 월전을 납부하고 요역을 면제받는 행태가 널리 퍼졌고, 이러한 요역 강제에 저항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태업이나 실반, 도주 같은 행위가 그것인데, 도주한 장인들은 대부분 승려나 도사가 되는 경우가 많아, 성화연간 도사와 승려의 수는 50만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관영수공업의 효율이 낮아지고 도망자가 속출하였고, 마침 화폐경제가 발전하자 장인에겓 역을 은으로 대신 납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를 반장은이라 불렀죠. 성화연간에서 점차 확대된 이같은 추세는 마침내 가정 41년(1562) 모든 윤반장에게 반장은으로 역을 대신하라는 조칙에 이릅니다. 따라서 이 시기 즈음에는 관영수공업은 거의 몰락하고, 대신 민영수공업의 생산물을 화폐로 사들이는 시스템으로 바뀝니다. 물론 이전에도 장호들이 부역에 응하지 않는 기간에는 민간 수공업에 종사하여 돈을 벌었지만, 이제 완전히 반장은 제도로 돌아서며 민간수공업은 더 융성하게 됩니다. 특히 현저히 발전한 모습은 강남의 소주, 항주, 남경, 불산진, 경덕진등 도시 수공업에서 대표적이죠. 소주의 경우 송대부터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소항주, 라는 말이 나도는 것처럼 대표적인 강남 델타의 중심도시였습니다. 원말에는 장사성의 근거지였던 관계로 전란에 의해 타격을 입기도 했지만 15세기 중엽부턴 이전의 성세를 되찾고, 16세기에는 중국 최고의 상업, 수공업 도시로 거듭나 인구도 70만 이상으로 증가합니다. 기존에도 직염국이 설치되어 견직업이 발전한 터라, 장역제가 붕괴한 이후에도 환관인 직조태감이 거주, 이곳에서 황실에 쓰일 비단을 구매했는데, 이는 황실에서 요구하는 고급 견직물을 제조할 설비와 능력이 갖추어졌음을 뜻하죠. 황실뿐 아니라 지주, 사대부, 상인의 의복, 이불에 소용되고, 국내 뿐 아니라 해외수출용으로도 생산되 그 수요가 크게 증가, 소주 견직업은 유례없는 발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명말 소주에는 직기 몇 내지 수십대 이상을 가진 기호가 만여호에 달했으며, 기호중에선 번듯한 공방을 갖추고 장인 수십인을 고용하는 대경영도 존재했습니다. 견직업은 소주를 비롯 남경 호주 항주등 강남 대도시에서 발전하고, 15세기 중엽부터는 도시 주변 농촌에서도 광범위하게 발달하여 중소도시, 즉 시진이 활발히 생겨납니다. 도시수공업은 견직업 뿐 아니라 도자기 생산으로 유명한 경덕진, 철기 제조업으로 유명한 불산진 등에서도 발전합니다. 불산진은 천하사대진(한구진 경덕진 주선진, 불산진)의 하나이자 인구집중도시인 천하사대취(북경 한구, 소주, 불산)의 하나였습니다. 이곳은 주강의 수로교통 요지였고 광주를 통해 대외무역도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지리적 이점을 가진데다, 애초 철기 제조업, 견직업, 면방직업이 발전한 시진이기도 했습니다. 청대 건륭연간에는 철기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만 약 3만에 달했고 생산량도 거대하여 옹정연간에는 매년 3만 4000톤을 생산했는데 이는 산업혁명 이전 영국의 철강생산량(1만 7350톤)의 두배에 가까운 양이었습니다. 이러한 대량생산은 전국적 규모의 판로를 가졌다는 반증이기도 하죠. 도시 수공업과 함께 소농민 경영의 농촌 수공업 역시 발전합니다. 특히 강남지역의 농촌 수공업이 발전했는데 뽕나무, 목화등의 상품작물 재배, 양잠업, 제사업이 널리 행해졌습니다. 한 예로 송강부는 '벼가 3할, 면화가 7할'이라 할 정도로 면화재배가 활발해 중국 면방직업의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너무 급성장한 나머지 한때는 원료인 면사의 부족을 호소할 정도였으나 화북지방의 면재배가 증가한 이후 수운을 통해 원료를 공급받게 됩니다. 이들 지역은 세량을 면포로 대납할 정도였죠. 그런데 농촌 수공업은 어디까지나 영세한 규모로 생산 전과정을 행할 수 없기에 한 분야만 담당하여 전업화하였습니다. 자금 역시 부족하였기에 상인자본이 이런 생산 단계마다 개입, 폭리를 취했기에 농민들의 불만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이하는 사설입니다.// 지난 글에서 덧붙이지 못한 사설을 덧붙이자면 중국과 조선의 인삼 무역이 황금기를 맞이하는것은 18세기 홍삼이 개발되면서 부터 시작이 된다고 볼수가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독이 들은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정도로 맛과 품질이 떨어졌고, 또한 이송중에 파손되는 양도 상당히 많아 이윤을 남기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더하자면 일본과의 인삼무역이 절정을 이룬것은 17세기로, 다만 일본이 계속되는 수입량을 못버티고 인삼 국산화에 목숨 아니 국운을 걸어서 1700년경에 조선의 인삼을 국산재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이후로 조선으로 부터의 인삼 수입이 줄어들었습니다, 아무튼 숙종의 재위 시절이 괜히 조선의 부흥기가 아닌것이죠,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