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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역사소설]대한제국 200년사 -(7)대마도병합
게시물ID : history_468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2013년체제
추천 : 27
조회수 : 1405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2/06/12 18:06:13
따스한 봄볕이 갯벌에 내려앉고 훈훈한 봄바람이 조개 캐는 아낙들의 볼을 희롱하는 맑은 봄날이었다. 거제도 구조라 해안에서 조개를 캐던 아낙네들은 멀리 수평선에서 조금씩 가까워 오는 수상한 배들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혹시 저것들 왜구 떼 아닌감" 
"글시, 요즘은 통 안 나타나더니만"
"어메야, 왜놈들 맞는갑다" 


배의 윤곽이 어슴푸레 보이게 될 무렵, 조선의 어선이나 군함이 분명히 아니란 걸 알아챈 아낙들은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여 관가부터 알려야제" 
"알리마 뭐하노, 저거들 먼저 도망가기 바쁠낀데" 


진주댁은 10여 년 전, 자신의 눈앞에서 왜구 떼에 의해 남편과 아들 둘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도 두 놈한테 번갈아 능욕을 당한 후, 자신을 겁탈한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어린놈에게 애걸복걸해 겨우 목숨만 부지하여 살아났던, 지옥보다 더 끔찍하고 치욕스러웠던 그 날의 공포가 다시 몰려들면서 눈앞이 까마득해 옴을 느낄 수 있었다. 


다 큰 딸 애는 자신과 같이 겁탈을 당한 뒤 어디론가 끌려가 버리고, 혼자 남은 어린 딸 년 땜에 죽지도 못하고 버텨온 질긴 인생이었다. 진주댁 뿐만 아니라 동네에 같이 사는 그 어느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은 집이 없던 터라 왜구 떼라면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고 징그러웠고, 다들 왜구 떼가 근처 출몰했다는 소식만 들려 와도 남은 피붙이들을 데리고 살림살이를 챙겨 허겁지겁 죽을힘을 다해 깊은 산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 열흘이고 보름이고 왜구 떼가 물러날 때까지 풀뿌리를 씹으며 지탱해온 불쌍한 삶들이었다. 


왜구의 출몰 소식을 전해들은 거제현감은 통영에 있는 경상우수영에 급히 파발을 보내고 황급히 군사를 모아 해안으로 가서 대적하게 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관군이 몰살하고 거제섬 일대는 왜구 떼의 살인과 강간, 약탈과 방화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순조가 즉위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쓰시마섬(對馬島)을 근거지로 하는 왜구 떼가 조청전쟁으로 남쪽 해안 경계가 소홀함을 틈타 경상도 해안에 자주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다가 급기야는 거제감영에 까지 난입해 현감을 살해하고 딸을 납치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폭행 당한 부인은 자결을 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왜구 떼의 이러한 만행에 분노한 제국 내각은 즉각 제국군 총사령관 홍경래에게 토벌 원정군을 출동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홍경래는 평안도 출신으로 서북인의 차별에 불만을 품고 한 때 반란을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대한제국의 수립 이후 신분상의 차별이 급속히 완화되자 거사를 접고 관망하던 중, 그의 자질을 높이 평가한 평양감사의 천거로 새로이 조직된 제국군의 장군으로 입대하여 은퇴한 목용검의 후임으로 제국군 총사령관의 중책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새로 건조된 구축함 이순신호를 앞세운 제국 해군함대는 대마도 인근해역에서 영세한 왜구 떼의 해적선들의 저항을 가볍게 제압하였고, 뒤이어 대마도에 상륙한 제국 해병대 병력 3천명은 해적들의 본거지인 대마도 영주의 성을 함락하고 영주 일당을 처단하였다. 


제국 내각은, 세종대를 비롯해 과거 몇 차례의 대마도 정벌이 있었으나 효과는 그 때 뿐이었고 조금 조용해지면 어김없이 재차 노략질에 나서는 왜구들의 본거지를 발본색원하기 위해, 이 번에는 아예 해병대 병력을 대마도에 상주 주둔시키기로 하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1823년) 


대한제국군의 대마도 정벌 소식을 접한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쇼군(將軍) 이에나리는 대한제국 내각에 사신을 보내, 왜구들의 노략질은 일개 도둑들의 소행이지 대마도 영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인데도 트집을 잡아 불법으로 대마도를 침략하였다고 강력히 규탄하고 즉각 병력을 철수하고 배상하지 않으면 전쟁도 불사한다는 경고를 보내왔다. 


그러나 대한제국 내각은 재발 방지를 위한 확실한 보장과 사죄 없이는 대마도에서 철수할 수 없다고 단호한 방침을 통보하였다. 한일 양국간에 전운이 감돌자 조야에 논쟁이 들끓었으나, 이번 기회에 임진왜란의 복수를 갚자는 제국당의 강경론이 우세해 지면서 내각과 제국군은 전시 체제로 돌입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수군의 고전으로 패전한 일본 막부는 나카사키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에 도움을 청하였다. 일본의 지원 요청에 접한 네덜란드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 본토가 프랑스에 점령당하는 등 국력이 점차 쇠진해 지고 자신들이 선점해 있던 아시아에서도 뒤쫓아 온 영국과 프랑스에 점점 밀리는 기색이 역력해 지자, 이 기회에 일본을 완전히 장악하여 해상왕국으로서의 옛 영광을 되찾고자 하였다. 네덜란드는 전함과 해군을 지원하는 대가로 현재 큐슈섬의 나카사키에 국한되어 있던 무역을 본토인 혼슈우섬으로 확대해 줄 것을 요구하는 한편 에도의 관문인 요코하마를 추가로 개항해 줄 것을 요청하여 막부의 수락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


 네덜란드는 조선의 배후에 영국이 있음이 걱정되긴 했으나 영국이 자국과 전면전을 불사하지는 않으리라는 도박을 걸게 되었다. 이러한 다소 모험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에는, 본국이 나폴레옹에 점령당한 틈을 타 자국의 식민지인 자바섬(현 인도네시아)을 영국이 강탈한데 대해 악감정도 많이 쌓여 있던 터였고, 최악의 경우에 영국과 전쟁 상황으로 돌입한다 하더라도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의 해군력이 그렇게 막강하지 않다고 판단을 내린 데 따른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점차 각지의 해안에 이양선이 출몰하는 횟수가 잦아지고 이들의 통상요구가 끊이지 않자 점차 불안감을 느껴오던 상황이었고, 영국의 협조로 조선의 국력이 급속도로 신장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하고는 더욱 심각한 위기감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 와중에 대마도 사건이 발생하자, 200년간 우호적 관계를 지속해 오던 네덜란드의 기득권을 조금 넓혀 주는 차원에서 타 서양 국가들의 접근을 견제하기로 하는 한편, 그들의 도움으로 전쟁을 도발하여 조선의 성장을 미리 꺾어 버리는 동시에 자국의 부흥을 모색해 보기로 결정을 내렸던 것이었다. 또 임진왜란 이후 200년간 정권을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막부에 대한 반대 기운이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던 터라, 국내의 관심을 전쟁으로 돌려 자신들에게 겨누어 질 수도 있는 지방 영주의 군사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정치적 음모도 전쟁의 한 배경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과 네덜란드의 판단은 결국 오판이었다. 네덜란드는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유럽을 대혁명 이전의 구체제(Ancient Regime)로 되돌리기로 결정한 빈(Wien) 회의의 결정에 따라, 영국으로부터 되돌려 받은 자바 식민지에 주둔하고 있던 자국 해군을 대한해협으로 출항시켰다. 


네덜란드 전함이 자바섬을 떠나자 영국 정부는 네덜란드 왕실에 개입하지 말 것을 강력히 경고하고 나섰고, 네덜란드는 결국 영국의 압력에 굴복해 뱃머리를 대만 연해에서 돌리고 말았다. 자욱한 안개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짙게 깔린 새벽 바다에서 네덜란드 전함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일본 수군은, 갑자기 바로 코앞에서 유령처럼 불쑥 나타난 이순신호의 출몰에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제국 해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궤멸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한일 양국은 전쟁 후 후쿠오카에서 만나, 일본은 대마도에 대한 조선의 병합을 인정하고 시모노세키와 가고시마 두 항구를 대한제국에 개방하기로 하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되었다. (1825년) 시모노세키와 가고시마는 각각 죠슈(長州)번과 사쓰마(薩摩)번의 중심도시로 이들 두 지역은, 폐쇄된 막부치하의 여타 지역과는 달리 대한제국의 영향으로 급속히 개화되어 후일 막부타도와 왕정복고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전쟁의 패전으로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의 지배권은 급속도로 약화되고, 무장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각지의 봉건영주들의 군웅할거식 패권 다툼으로 일본은 다시 전국시대로 되돌아 가버린 형국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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