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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중국의 경제 발전 - 그리고 자본주의 맹아론 (1) 2 상업 중국에서 상업은 일찍부터 발전하였습니다. 상인이란 말이 상나라의 후예들이 뿔뿔히 흩어져 교역에 종사하였다 하여 생겨났는데, 액면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겠지만 고대부터 상인이란 존재는 발견되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전국시대에도 각지의 특산물과 산림수택의 자원을 교역하는 상인들이 왕이 부럽지 않은 재산을 쌓기도 했고 한나라 초기의 오수전 주조에서 보듯 국가는 화폐주조등으로 경제를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발전은 역시 송대의 상업혁명 이후 상업의 일대 도약이었습니다. 송대 도시화의 진전, 전국적 시장의 형성, 농산물의 상품화, 인구의 대량 이동 등이 그 단초였죠. 명대에도 원 이래 계승한 역참을 포함해 새로운 도로를 정비하고, 북경 천도 이후에는 조운을 위해 영락 9년 회통하를 개통하여 "항주에서 개봉까지 수륙 2천리 길이 마치 고향길처럼 익숙하고, 방에서 부엌 가는 것처럼 편리하며 안방에서 쉬듯이 안락했다' 고 하여 남북물류의 주요 통로가 되었습니다. 송대에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발전한 양자강 하류지역은 명대에 들어 대운하의 정비, 양자강 수운의 발달로 상업화가 특히 진전되었는데, 명초 절강과 강소 두 성에 전국의 3분의 1에 달하는 도시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유럽 교역 체계에서 보면 네덜란드와 비슷?) "하늘에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 항주가 있다" 라고 할 정도로 이들 도시들의 번화함은 도리어 수도 북경을 능가했습니다. 이러한 강남의 상업경제 발전은 상품작물의 재배로 촉진되었습니다. 명대에 이미 면화재배가 보편화 되어 면직물이 일반화 되자, 종래의 견직업과 더불어 면화재배, 면방직업도 증가하였습니다. 송강과 태창(둘다 절강성)지역은 "논농사 대신 누에를 치는 집이 열 가구중 일곱 집이 넘고" 가흥과 호주에서도 "백성의 생업중 베농사가 으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종래의 곡창지대였던 장강 하류지역이 급격히 상업화 되자, 양자강 중류지역인 호광성이 급속히 개발, 이들 지역에서 방출한 쌀이 강남으로 팔려나가 '호광숙이면 천하족'이란 말이 유행했습니다(송대에는 소호숙이면 천하족이었죠). 청대에는 사천지방이 다시 발전하여, 사천의 쌀은 호광으로, 호광의 쌀은 강남과 북경으로 흘러가는 체제가 만들어졌습니다. 미곡의 흐름과 반대로 양회염장의 소금, 복건의 담배, 절강의 견, 면직물, 각종 수공업 제품등이 장강 하류와 대운하를 따라 북방으로 이동했죠. 이와같은 전국적인 분업체계가 명청시대에는 확고히 성장했던 것입니다. 또, 상업과 농업의 발전은 기존의 행정도시뿐 아니라 전문 상업적 도시인 '시진'의 증가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원래 농촌의 정기시가 상설화되고, 다시 도시화된 시진은 지방의 농산물, 임산물등을 집산하여 주요 상업도시로 유통하고, 반대로 주요 상업도시에서 수공업, 소금, 소비품등을 집하해 농촌으로 보급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명중기 이후 이러한 시진은 폭발적인 성장을 지속했는데, 특히 강남지역이 돋보입니다. 소주부의 시진은 정덕연간에서 명말까지 72개에서 104개로 증가했고 송강부의 시진은 정덕연간에서 숭정연간까지 44개에서 61개로, 숭정연간에서 건률연간까지 61개에서 116개로 증가했습니다. 시진의 수뿐 아니라 시진의 인구 또한 대규모로 증가했습니다. 예를 들어 소주부 오강현 성택진은 명초에는 50~60호에 불과한 촌락이었는데 성화연간에 주민이 증가하고 상인이 유입되더니, 가정 연간에는 주민이 100여호로 증가하고 천계연간(1621~67)에는 1천여호, 강희 연간에는 주민이 1만여호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음은 만력연간의 한 관리가 정리한 각 지방의 특산물입니다 직례(하북성); 기장, 당나귀, 과일 하남: 칠기, 갈포, 솜, 가죽 섬서: 소, 양, 모직물 산서: 철, 감, 석탄 사천: 주사, 동, 주석, 대나무 산동: 마, 사면, 포면, 목면, 소금 호광: 생선, 밤, 쌀 절강: 잠사, 견, 비단, 생선, 소금 강서: 대나무, 금, 은, 주석, 도자기 복건: 과일, 차 광동: 차, 도자기 귀주: 수은, 모래 일본: 백은, 금속 동남아: 후추, 향료 (조선이 없다는게 좀 안습입니다 ㅜㅜ 인삼이 유명하지만 그걸론 교역량이 한계가;;) 이런 산업의 분화는 당연히 전국적 유통망의 존재를 전재로 해야 겠지요. 이같은 상업 발전은 당연히 사람들의 사고방식에도 변화를 주는데, 기존의 농본사상이 흔들리는 것도 당연합니다.
특히 이러한 풍조에 의해 개인의 자연적 욕망을 긍정하는 왕수인의 양명학이 주목을 받고, 실질적인 '신사민론' 과 '치생론'을 논하기에 이릅니다. 당시의 한 지식인은 "남자는 치생이 급선무다. 농업과 상업, 공업중 한가지 일을 선택하여, 그 일에 전념하고, 지나친 이익을 탐하지 않는 것이 항구적인 일일 것이다" 이러한 풍조는 당시 종족宗族의 족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9세에서 15세까지 공부를 시켜보고 가능성이 있으면 전폭 지원을 하되, 만약 그렇지 못하면 다른 일을 시키도록 하라. 상업은 항구적인 직업으로 생활에는 문제가 없다. 절대 하는 일 없이 무료하게 보내는 화를 자초하면 안될 것이다" 이는 송대 사대부가에 유행하던 "장사는 가문의 수치이니 자손들이 접하지 못하게 하라" 라던가 "출사하지 못하면 농사를 짓는 한인 있어도 절대 시정의 소인배들이나 하는 장사에 뛰어들어선 안된다" 라는 생각에서 "사민은 단지 직업이 다를 뿐 모두 같은 도를 추구한다" "농업과 상업이 모두 나라의 근본이고 백성들의 생명" 이며, "중본억말이 틀리다 할 수 없으나 본업이 중요한 만큼 말업도 경시하면 안된다. 천하에 농부만 있고 상인이 없다면 어찌 나라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와 같은 명대의 생각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이렇게 도시와 시진이 증가하고,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여 전국적 규모의 교역망이 형성되자 자연 '객상'이라 불리는 원거리 무역 상인들이 증가했습니다.(전국구 상인이라 불러야 할듯) 명대 가장 유명한 객상집단은 '산서상인'과 '휘주상인'이었고, 이 외에도 산동, 섬서, 동정, 용유, 영파, 강서, 복건, 광동등 상인들의 출신지에 따라 다양한 상인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분류는 스스로 하기 보다 다른 지역 사람들과 구분되어 불린 것으로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었습니다. '산서상인'은 명초 개중법으로 큰 이문을 본 상인집단이었습니다. 개중법이란 변경의 군량과 무기 조달을 상인들에게 하청하고, 이렇게 군량과 무기를 조달해준 상인에게 '염인'을 지급하여 소금의 독점판매권을 부여한 것입니다. (한대 이후 소금은 대표적인 전매품이었습니다) 산서상인은 변경지인 산서출신이란 이점을 이용, 산서지방에 대규모 개간을 통해 많은 곡식을 변경 위소에 조달하고 이를 통해 소금의 전매로 막대한 부를 형성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명 중기 이후 은경제가 발전하며 곡물 대신 은을 납부해야 염인을 얻도록 염법이 변경되자, 휘주 상인 산서 상인을 밀고 전국 제일의 대상인 집단으로 거듭났습니다. 이들 휘상은 소금의 대산지인 양주의 양회염장의 소금을 독점적으로 유통, '양주는 휘주의 식민지다' 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소금뿐 아니라 화북의 면화, 호광의 쌀, 안휘의 목재와 차를 강남지방으로 반입하고, 강남의 생사, 면직물, 견직물을 반대로 반출하여 막대한 유통이익을 거두었습니다. 특히 휘주상인의 본거지인 휘주는 대유학자 주휘의 본향으로, 휘주 상인들 역시 스스로를 '유상儒商'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원래 원활하게 장사를 하기 위해선 지방의 유력 사대부나 관료층과 친밀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유교경전을 공부하고 지역의 사대부나 문인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양서수집이나 그림, 골동품등에 많은 투자를 하고, 지역의 문화사업과 교육, 구휼사업, 도로정비, 교량건설등에 자금을 투자하길 주저하지 않았고, 이런 공로에 힘입어 휘주에는 황제로부터 허가받아야 설치할 수 있는 패방(牌坊)이 한마을에 10개나 모여있는 장관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종족 자제들의 교육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아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기도 하는 등, 관과의 관계에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비록 염법의 개정으로 소금전매의 주도권을 빼앗겼지만, 산서 상인 역시 석탄, 철, 소금, 과일등의 지역 특산물을 유통하고, 일부는 양회염장이나 강남지방으로 근거지를 이동해 휘주상인과 각지에서 치열한 각축전을 벌여 천하 양대 상방으로 회자됩니다. 이들은 청 후기 금융업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는데, 현대식 은행업무인 송금을 전담하는 '표호票號'를 설립했습니다. 이들은 주요 도시에 지점을 설치하고 고객들이 원하는 액수의 금액을 지정된 날짜에 송금해주는 정확함과 신뢰를 자랑하여 함풍이후에는 정부의 공금 송금도 담당했습니다. 광서 연간에는 조선 신의주, 일본의 고베에 지점을 설치하기까지 하여 국제송금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지연과 학연으로 뭉친 상인 집단은 타지에 동향회관을 설치, 동향 상인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상호간의 지나친 경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회관은 또 동향관리들과의 모임을 통해 중간 대리인인 아행(牙行거간꾼)의 지나친 요구나 사기, 현지인의 텃세에 대항하고, 장사에 실패한 사람을 돕거나 사고로 숨진 자의 후사를 돌보는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청대 이후 시장경쟁이 치열해지고 지역간 경게가 느슨해지며 지역성은 약하고 전문 행업 성격이 강한 '공소'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렇게 상인의 지위가 높아지자 종래 '신' 과 지방의 '사'를 연칭하여 명대의 지배층으로 불렸던 '신사'층에 대신해, 청대에는 '신상'이라는 용어까지 생길 정도로 상인의 지위가 상승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상인의 사회적 지위가 자연스럽게 높아진 결과이며, 특히 청대엔
상업경제의 확대에 따라 국가 재정에 이들 상인이 담당하는 비중이 커짐으로서 나타난 현상이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