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서론 최근의 중국사 연구는 기존의 고대-중세-근대 시대구분론이 현대 역사학에선 그 힘을 잃고, 세계사적 보편성을 추구하기 보다 중국사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연구추세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왕조구분이 아닌, 사회전체의 구조적 변경을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고 특히 이러한 시대구분 속에 명, 청시대는 중국사의 한 획기라 구분지어집니다. 과거 서구 연구자의 시선에선, 특히 제국주의 시대의 서구 연구자들은 중국사를 '아시아적 정체'라 규정짓고 역사적 발전상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막스 베버는 중국사회를 '전제군주와 그 가신적인 관료집단이 농민을 착취한 거대한 수탈기구'로 규정하고 진한제국에서 청나라까지 2000년을 역사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정체된 시기라 규정합니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 이후 서구사회의 일방적인 우위가 점차 사라지고, 아시아의 독자적인 역사학발전이 이루어진 지금 중국사 연구에도 많은 진전이 있었습니다. 얼핏 '분열과 통일'의 반복으로만 보이는 중국의 역사도 실은 그 이면에서 부단한 변화가 전개되어 왔다는 것이 가시적인 연구성과로 나타난 것이죠. 제왕과 그의 조선신을 숭배하여 신정정치를 통해 원시적 봉건제 국가를 만든 상(은), 이런 은의 종교적 통치를 타파하고 종법질서-예를 통해 제후를 통치한 주. 이로부터 경제적 발전으로 인한 계급분화와 이를 통해 종래의 봉건적 질서가 파괴된 춘추 전국시대, 그리고 이를 다시 통합하여 제민지배체제를 수립한 진, 한제국. 그리고 중앙권력의 이완에 힘입어 세력을 얻은 호족이 사회의 주도층이되고, 나아가 후한의 붕괴와 재통합의 시기에서 문벌귀족이 형성, 장악한 위진남조. 그리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북방유목민과 서방의 불교문화가 전면적으로 중원으로 침투한 남북조시대. 이런 혼란기를 수습하고 새로이 유입된 서방과 북방의 문화요소를 융합한 수, 당제국. 당제국까지 남아있던 고대 귀족제적 요소가 사라지고, 사대부-중소지주층이 새로이 사회의 주도 세력이 되어 전제황제체제와 신유학의 발흥을 일구어네고, 상업혁명이라 불릴 정도의 경제적인 발전을 이룩한 송, 세계제국으로서, 전중국을 최초로 지배한 유목제국 몽골. 그리고 근세적 요소가 뚜렷이 나타난 명과 청. 이런 조야한 정리로도 중국사의 전개과정이 단순한 분열과 통일에 있지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명청시대는 과거의 어느 시대보다 근세적인 면이 부각되고, 그만큼 많은 사회, 경제적 연구가 진행되어온 시대였죠. 여기서는 명, 청시대의 경제발전상을 농업, 공업, 상업이란 측면에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서두가 너무 번잡하네요;;; 스킵해도 무방한 이야기임;;) 1. 농업 예전에 게시판의 어떤 분이 '양적인 발전만 있었지 질적인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라고 근세중국의 경제발전을 혹평하셨습니다만, 사실이 그랬을까요? 북송대 송나라는 중국역사상 최초로 인구 1억이 넘었습니다. 이후 잦은 전란과 재해의 반복에 인구는 부침을 거듭했지만 대체로 명중기~말기엔 1.5억에서 2억으로 인구가 증가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후 청의 입관전후로 역시 많은 인구가 줄었지만 청조의 안정기에 접어들어 인구는 또다시 격증, 19세기에 4억을 돌파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인구의 격증은 과도한 인구압으로 인해 무수한 사회문제를 낳게 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어떻게' 이렇게 인구가 급증할 수 있었고, 또 일단 이러한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는지, 입니다. 명초에서 청말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인구는약 7배가량 늘어나지만, 경지면적은 이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경지면적당 생산량의 증가와, 신대륙 작물의 재배로 이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근대 영국의 농업혁명이 윤작법으로 이를 해결했다면 중국은 단위면적당 곡물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집약적 농업이 심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근대농업의 특징인 '투입시간 대비 생산력 증가'가 아니라 면적 대비 생산력 증가라 전근대적 한계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 송내 1무당 미곡 생산량은 태호 주변 지역이 450근(1근은 0.5킬로그램)이었는데, 명대에는 667근으로 늘어납니다. 안휘 지역은 송대 300근이었으나 청대에 이르면 400근 가량으로, 호북성은 송대 200근에서 명대 240근, 청대에는 335근으로 증대됩니다. 호남에선 송대 200근, 명대 240근, 청대에 이르면 445근에서 675근에 달하는 생산력의 발전이 일어납니다. (명대에는 호북성이, 청대에는 호남성이 주요 곡창지역으로 부상합니다. 둘이 합쳐 호광성이라 불렀습니다) 복건 지역은 송대 360근에서 청대 540근 가량으로, 광동 지역은 명대 410~538근 가량인 것이 청대 532근~540근이로 증가했습니다. 사천은 청나라 들어 가장 큰 발전을 한 지역으로, 송대156근이던 생산량이 청나라 들어 243~550근으로 대폭 성장합니다. 이렇게 단위토지당 생산량의 발전을 위해 명대에는 절기에 따라 해오던 쟁기질, 씨뿌리기, 모내기, 거름주기, 잡초제거 등을 정형화 하였고, 청대에는 해충구제를 위한 살충제까지 만들기에 이릅니다. 시비법의 발전도 물론 나타나, 각종 유기질, 무기질 비료가 나타나고, 비료사용량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벼농사에 필요한 노동량과 비료투하량의 총 투하량 중에서 비료투입량의 비율은 명대에서 청대로 가면서 27%에서 50%나 증가했습니다. 수리 시설 또한 발전하여, 명대에는 농정전서, 청대에는 수시통고등의 종합 농서에 많은 수리농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기할 것은 명대에는 서양의 수리 기술 역시 소개되었는데, 불행히도 중국의 실정과는 안맞는 도구들이 많아 그리 큰 보급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품종 개량 역시 송대 이래 활발히 일어났습니다.(비교하긴 좀 그렇지만 서양 중세 농업의 효율성과 비교하면 ㅡ,.ㅡ;;) 송대 가뭄에 강한 점성도란 품종의 개발로 쌀 수확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명, 청시대에는 이러한 품종개량이 더욱 늘어나, 60일벼, 80일벼, 100일벼, 120일벼 등의 다양한 벼 품종을 다른 잡곡들과 결합, 1년 2모작, 2년 3모작의 다양한 경작패턴으로 곡물생산량을 늘려나갔습니다. 명대의 지방지에는 명말청초 메벼 739종, 찰벼 384종이 기록되어 있고, 청대 강소성의 지방지에는 1432종의 벼품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명청시대에는 토양과 기후조건에 세분화된 품종개량이 많았는데, 예를 들어 보통의 논과 밭에는 메벼를 심고 좋은 밭에는 찰벼를 심었다고 합니다. 밭벼 품종에는 소망도, 소황도, 심수홍등, 논에는 유월선, 엽리선, 타리귀, 소백선 등의 벼를 재배했다고 합니다. 또 밥에 향기가 나는 향갱, 향자나, 홍련도, 간자나, 양조에 적합한 금차나 아자나등 상품화된 벼품종도 생겨났습니다. 이런 벼품종 중 가장 고급스런 쌀은 진택미, 특히 그 중 백도는 보통 쌀보다 10~13배 정도 높은 가격에 팔렸습니다. 이는 상업적인 쌀재배를 시사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품종 개량, 시비법, 농사법의 개선은 그만큼 광범위한 지식의 보급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죠. 명청시대에는 특히 농서가 많이 출간되어, 명대에는 370종, 청대에는 1000종의 농서가 간행되었습니다. 많은 농서가 인쇄되어 대량 보급되어 농업경영에 도움을 주었죠. 특히 이 시대 농서의 특징은 전문적인 농서의 증가로, 차, 양잠, 야채 등 환금작물 관련 농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명대에는 차의 소비량 증가로 차와 관련된 농서가, 청대에는 양잠, 뽕나무 재배를 다룬 잠상 농서가 많이 간행되었습니다. 또 실용성과 조작 기술이 풍부하고 상세하며, 각 지역의 지형, 토양, 기후등 환경적 특성에 맞는 농서가 늘어났습니다. 명대 태호인근을 대상으로 한 '도품' 청대 '강남최경과도편' '포묘농자' '마수농언'등이 그 예입니다. 그 이외에 병충해 방지에 관한 농서도 출간되었는데, 강희연간에 편찬된 '포황고'에선 메뚜기 퇴치법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경지면적 증가와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증가해 18세기 양자강 중, 상류 지역에서 양자강 하류 지역으로 팔려나간 미곡은 연간 900~1400만 석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미곡의 상품화가 명청시대의 상품화폐경제에 기여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또 미곡 수확의 개선뿐 아니라 옥수수, 고구마, 감자의 전래 역시 식량생산을 확대시켰습니다. 특히 옥수수나 감자는 기존에 이용하기 힘들었던 산악지역으로의 수직적 전파를 가능하게 했는데, 이는 인구증가 뿐 아니라 대규모 목장, 광산 개발에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이해 산악지역의 토사가 유실되는 등 환경파괴도 심해진 것은 대표적인 부작용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