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사 관련 서적과 흥미로운 읽을거리로부터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색의 책들은 로마의 거대한 인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을 받는 부분은 로마시(市)의 인구 부분입니다.
로마시의 인구는 공화정 말기에 75만에 이르렀고 기원전 2세기 중엽에 100만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1] 제정기에 이르면 거진 100만에 달하는 주민들이 로마시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1세기경에 지어진 막시무스 전차 경기장의 수용 인원이 약 25만 명이었고 그 외에도 여러 경기장이 계속 건설되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로마시 인구가 특별히 과장되었다고 할 것도 없는 노릇일겁니다.
문제는 이런 놀라운 수치가 주는 흥밋거리와 달리, 실제 위정자 측에서는 이 조밀한 곳에 운집한 거대한 군중들에게 식량이 제때, 제대로 배분될 수 있도록 하는데 많은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캄파니아와 같은 주변 이탈리아 지역이나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데냐 섬 등에서의 곡물 생산은 수송비용이 해운보다 더 크거나 로마시를 먹여 살릴 만한 정도까지는 되지 못했고 이상 기후가 발생할 때마다 작황이 크게 달라졌던 까닭에 로마시의 곡물가를 조절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을 따름이었고 실제는 북아프리카와 이집트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아프리카, 이집트로부터의 곡물 수급은 해운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했는데 지중해는 겨울에 폭풍이 잦았고[2] 말타나 킬리키아의 해적들로 인한 해상의 위협도 상당한 편이었습니다. 여기에 전염병과 작황 변동, 전쟁이 겹치면서 기원전 104, 100, 91-89, 87, 86, 82, 75-73, 67, 57, 49, 44, 43-36, 22년, 서기 5, 9, 51, 64, 68-70년에 크고 작은 곡물 위기가 발생하곤 했습니다.
공화정 말기로 갈수록 거대한 로마시에 효과적으로 곡물을 공급하는 일은 힘들어졌으며 그 결과 만성적인 곡물가 폭등, 기아 등이 발생하곤 했습니다. 제정기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기존에 원로원이 책임졌던 곡물 공급 관할권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이관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는 재위 6년(기원전 22년)에 발생했던 식량 위기 당시에 처했던 위기[3]를 상기하며 로마시의 만성적인 곡물 공급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했습니다.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는 이 때부터 서서히 황제의 영향력이 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이집트는 황제를 대신하는 행정 장관이 배치되고 황실 성원조차도 출입이 제한되는 등 철저한 황제의 사유지역화가 진행되었으며[4] 북아프리카에서도 대토지 귀족들을 몰락시켜가면서 절반이 넘는 토지를 황제가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를 기반으로 하여 많은 곡물들이 로마를 급양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매년 로마로 수송된 2,000만 모디우스의 곡물은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년에 선정한 20만 명의 무상 곡물 배급 수혜자들의 수요량 1,200만 모디우스를 충당하고도 남았으며 전체 로마시 수요량의 1/3을 충당했습니다. 나머지 2/3 가까이는 북아프리카산 곡물로 충당되었으니[5] 고대 제정기의 로마에 있어서 북아프리카와 이집트가 가지는 의미는 순수한 경제적 의미를 넘어서서 정치적으로 중차대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후대에 종종 보이듯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의 곡물 운반을 단절시켜 로마의 통치자를 곤란하게 만드는 사태가 발생했던 데는 이러한 원인이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로마의 체제(프린키파투스)가 아직 공고하던 제정 초, 중반기에는 이집트, 북아프리카로부터의 곡물 수급이 비교적 안정적이었고 여러 황제들의 조치, 곧 오스티아 항구의 건설, 운하의 건설, 겨울철 곡물 손실에 대한 보상 약속(클라우디우스 황제)들이 수반되면서 점차로 안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곡물 공급 권한을 통해 시민의 강력한 지지가 유지되면서 아우구스투스가 굳건한 경제적 권력에 근거하여 세운 프린키파투스 체제는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로마 제국을 지탱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프린키파투스 체제가 본격적으로 이완되기 시작한 것은 서기 4세기, 옛 수도 로마시의 강력한 적수로 신 로마시가 등장하고 이집트산 곡물의 수급이 구 로마에서 신 로마로 전환 되면서부터였습니다. 곡물의 공급이 대폭 감소한 것과 달리 인구는 여전히 50만이 넘는 상황에서 곡물 수급이 매우 불안정해졌으며 여러 행정상의 변화를 겪으면서 로마시는 점차 소규모로 변해갔습니다.
동방의 여러 대도시들은 여전히 그 규모를 유지했으며 새롭게 건설된 트라키아의 로마시는 이전에 이탈리아의 로마시가 누렸던 곡물 공급의 혜택을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양상은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시점에 큰 변화를 겪게 되고 곡물 수급은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없이 자립하는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이 다음 부분과 다다음 부분에 걸쳐서 기술하게 될 내용의 대강입니다.
이하는 주석입니다.)
[1] O. F. Robinson, Ancient Rome: City Planning and Adminstration, 8-9쪽 참고
[2] 사도 바울(바울로 혹은 파울로스 등등)은 로마 시민의 자격으로 네로 황제에게 판결 받기 위해 상경할 때 알렉산드리아발 곡물 운반선에 탑승하였으며 겨울 지중해의 폭풍에 휘말려 배가 좌초되는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 겨울에 곡물 운반선이 손상될 확률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습니다.
[3] ‘그 때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친구들과 몇몇 수행원들 등과 함께 포룸으로 갔는데 이는 로마 시민에게 탄원하고 그들의 불만들에 대한 비합리성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모습이 포룸에 나타나자마자 로마 시민들은 그에게 무자비할 정도로 돌을 던졌고 로마 시민들은 옥타비아누스가 이러한 모욕적인 처우를 참고 그가 입은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런 수치심도 갖지 않았다.’ - 아피아누스, <내전사> 5권, 67쪽
[4] 아우구스투스가 저작한 <업적록>에서는 ‘이집트를 로마 시민의 판도에 부가시켰다’고 기록하였으나 실제로는 황제가 직접 지명하는 에퀴테스 신분의 사람만이 행정 장관에 임명되고 원로원이든 황실의 일원이든 황제의 허가 없이는 출입조차 불가능했으니 사실상 사유 지역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