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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오래 전부터 똥만드는 기계였지, 암!
게시물ID : history_466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2
조회수 : 90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06/10 14:34:06
전업 성직자들의 주요 임무는 신을 섬기는 것이니까,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다른 사람이 갖추어주어야 한다. 수도원에는 밭이 있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수도원에 딸린 밭의 목적은 생산이 아니라 노동이다. 따라서 신을 섬기는 데 나쁜 영향을 초래할 만한 중노동은 농노한테 시켰다. 또한 교회 활동에 필요한 비용은 선의의 기부나 교회 자산 운용으로 충당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현실의 교회 조직은 그것으로는 도저히 충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있었다. (중략) 성직자들에게는 교회 활동 경비라는 명목으로 관할 주교구에서 돈이 지불된다. 교회 활동에는 미사나 기도만이 아니라 자선과 사회복지, 의료와 교육도 포함되어 있었다. 원수정 시대까지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와 유복한 개인들이 사회 복지를 분담했고, 의료와 교육은 민간 활동에 맡기는 대신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속주민이라도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여 속주세라는 이름의 직접세를 면제해주었다. 하지만 제국의 쇠퇴는 '공'과 '사'가 절묘하게 결합하여 생겨난 이 시스템을 붕괴시켜버렸다. 시스템이 무너진 자리에 들어온 것이 기독교회다. 이리하여 원래 그들이 장기로 삼는 분야였던 자선에다 복지와 의료와 교육까지 기독교회가 독점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 세속 조직인 국가도 어떤 형태로든 교회 활동에 협력하고 지원하지 않을 수 없다. 로마사 연구자들이 말기의 로마 제국을 짓누른 4대 '비'생산자 계층으로 군인과 관료에 이어 기독교 성직자를 들고 있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로마인 이야기 15권, 86쪽-87쪽
로마진노_모노가타리_저자 (옮긴이 주, 로마인 이야기의 일본 제목입니다, 뜻은 같습니다.) 오늘 다루어 볼 부분은 4-5세기 사이에 로마 제국에 급속도로 도입, 확립된 교회 조직 그리고 성직자들이 '생산자'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교회로 넘어갔다고 하는 의료와 교육에 대한 것이 타당한지, 타당하다면 과연 정당하거나 효과가 있는 일이었는지의 부분입니다. 위에서 볼 수 있다시피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고전적인 로마의 의료, 교육, 사회 복지가 전형적으로 민간 영역에서 관할되었으며 정부가 이를 속주세 면세의 방법으로 고양시켰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독교회가 확대되면서 이 영역들을 독점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국가가 교회에 협조적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고, 결국 교회 성직자들은 노동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여건을 누리게 되었다고 마무리하고 있습니다.[1] 첫 시작은 제가 말을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바로 다루고 있는 부분도 다르고 논지도 약간은 다르지만 이 부분에 시사점을 보여줄 수 있는 글 두편을 원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거야말로 손 안대고 코푸는 격...)  (가) 슘페터리안 학파의 경우 독점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만은 않아서 독점가가 안정적인 경영을 할 수 있게 되면서 투자의 증대를 통해 기술혁신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다. 하지만 오이켄 교수의 입장에서 이는 불확실한 가능성에 대한 과신일 뿐이다. 오히려 독점은 경제적으로 소비재 조달을 전체적으로 개선하는 교환 경제를 교란하는 성질을 근본적으로 가진다는 것이다. 대체 어떠한 근거로 (중략) 경상적 생산에 사용하는 비용들이 생산 수단의 희소성을 나타낼 수 있을까? (중략) 이는 실제적인 희소 관계에 합치되지 않고, 그만큼 자유 경제를 교란시키게 된다.
<경제 정책의 원리>, 발터 오이켄, 94~95쪽 원용
(나) 비잔틴의 사회복지제도는 현대인이 볼 때 다소 무계획적으로 보인다. 사회봉사의 범위와 가용성은 거주지에 따라 달랐으며, 사회의 약자들이 도움이나 치료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갖지 못했다. 더욱이 빈자들에 대한 자선사업을 통해 그들의 사정을 개선시키거나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들지도 못했다.
<비잔틴 제국의 신앙>, 메리 커닝햄, 77쪽
사실 (나) 글과 달리 (가) 글은 처음부터 '독점'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시오노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쓰이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발터 교수의 '독점'의 폐해 얘기는 일반적인 상경제(商經濟)에 관한 얘기이고 사회복지, 의료, 교육 등의 문제는 적잖이 가치재[2]의 성격을 가진다는 점만으로도 정리될 수 있겠습니다. 복지는 정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디서나 주요 화두 중 하나였죠 (사진은 복지 권리를 주장하는 1968년 5월의 미국 시위 장면) 먼저 나나미는 고대 로마가 '공'과 '사'가 절묘하게 조합된 가운데서 사회 복지, 의료, 교육을 수행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요 민간인들이 각자의 면세 특권, 그리고 부수적이든 뭐든 수입이나 명예를 위해 복지를 위한 자선, 교육 활동 그리고 의료 활동에 참여한다면 분명히 그 성취도는 높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그냥 해당 활동에 참여한 이들의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때의 얘기에 불과합니다. (나)글에서 언급하듯이 이러한 자위적인 행동은 사회봉사와 교육, 의료의 수혜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수많은 개인들이 어떠한 근거로 자신들의 선행이 좋은 효율로 필요한 이들에게 알맞게 배분, 전달되도록 결정할 수 있을까요? 즉 나나미는 이 부분에서 슘페터리안 경제학자들이 범했던 실수, 즉 개개인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효율적, 효과적으로 전체 균형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하나의 '가능성'을 사실상 하나의 사실로 '규정'하는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회 봉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배분되는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이야말로 좋은 복지, 교육, 의료의 기준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관점에서 조망한다면 나나미의 '공'과 '사'의 절묘한 조합에 대한 경탄은 균형을 맞출 '가능성'을 과신하는 것이었다고 귀결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선언된 교령 70호를 참고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니케아 일반 공의회(325년)의 교령 70조는 제국의 모든 도시에 병원을 세울 것을 규정하고 있다. 칼케돈 일반 공의회(451년)에서 여행자를 위한 휴게소, 구빈원, 고아원 등을 잘 운영하도록 의결했던 것은 여타의 그리스도교 자선기관들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비잔틴 제국의 신앙>, 메리 커닝햄, 74쪽
로마 후기와 비잔틴-로마 시기의 사회 복지는 위에서 언급된 (나)에서 비판받습니다만 오히려 똑같은 근거로 인해 고대 로마에 비해서는 효율적인 제도가 됩니다. 적어도 325년 이후의 사회 복지는 행정조직과 유사한 조직을 갖춘 교회에 의해서 상당히 효율적으로 배분되어 이루어졌습니다. 즉 기존의 민간 후원자들의 후원금은 교회에 대한 기부금으로 이어졌으며 이 기부금을 각지의 구빈 시설, 교육 기관, 의료 기관에 분배하였습니다. 이 제도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괜찮은 제도였으며 1453년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실제로 수도가 함락되었을 때 지식인들은 이 '도시'가 더 이상 자선 기관들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탄하기도 했었던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나나미가 말하는 '공'과 '사'의 절묘한 조합은 오히려 교회 조직에서 자선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을 때 잘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교회의 존재 가치는 고작 '똥이나 만드는 기계'를 훨씬 넘어서게 됩니다. 누가 더 균형을 잘 맞췄는지는 따져 봐야 알 일이죠, 예? 어익후... 이제 첫째 주제가 끝났는데 많은 공간을 할애했군요. 속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두번째는 위에서 언급했던 바, 4-5세기 사이에 로마 제국에 급속도로 도입, 확립된 교회 조직 그리고 성직자들이 '생산자'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이것도 과히 많은 설을 풀 이유는 없습니다. 인용 들어가지요. 앙겔리키 교수님이 발췌 인용하셨던 한 '성자전'입니다. 성 네일로스는 자신이 칼라브리아의 로사노에 건립한 성 아드리아노스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시험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그는 수사들에게 “인생 자체보다는 복종을 선호하라”고 가르치곤 했다. 그러므로 그는 “비이성적인 명령”으로 이루어진 시험을 계획했다. 어느날 그는 수사들에게 “우리는 많은 포도를 심었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거두었으므로 우리의 몫으로는 탐욕스러울만큼 많습니다. 자, 그것들을 베어 자급자족에 필요한 것만 남겨둡시다.”라고 말하였다. 수도사들은 이 명령에 충실히 따랐으며 이에 네일로스는 그들의 복종이 ‘옛날의’ 그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가 성산 아토스와 시칠리아 (수도원들)에 도달했을 때 아무도(수도사들) 이 행동의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으며 어떤 이들은 ‘그 수도사들이 술을 마셨다’ 혹은 ‘네일로스가 분노했기 때문이다’라며 제각기 원인을 제시했다. 이 성자전의 내용은 성 네일로스의 고매한 청빈의 덕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만 결과적으로 볼 때 당시 수도원에서도 경제적인 원리가 기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산 아토스와 시칠리아의 수도원들이면 결코 우습게 볼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성 네일로스의 황당한 지시에 당혹스러워했습니다. 그 뿐이 아니라 수도원에서는 농작물 생산 및 이의 판매와 더불어 토기 등의 수공업품을 생산, 판매했습니다. 왜냐구요? 그게 바로 수도원 운영 경비의 한 축이었으며 동시에 수도원 부속 교회, 병원, 구빈원, 고아원, 학교를 유지하는 방편이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하면 나나미의 말은 궤변에 지나지 않습니다. 분명히 말해 수도사들은 노동의 가치를 중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산을 무시했는지요? 생산을 함으로써 자신들이 먹고 살 수 있고 수도원의 기능들을 유지할 수 있는데요?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4-5세기 이후 급속히 진행된 교회의 조직화 그리고 자선, 교육, 의료 등의 종교 단체 이관화 등은 로마 제국에 있어 득이 되면 되었지 '비'생산적인 기구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교회와 수도원 그리고 종교적 자선 단체들은 정부로부터 양도된 토지를 바탕으로 사회의 낙오자들을 구제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사회의 안전망을 구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토대를 기반으로 후대에는 제약이 심하지만 어찌되었든 신분을 바꿀 수 있는 방법으로서의 교육을 제공하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나나미의 의견 상 주지할 만한 점이 하나 더 남아있는데 그것은 국가의 교회 예속화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 또한 여전히 국가가 교회보다 강한 권력을 계속해서 유지했으며 교회 자체가 완전히 공공 기관도, 사립 기관도 아닌 준 공적 기관이 되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성립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아마 나나미씨가 12세기의 교육에서 교사들의 봉급이 원칙적으로 제국 재정에서 지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패닉에 빠질지도 모르겠군요. 이하는 주석입니다.) [1] 사실 교육의 부분은 나나미가 좀 잘못된 것이 초급 단계의 교육을 수도원 쪽에서도 담당하긴 했으나 공교육 제도나 프로파이데이아같은 초등 교육 기관들은 교회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었습니다. 이 부분은 따라서 제외하고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2] 가치재(Merit Goods)란 개인들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서는 일정이상의 바람직한 수준까지 소비되지 않는 재화, 서비스를 의미한다.(위키) 따라서 가치재는 공공재와 함께 정부의 개입을 긍정하는 한 근거가 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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