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크고 작은 야만족 왕국들이 생겨났지만 그 왕국들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서로마 말엽 게르만들이 유럽 각지에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를 굵직한 종족을 위주로 살펴보자.
6세기 초반의 유럽이다. 1. 로마령 브리타니아 : 문명의 종말
영국 바스에 남아 있는 로마 시대의 목욕장. 목욕을 bath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브리타니아에 국한해서만큼은, 로마의 멸망은 핵전쟁과 그에 이은 세계멸망에 빗댈 수 있다. 브리타니아에는 본래 4세기 초엽부터 색슨족, 앵글족, 주트족들이 몰려들어 왔다. 307년 브리타니아에 주둔하던 콘스탄티누스가 황제를 칭하면서 군대를 데리고 갈리아로 건너간 후에는 브리타니아에는 원주민 켈트인(=브리튼족)만이 남겨졌다. 켈트인들은 게르만 침략자들과 브리타니아 지배권을 두고 오랜 기간 힘겨운 싸움을 했다.
로마령 브리타니아 문명은 서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다른 지방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심지어 켈트인들은 자기 언어까지도 잃고 게르만어를 사용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아더왕의 전설을 통해서나 브리타니아 로마문명의 최후를 상상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브리타니아 기병대가 엄청 쩔었나보다..."정도가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제리 브룩하이머의 <킹 아더>에서는 브리타니아 기병대가 초원에서 차출한 유목민족이라는 설정을 하고 있다. 브리타니아에는 로마제국의 흔적이 깔끔하게 지워졌다. 행정제도는 물론 종교마저도 모두 초기화(?)되었다. 하드리아누스 장성같은 몇몇 유적들만이 과거에 로마문명이 여기까지 전파되었음을 증언할 뿐이다. 2. 갈리아의 프랑크족 -프랑크족 : 유럽의 상황은 영국과 매우 다르다. 유럽에는 로마의 유산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제법 보존되었다. 갈리아 지방은 반달족에 의해 파괴된 후 서고트 왕국의 지배를 받는다. 또다른 게르만 민족인 프랑크족이 나타나서 서고트족으로부터 갈리아의 패권을 넘겨 받았는데, 프랑크족이 갈리아를 장악하는 과정이 중세초기의 가장 흥미진진한 볼거리이다.
프랑크족은 아리우스파를 신봉한 서고트와는 달리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었고, 이것이 프랑크 패권 획득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그 후 프랑크족은 유럽문명 형성에 있어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클로비스의 등장 : 프랑크족은 4세기 중반에 벨기에 지방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갈리아 지방으로 이동하였고 이들이 메로빙거 왕조를 세운다. 메로빙거의 세번째 왕 클로비스는 갈리아지방의 로마총독들을 쓰러트리고 알라마니족도 정복하고서는 오늘날 프랑스의 기초를 다졌다. 부르군디 왕국의 공주와 정략결혼을 한
클로비스는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으며, 이 신의 한 수를 통해 서고트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가톨릭을 믿는 갈리아인들에게는 아리우스파인 서고트보다 가톨릭인 클로비스가 나았기 때문이다. 사실 클로비스는 콘스탄티누스가 개종한 동기와 비슷하게 전투에서 기독교 신을 경험한 후 가톨릭으로 개종을 했는데......이것이 정치적 이익을 목적으로 기획된 퍼포먼스임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비스. 그의 사후 프랑크왕국은 분열되었다가 558년에야 다시 통합된다. 클로비스에게 쫓겨난 서고트족은 피레네 산맥 이남 영토 밖에 남지 않았다. 갈리아를 장악한 클로비스는 동로마 황제에게 줄을 대어 "명예 집정관"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수도를 파리로 옮긴 것도 이 때의 일이다. 3. 이탈리아의 동고트족 동고트족의 테오도리쿠스는 이탈리아의 다른 게르만족들을 물리치고 497년에 동로마 황제로부터 이탈리아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 받았다. 그는 혈통으로는 동고트족이되, 철저한 로마인의 정신세계를 가진 인물로서 18세가 될 때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원형경기장의 검투시합을 개최하기도 했고 주요 관직에 로마인들을 기용했다. 고전 철학을 보존하는 데에도 노력했다. 그러나 테오도리쿠스 사후 동로마측은 동고트를 이탈리아에서 쫓아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롬바르디아족이 이탈리아로 몰려 들어 왔다.
테오도리쿠스의 영표. 라벤나에 있다. 테오도리쿠스가 로마 덕후였듯이 그의 영묘도 전형적인 로마식 영묘이다. 4. 에스파냐의 서고트족 클로비스도 피레네 산맥 너머까지 서고트족을 쫓아가진 못했다. 에스파냐에서 서고트족은 반달족을 몰아내고 서고트왕국을 다시 세웠다. 그 곳에서 서고트족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현지에서 동화되어 갔다. 서고트족은 10만명 내외의 소집단이었기 때문에 이베리아 남부까지는 세력이 닿지 않았고, 그 덕에 이베리아 남부는 동로마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서고트왕국은 오랫 동안 존립하다가 711년 이슬람 교도들이 에스파냐로 침략하면서 멸망한다. 5. 로마 멸망 후의 야만족과 로마인
침략에는 성공했지만 어디까지나 극소수집단이었던 게르만들은 적극적으로 현지에 동화되어 갔다. 게르만 정복지의 원주민들은 오랫동안 유지한 전통과 관습을 그대로 지니고 살 수 있었다. 그 결과 롬바르디아족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르만들이 야만족이라는 딱지를 떼게 되었다. 게르만들도 로마 문화에 동화되기는 했지만 그들의 고유전통이 쉽사리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게르만의 관습인 복수전통은 사라지지 않았고, 게르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판결을 양피지에 기록하여 축적했다. 이것이 쌓여 후대에 게르만법이 되었는데, 게르만법과 로마법은 중세 사법제도의 근간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영향이 남아 있다. 6. 한편 동로마에서는 동로마라고해서 서방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 정치의 중심은 동로마로 옮겨와 있었기 때문에,
동로마 측에서는 서로마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는 것이 숙원사업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5세기에는 동로마 황제들 역시 게르만 족장들에게 휘둘리면서 콘스탄티노플을 수성하는 것도 벅차 했다. 자기 발등에 붙은 불에 열중하느라 동로마는 라벤나 황제들이 몰락하는 과정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오도아케르가 라벤나 황제를 폐위시키고 동로마에 연락을 해오자, 동로마는 오도아케르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말고는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동로마는 서방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고 다시 하나된 로마세계를 세우고 말겠다는 공식입장을 유지했다. 비록 그것이 말 뿐이더라도 말이다. 동고트족 테오도리쿠스가 오도아케르를 몰아내고 동로마에 접선을 해왔지만 당시 동로마는 페르시아와 슬라브족의 압박에 시달리느라 손을 쓸 수 없었다.
527년 유스티니아누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제국이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은 멀어져만 가는 꿈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