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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강남의 개발 역사
게시물ID : history_46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4
조회수 : 617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06/09 10:09:17
"소신이 듣기에 귤을 회수(淮水) 이남에 심으면 그것은 귤이 되어 달콤하기 이를데 없지만 만약 그것을 회수 이북에 심으면 작고 시면서 떫고 써서 먹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렇게 완전히 상반된 상황이 된 까닭은 바로 기후, 풍토때문입니다. 지금의 죄수는 제나라에 있을 때는 도적이 아니라 양민이었는데, 어찌하여 초나라로 온 이후에는 도적이 되었겠습니까. 이것은 초나라에 있는 것은 마치 귤이 회수 이북에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제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현재 장쑤성 지역의 Huai를 찾아보시면…… 중국 본토를 크게 북과 남으로 나눈다면, 일전부터 회수를 기점으로 해서 많이들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길이 1,078km에 면적은 174평방km로 혹은 괴하(壊河)라고도 하는데, 그 하류는 평탄한 저지대를 지나고 있어 물길이 복잡하기 때문에 홍수를 일으키기 쉽고 치수가 매우 어려웠다고 합니다. 회수 이북은 개활지라고 명명 되며, 건조도가 높기 때문에 삼림이 잘 생육하지를 못하고, 어느 정도 자란다고 해도 조금 벌목되면 재생이 쉽지가 않습니다. 이때문에 회수 이북은 삼림지대는 생성되지를 못하였고, 울창한 삼림에 방해를 받지 않아 전망 좋고 공간이 열린 화북의 대평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집단의 이동이 편하게 했고 교통이 일찍부터 발달하게 했지요. 황하의 물은 치수가 정말 어렵기로 유명했는데, 그때문에 소규모 관개 농업에 자연 상태의 비를 이용한 이른바 소규모 천수농업지대 였다고 합니다. 땅은 건조가 높기 때문에, 가능한 한 땅 속의 수분을 증발시키지 않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한지농업(寒地農業), 즉 추운 지방에서 행하는 농업으로 땅의 성질을 잘 이용하여 수분의 증발을 막고 한지성 작물의 품종을 선택하여야 하는 농업이 발달했습니다. 이 지역에서 중국인들의 농업은 말 그대로 자연과의 사투였으며, 좋지만은 않은 자연환경 속에서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지혜는 시간이 갈수록 축적되었습니다. 6세기 중반, 북위에서는 고양군 태수 가사협(賈思勰)이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농업 기술서 제민요술(齊民要術)을 만들었는데, 제민은 서민을 말하며, 농업기술의 안내서로 오곡 ·야채 ·과수 ·향목(香木) ·상마(桑麻)의 종식법(種植法), 가축의 사육법, 술 ·간장의 양조법 그리고 가공 ·판매 ·조리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기술하였고 수많은 참고 문헌에 당시 화베이 지역의 건조 농업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고 합니다. 맑은 날이 많고 높은 온도와 풍부한 햇빛은, 일단 물만 있다면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물의 제한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그때문에 일구어서 농사를 지을만한 땅의 넒이에 한계가 있고 농경지와 거주지가 점의 형태로 분포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강우량이 조금만 변동이 있어도 작물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풍년과 흉년의 변화와 차이는 극심했습니다. 적절히 비가 오는 지방, 그렇지 못한 지방의 차이는 어마어마했고, 이 같은 불균형을 해소할수 있는 방법은 넒은 지역을 '전체'로 만들고 하나의 사회로 통일하여,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과 편리한 교통이 이 땅에서 고대부터 거대한 중국 제국들이 출연할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합니다. 삼국시대의 조조도 존경했다고 하는 전국시대 위나라 관리 서문표(西門豹)의 이야기 중에, 12개의 보를 뚫어 관개 시설을 정비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나라 시절 이를 시대에 맞추어 수정하려 하자 주민들이 서문표의 유산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고 하여 결국 철폐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여하튼 거대한 한나라는 관개 설비를 충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동시에 농경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였고, 이에 발 맞춘 수요 때문에 화북 지방의 미개간지 개발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습니다. 농업생산력의 증가와 축적물의 증가는 당연히 폭발적인 인구의 증가로 이어졌고 광범한 수준의 자립 농민들이 탄생했습니다. 그리하여 대호족들이 탄생하고... 중국 후한 시대 쯤 되면, 광무제 유수는 대호족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 한나라를 다시 세웠으므로 호족들 세력은 강했습니다. 각지에서 호족 또는 부유계층이 형성되고, 학문과 문화가 수용되어 지식인 층이 널리 퍼지고, 다시 지식인 층들에 대한 인물평 같은것도 많이 퍼졌는데, 나중에 가면 이런 인물평을 받기 위해 줄을 서는 상황까지 나오고요. 삼국지에도 교현이나 허자장같은 유명한 인물 평가자들이 나오죠. 화북쪽은 이러하고, 회수 이남의 양자강 유역은...생태적으로 삼림지대라고 불리웠는데, 여름에 강우량은 급증하고 고온다습한 기후로 삼림이 무성한데다, 숲속의 풀들도 뻣뻣하여 교통이 늦게 발달되었습니다. 항상 어느 정도의 비가 보장되어 있는 이런 삼림지에서는 풍작과 흉작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고, 수확량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습니다. 혼자서도 많은 경작지를 확보해서 농사를 지을 수 있고, 교통도 편하지 않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회수 이남은 큰 나라들이 생기고 부딫히는 북쪽에 비하여 작은 나라들이 봉건적으로 독립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동양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의 사기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는 이 지역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초나라와 월나라의 땅은 토지가 넓고, 인구는 적다. 쌀을 주식으로 하며, 물고기로 국을 끓여먹는다. 과일이나 어패류는 자급 자족할 수 있으며, 땅의 성질은 식물이 풍부하기 때문에 기근의 걱정이 없다. 이 곳에서는 천금을 쌓은 부호는 없으나 굷는 사람도 없다." 사마천은 실제로 탐방을 하여 기록을 하였기에, 이 기록이 사마천이 본 기원전 1세기 무렵의 모습일 것입니다. 치열했던 북방에 비해 이 이른바 '강남' 지역은 치열하게 생존하는 북방에 비해 여유롭고 발전도 늦었습니다. 성도(成都)와 춘추 - 전국시대를 모두 합쳐 강국이었던 초나라의 중심지역 정도를 제외하면 말이지요. 아주 오래에는 아마 종족 자체도 많이 달랐겠지만…여하간에 한족은 서서히 강남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고, 전한 중후반기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서 후한때 되면 많이 사정이 좋아졌습니다. 이때 훗날의 대도시이던 남경(南京 바로 오나라의 건업)은 깡촌에 지나지 않았고, 오히려 개발이 많이 된 것은 춘추시대 오나라의 수도 소주(蘇州)와 월나라의 수도 소흥(紹興)이었습니다. 화교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어찌보면 그 당시의 화교라고도 할 수 있는 이들은 쉬지도 않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토지를 개발하고 재산을 불렸습니다. 사마천의 시대에는 아직 천금을 가진 부자는 없었지만, 후한때에 들어선 부유한 호족들이 이 지방에서도 출연하기 시작합니다. 가와카쓰 요시오 -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에서 보면, 이 당시 강남의 상태는 '마치 서부 카우보이 영화같은, 대신에 건조지대가 아닌 습윤한 지역에서 서부국의 총 대신 도검을 든' 그런 모습이라고 합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황건의 난이 발생하고....그 유명한 수많은 군웅 호걸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화북 지역은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난리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는 사람들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고, 이때 손권이 건업을 수도로 삼으면서 남경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남하는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숱한 군웅들의 난립 끝에 마침내 삼국시대를 종결시킨 서진 정권이 너무나도 별볼일 없는 정권이었기에 금세 사회는 혼란에 빠졌고, 5호16국이라 하는 이민족들이 북쪽, 서쪽 할것 없이 내려와서 다 박살을 내더니 살기도 편하고 해서 그 자리에 눌러 앉고는 치열한 다툼을 계속했습니다. 맨 처음에 들어온 유목민들이 거의 한족이 다 되면 다른 유목민들이 내려 와서 밀어 내고, 다시 그 사람들이 중국화가 다 되면 다른 유목민들이 와서 다시 뺏어가고...이런 도미노 현상이 되풀이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남쪽으로 도망쳐야 했죠. 일반인 뿐만 아니라, 밀려난 지식인들도 강남의 동진으로 피난을 와서 동진의 문화는 대단히 꽃피 게 됩니다. 천하신필, 서예의 대가 왕희지. 그림의 귀신, 눈을 그려 용을 살리는 화가 고개지. 유교 - 불교 - 도교 할 것없는 복잡하게 섞인 문화와 사치. 강남에서도 유송 - 제나라 - 양나라 - 진나라 등으로 정권 교체는 있었으나, 워낙 북쪽의 상황이 막장스러웠기에 혼란은 덜 했습니다. 이 250년동안 강남은 정말 빠르게 생산력이 상승했습니다. 북방의 북주 정권의 사람이었던 수문제는 이런 혼란을 종식시켰고, 중심을 다시 북쪽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의 수도는 장안으로, 인구가 100만에 달하는 그 당시 세계 최대의 대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이미 장안이 있던 관중 지역의 이른바 지맥은 바닥을 보이는 실정이었습니다. 그에 반해서 인구가 너무 많았기에, 그 지역의 생산력만으로는 전혀 이 인구를 지탱하지 못했죠. 물길로 식량을 운반하는 그림. 명나라 간행본 서호 2집 중에서 해결책은 운하를 통해 쌀을 운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쌀의 생산지는 바로 강남이었습니다. 강남의 풍부한 생산량은 장안을 유지하였는데, 안사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수십년동안 당나라의 모든 것을 파괴한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는 그 힘이 바닥까지 떨어졌고, 지방에 영향력을 전혀 끼칠 수 없었습니다. 사실상 당나라의 영토가 관중 지역으로 좁혀진 상황에서, 이 강남 지역의 쌀은 한말에 무려 1000전이나 하는 가격으로 팔려나가기도 합니다. 안사의 난이 벌어진 지역이 중원과 하북 지역이 중심이었기에, 그 혼란이 벌어지는 와중에서도 강남은 피해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당나라가 주전충에 의해 망하고, 주전충이 후량을 세움으로서 이제 시대는 오대 십국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오대 십국 초반부터 후량과 후당은 치열한 대결을 펼쳤기에 전쟁은 끊이지가 않았고, 북방에서는 거란인들이 쳐들어와 후진때에는 중원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기도 합니다. 이 끊이지 않는 혼란에 사람들이 또다시 강남으로 도망쳤음은 말 할것 없으며, 멸망한 당나라의 지식인들과 도사들이 도망쳐오고, 후주 세종때 되면 불교 탄압 때문에 승려들도 도망쳐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강남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것은 오대 십국 시절 십국의 나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십국들은 거의 다 공통적으로 문화 산업과 공을 쏟았고 망명한 지식인들을 받아들이면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복건등의 대도시도 이때에 개발이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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