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청전쟁을 계기로 조정의 보수파들은 영국을 오로지 이이제이(以荑制荑)의 수단으로만 활용하고 되도록 멀리 해야한다는 주장을 강력히 피력하고 강화도에 구축중인 영국의 해군기지 건설에 경계의 눈길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의 엄청난 위력을 눈앞에서 직접 확인하고 실감하게된 정조는 영국과의 국교 수립을 위해 정약용을 통신사로 하는 대규모 외교사절단을 영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사절단에는 조선 최초의 외교관 일행과 함께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동행하게 하여 선진문물을 익혀오게 하는 한편, 조선대의 우수한 인재를 골라 옥스포드(Oxford)대와 캠브리지(Cambridge)대에서 유학케 하고 일부는 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게 조치하였다.
인천항에서 영국 전함 엘리자베스(Elizabeth)호를 타고 영국으로의 먼 항해 길에 나선 정약용과 신사유람단 일행은 영조대의 실학자 홍대용이 일찍이 주장한 '지구는 둥글며 자전한다'는 학설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고, 태평양과 인도양을 거쳐 대서양에 이르는 길고 긴 항해에 '세상이 정말로 넓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어 중국이 천하의 중심인줄로만 알고 지내온 지난 시절이 스스로 한심스럽게만 여겨졌다.
남아프리카의 희망봉(希望峰)을 돌아 아프리카 해안을 타고 3개월만에 런던에 도착한 조선통신사 일행은 배에서 내리자 바로 맞닥뜨린 대영제국의 엄청난 위용에 충격으로 넋을 빼앗겼다.
웬만한 건축물의 규모가 보통 대궐을 능가하는 규모인데다가 사방팔방으로 통하며 잘 깔려진 도로엔 마차와 사람들로 정신없이 붐비고, 신기한 물건들로 가득 찬 상점들이 수도 없이 늘어서 있는 것을 목도한 통신사 일행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를 못하였다.
대부분 사대부 출신들로 양반가의 자제들로 구성된 통신사 일행은, 가벼이 놀라는 것은 소인배들이나 하는 일로 치부하며 평생을 살아온 터였지만, 바로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세계가 연출하는 장관은 꿈에서나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광경들로 연신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헛기침만 해대었다.
버킹검(Burkingum) 궁전에 도착한 정약용과 외교사절 일행은 영국 국왕 조지 3세(George Ⅲ)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고, 정약용은 조선 조정을 대표하여 영국 수상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Ⅱ)와 정식으로 국교관계를 수립하는 절차를 밟았다.
공식행사가 끝나고 국왕 초대의 리셉션에 참석한 조선의 통신사 일행에 대해 영국 귀족들은 지대한 관심을 보내며 서로의 행동이나 의상 등 일거수 일투족을 앞다투어 관찰하느라 한바탕 소동을 벌이게 되었다.
특히 파티에 참석한 영국 상류사회 부인들의 가슴이 깊게 파인 옷차림에 정약용을 비롯한 사대부들은 눈 둘 곳을 모르며 당황해 하였다.
버킹검 궁전에서의 충격적인 서양 귀족들의 연회를 정신없이 끝낸 정약용은 숙소로 가는 도중에 웨스터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으로 이어지는 잘 정돈된 더 몰(The Mall) 거리를 산책하며 깊은 사색에 잠겼다.
'어떻게 이런 세계가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경외감과 함께, 조국의 가난한 현실을 깨쳐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여야만 한다는 무거운 중압감이 가슴 속 깊이 아로새겨짐을 느낄 수 있었다.
정약용은 영국 체류 기간 중 다양한 제도와 법률, 각종 기계와 장비뿐 아니라 건축, 의상 등 풍속과 문화 전반에 걸쳐 깊은 관심을 보이며 각계의 전문가들을 만나 토론으로 밤을 지새웠고, 하나하나 꼼꼼히 기록하며 상세히 검토하였다.
특히 정약용은 템즈(Tems) 강변에 있는 영국 의회(Parliament)를 시찰하고, 일단 인민의 대표기관이라 할 수 있는 의회 건물이 왕의 거처인 궁전에 비해 오히려 규모가 훨씬 더 웅장하고 시설도 잘 되어 있는 데 대해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다.
정약용은 영국의 상. 하원 의원들과, 상호 정치구조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가지고 영국의 입헌군주제와 정당제도의 장. 단점에 대해 면밀히 연구하고 분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