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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핥기 로마사(21) - 서로마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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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악진
추천 : 4
조회수 : 3735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06/08 20:33:45
1. 멸망하는 천년 제국 동서 로마가 각자의 길을 걸으며 서로 다른 문명권이 출현하기 전에 훨씬 더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500년경까지 동로마제국은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국경선을 대체로 유지했던 반면, 서로마에서 게르만 용병대장이 황제를 폐위시키고 황실 휘장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낸 것이다. 그는 자신이 동로마제국의 황제 대리인 자격으로 서로마제국을 통치하겠노라고 주장했다.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일까? 5세기의 저술가들은 마치 세계멸망이라도 벌어진 듯 서로마의 멸망을 묘사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마가 방사능 폐허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몰락한 것은 서지중해의 사회가 아니다. 서로마의 정부기관이다. 물론 이는 엄청난 충격이다. 1000년 역사의 국가가 불과 반세기 만에 허망하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4~5세기 동안 로마제국에 밀려들어온 게르만은 유럽의 문화적 판도를 바꾸어 놓았으며, 쇠퇴해가던 서로마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야만족들의 침입 형태는 다양하다. 어떤 부족은 무력으로 땅과 재산을 빼앗았고 어떤 부족은 닥치는대로 파괴하고 학살을 했다. 반면 어떤 부족은 로마로부터 허락을 받고 평화롭게 정착하는 것이 목표였다. 토착민들은 그 수가 게르만에 비해 압도적인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게르만들에게 저항하지 않았고, 저항할 여력도 없었다. 사회경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5세기는 3세기 상황이 재림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도시는 쇠퇴하고 인구는 감소했다. 관료들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손해를 보충하기 위해 불법을 자행했고, 행정기관은 있으나마나한 곳이 되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귀족과 황족들이 사치와 향락을 멈추었느냐? 그것도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쾌락과 타락의 끝에서 빠져 나오지 않았다. 황제는 실세장군에게 완전히 멱살이 잡혀서, 꼭두각시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410년의 로마 약탈이 사실상의 로마제국 멸망선고라고 생각한다. 그 사건을 통해 제국이 더 이상 로마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실 당대인들이 받아들이기에도 476년보다 410년의 쇼크가 더 컸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은 410년 로마약탈이 로마세계 전체에 가져다 준 충격에 대해서 대답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2.알라리크의 로마 약탈 스틸리코의 부조. 그는 호노리우스의 배후에서 섭정을 하며 재상역할을 수행했지만 모함에 빠져 죽음을 맞았다. -명장 스틸리코 : 테오도시우스가 급하게 고트족들을 진정시켜 놓았지만, 일시적 타협에 불과한 것이었다. 동로마제국이 고트족에 대한 급료지불을 중지하자 족장 알라리크는 그리스 전역을 약탈했다. 동로마측이 일리리쿰 총독직을 제안했음에도 알라리크는 이를 거절하고 이탈리아 침공을 기획하였다. 서고트족은 이탈리아 본토로 밀려들어왔고, 이 과정에서 반달족 출신 로마장군인 스틸리코의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고트족들은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처럼 스틸리코만 만나면 패하기 일쑤였다. 점점 콩라인을 타는가 싶던 서고트 족장 알라리크는 천운을 탄다. 당시 서로마의 황제는 호노리우스. 그는 올림피우스의 모함에 스틸리코를 점점 멀리하다가 결국 반역혐의를 씌워 408년 그를 처형하였다. 호노리우스와 평행이론을 달리는 이 분. 그리고 스틸리코와 평행이론을 달리는 강유. -정착지가 필요한 서고트족 : 호노리우스는 밀라노에도 머물지 않고, 로마에도 머물지 않고 라벤나에 짱박혔다. 그 곳에서 올림피우스의 보좌를 받으며 바깥 세상일을 주무르기 시작했는데 스틸리코 생전에 알라리크와 맺은 협약 역시 당연히 파기되었다. 알라리크의 요구사항은 복잡하지 않다. "땅! 정착할 땅을 다오!"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요구사항이었다. 심지어 불모지 노리쿰이라도 준다면 만족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올림피우스와 호노리우스는 이를 들은채 만채 한다. -410년 로마시 약탈 : 빡친 알라리크는 더 이상 물러날 데도 없다. 아예 대군을 동원해 로마를 완전히 포위해버리고는 식량공급마저 차단했다. 당시 로마는 자급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북아프리카에서 수입되는 식량으로 연명하고 있었는데, 로마시민들은 거액의 보물을 가지고도 쫄쫄 굶는 사태에 직면했다. 이쯤되니 호노리우스 입장에서도 타협을 시도.................는 훼이크다! 기습을 감행하다가 실패하고, 인내의 끈이 떨어진 알라리크는 로마를 함락시켜 3일 밤낮을 약탈했다. 공화정 초기에 켈트인에게 털린 이후, 800년만에 처음 벌어진 로마시 함락이었다. 더 이상 로마에서 털어낼 것이 없자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을 데리고 다시 유랑생활을 해야만 했고, 동족들에게 정착할 땅을 마련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면서 죽어갔다. 서고트족은 갈리아로 이동하여 419년 제국 내에 서고트왕국이란 나라를 세우게 된다. 410년 로마시약탈을 묘사한 15세기 그림. 3. 반달 왕국의 성장 5세기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트족 말고도 염두에 두어야 할 종족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반달족이다. 반달족은 스페인 땅에 쳐들어와 뭉개고 있었고,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서로마 황제는 서고트족과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반달족이 어떻게 유럽 최서부인 스페인까지 들어갈 수 있었냐고? 라인강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군대가 있었는데, 406년 알라리크가 이탈리아 침공을 개시하자 이탈리아에서 sos를 쳤다. 위기에 빠진 로마를 구하기 위해 라인강을 포기하고 이탈리아로 군대가 이동하자, 그 틈을 타 반달족이 갈리아로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무자비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며 피레네 산맥을 넘었고, 스페인에 반달왕국을 세웠다. 어쨌거나 서고트족이 서로마 황제와 손을 잡고 반달족을 압박하기 시작하자 반달족은 북아프리카로 건너갔고, 거기에서 다시 반달왕국을 세웠다. 455년에는 북아프리카에서 출발한 반달족이 로마를 다시 탈탈 털었다. 로마는 이제 때리면 맞고 밟으면 밟히는 도시가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로마의 식량공급처인 북아프리카가 반달족의 손에 떨어지면서 서로마의 경제적 기둥이 뽑혀버렸다는 것이다. 4. 훈족의 공격 5세기 중후반이 되어서는 훈족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았다. 유목민이던 훈족은 아나톨리아와 시리아를 빼앗은 후 발칸 반도와 중앙유럽마저 짓밟았다. 교황 레오1세는 이탈리아로 들어온 아틸라에게 로마에서 철수해달라고 간청을 해야했을 정도였다. 440년 절정에 달한 훈족은 451년 로마군 서고트족에게 패하면서 진격을 멈추었다. 헝가리에 머물던 훈족은 현지인들의 반란을 맞아 세력이 사라지게 된다. 그들은 스텝지대로부터 대륙외부로 진출하는 중앙아시아 유목민들 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들이다. 대륙세력의 해양진출 시도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되돌이표 중 하나이고, 기마민족에서부터 투르크인을 거쳐 러시아와 중국으로 버전을 바꿔가며 리바이벌되고있다. 영화 <아틸라>의 아틸라. 그는 서양사에서 손꼽히는 마왕 중 하나다. 5. 서로마제국의 붕괴 476년, 게르만 출신 오도아케르는 서로마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폐위하고 공식통치권을 동로마제국 황제에게 위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를 총독으로 자칭하면서 동로마제국 황제 막하로 들어간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로마의 멸망"이다. 이미 유명무실하던 서로마는 간판마저 떨어졌고, 서로마제국의 영토는 실제적으로는 독립적인 야만족 왕국이 산재하는 형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 살던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황제를 자기들의 통치자로 생각했고 이탈리아의 야만족 지도자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동로마측이 서로마영토를 돌볼 여력이 없었을 뿐(...)이다. 폐위되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로물루스가 세우고 아우구스투스가 최초의 황제가 된 로마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로 끝맺는다. 6. 야만의 시대 서로마제국은 마침내 무너졌다. 하지만 당대 사람들은 476년을 딱히 의미가 있는 해로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라는 그 전에 이미 다 무너져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오히려 우후죽순처럼 생긴 야만족왕국을 로마제국이 국경방어를 위해 받아들인 용병들의 정착지역으로 생각했다. 게르만들도 딱히 황제 찬탈같은 야망을 품은 이는 없었다. 게르만들의 관심은 정착할 땅을 찾아 눌러앉는 것에 있었지, 떡고물도 없는 제국의 관직에 있지 않았다. 게르만이 정복한 지역의 원주민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온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을 잃지 않았다. 게르만들은 정복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복지 내에서는 소수집단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빠른 속도로 원주민과 동화되어 갔다. 게르만들은 침입해 올 당시에는 거대한 쓰나미와 같았지만 침략과정이 끝난 시점에서는 작고 고립된 침략자 집단에 불과했다. 옛 로마제국 전역에 퍼진 게르만들은 그 지역의 과거 로마인과 어울려 사는 것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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