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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만리장성은 한반도 안으로 들어왔는가? (1)
게시물ID : history_464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름없는여자
추천 : 4/5
조회수 : 168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06/08 13:37:43
(중문 위키피디아 "长城" 에서) 저기서 노란색~주황색으로 표시된 것이 연, 진, 한대 장성인데, 보시다시피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 깊숙히 들어와 있습니다. 명장성에 대해서는 접어두고, 일단 이 문제에 대해서 간단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지적해야 할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저런 지도를 보면 "왜곡이다" 라고 말하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자신이 특별히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중국의 만리장성 왜곡" 이라는 주장은 많은 경우에, "만리장성의 진짜 동쪽 끝은 산해관입니다" 라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는데, 사실 이건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산해관은 명장성의 기점이지(동북 변장 제외), 진나라나 한나라때 장성의 동쪽 끝이 아닙니다. 만리장성은 진시황때 처음 쌓아 그 후 수천년간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계속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그것도 그냥 기존에 있던 것을 조금 보수해서 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혀 위치가 다른 곳에 새로 쌓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결과 지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만리장성' 은 옛날, 즉 전국시대 연, 조나라나 진나라, 그 후의 한나라 등이 쌓아서 사용했던 장성과는 상당히 다른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면 진시황제가 쌓은 '오리지널 만리장성' 은 동쪽 끝이 어디였는가, 《사기》흉노 열전을 보면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만여리에 달하는 장성을 쌓았다." 그러니까 장성의 동쪽은 요동에 이르렀던 것이지요. 여기에서 요동이란 구체적으로 요동의 어디를 말하는지 불분명합니다만, 진 이전에 연나라가 쌓았던 장성이 당시 요동의 중심지인 양평(襄平)까지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진 장성도 양평에서 끝났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양평은 오늘날의 요양으로, 위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담기양 주편 중국역사지도집 진시기에서) 보시다시피 압록강 북쪽으로 아주 먼 곳이지요. 그렇다면 진나라 장성은 한반도 안으로는 들어온 적이 없는 것이군요. 역시 중국인들의 역사왜곡인건가! 일단 그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좀 부연을 하자면 연나라 이래 장성이 요동 중부 지역의 일부까지만 들어와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는 우리나라에서는 사실상 대세를 점하고 있습니다. 뒷받침할만한 근거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문헌 기록입니다. 사기에서는 분명 진 장성이 요동까지라고 되어 있으며, 여기에서의 요동은 특정한 한군데 지명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을 것이므로 아무래도 요동의 중심지인 양평으로 보아야 합리적일 것입니다. 또한 연나라가 고조선을 공격해서 땅을 빼앗은 후, 그 경계를 "만번한(滿潘汗)" 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위략》에 나옵니다. 만번한은 한대의 현명인 문(汶)-번한으로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 통설로, 문현은 해성 인근의 석목 한성으로 비정됩니다. 위 지도에서도 요양에서 서남쪽으로 내려가면 해성의 지명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저곳이 연나라의 영토 경계선이었다면 장성은 단연 양평 부근에서 끝났을 것입니다. 둘째로, 현재 남아있는 장성 유적입니다. 연-진-한대의 장성 유적은 제법 길게 남아있는 편인데, 내몽고의 적봉을 지나 대략 의무려산 정도에서 멈추고 있습니다. 요하 동쪽에서는 이런 유적이 나오지 않습니다. 요하 부근에서는 교란으로 인해 무너졌을 가능성을 고려하면, 역시 이것도 장성은 양평(요양)까지만 왔을 가능성을 지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 한반도 북부에서 요령지역에 걸쳐 나타나는 세죽리-연화보 철기 문화가 천산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은 연계, 동쪽은 한(漢)계 철기문화의 영향을 보인다는 견해(박순발)도 위 논의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천산산맥의 서쪽만이 연의 영역이었다고 본다면, 그 장성이 양평보다 멀리 가기란 사실상 힘든 일입니다. 마치 모든 증거가 "승리의 한국사학" 과 "중국 역사왜곡은 시망" 을 외치고 있는 것 같군요. 그런데... 일단 저도 양평 동단설이 사실이라고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제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는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요.... 어떻든, 위에서는 마치 진나라 만리장성이 요동의 양평까지인게 확실하다는 듯한 논조로 글을 썼습니다만 이것은 양평 동단설에 도움이 될만한 자료들만 모았기 때문이지, 정말 그게 확고부동해서 그런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한반도 안으로 만리장성이 들어왔었다는 중국쪽의 대체적인 견해는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1) 이병도의 음모 인 것도 아니고, (2) 고구려 성을 중국 성이라고 속여서 만들어낸 사기극 도 아닙니다. 이것도 충분히 문헌상의 근거가 있고, 뒷받침할만한 고고 자료도 있습니다. 다만 양평이 동쪽 끝이라는 설과 한반도 깊숙한 대동강 부근이나 청천강 부근이 끝이었다는 설 사이에 간격이 너무나 크고, 이로 인해 영향을 받는 논제가 많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골라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면 만리장성이 정말 한반도 안까지 들어왔었다는 근거는 무엇인지 다음 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아래는 주석입니다. "요서 지역의 경우 연북장성의 주향은 두 갈래로 나눠진다. 한 줄기는 서쪽 흥화에서 시작하여 동쪽 고원을 지나 다륜 · 풍령 · 위장 · 객라심 · 적봉 · 건평 · 오한 · 나만 · 고륜 · 부신 · 창무 · 법고 · 본계 · 관전을 지나 용강에 이른다. 그보다 밑에 위치하고 있는 다른 한 줄기는 내몽고 자치구 화덕현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객라심기와 적봉시 남부를 거쳐 노합하를 넘어 요령성 건평현 북쪽과 내몽고 자치구 오한기 남부를 통과하여 요령성 북표시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남북 장성 사이의 거리는 40~50km 에 달한다. 이 두 갈래의 장성 중 명확하게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남쪽의 고원에서 북표시 지역에 이르는 장성이다. 북쪽에 위치한 장성은 대개 오늘날의 의무려산 근처에서 멈추며 요하 근방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중국 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는 연북장성은 부신 북쪽에서 시작해 창무 · 법고를 지나 개원에 이르는 것이다. 이후 장새, 즉 요새나 초소같은 것이 동남쪽으로 무순의 동쪽을 지나 본계의 동쪽을 거쳐 관전의 북쪽에 이르며, 최종적으로는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 북부 용강에 이른다고 한다." 송호정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p304~305, 푸른역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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