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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역사소설]대한제국 200년사 -(4)조청전쟁(朝淸戰爭)
게시물ID : history_46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2013년체제
추천 : 25
조회수 : 1220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06/07 22:55:30



정조는 신유정란으로 인해, 유신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라도 군사력의 증강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영국 정부는 정조의 이러한 고민을 기회로 켄싱턴을 통해 군사고문단의 파견을 제의하고 조선 조정은 열띤 논쟁 끝에 이를 수용하기로 하였다. 



인도 주둔군 장교로 구성된 영국의 군사고문단은 장용영을 연대규모의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으로 재편하고 각종 군사훈련과 신식무기로 무장시켜 나갔다. 별기군에는 평민들의 입대를 허용하여 능력에 따라 장교로 승진 할 수 있도록 해 신분상승을 꾀하는 많은 평민들의 자제들이 앞다투어 지원하여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군인들로 훈련되어 나갔다. 



조선의 종주국임을 자처해 오던 청국은 그 때까지 영국의 접근을 예의 주시해 오다 영국이 군사고문단까지 파견하자 즉각 조선 조정에 사신을 보내 고압적인 태도로 영국 군사고문단을 당장 되돌려보낼 것을 강력히 명령하였다. 


숙환으로 쇠약해진 정조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고 조정은 찬반 격론을 벌이게 되나, 이번 일을 청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인식한 개혁파와, 전통적으로 청국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배척해온 보수파들이 모처럼 입장의 일치를 보임으로써 거부 의사를 공식적으로 표명하게 되었다. 


한양에서 돌아온 사신 일행이 조선 조정의 방자함을 이르자 청 황제 가경제(嘉慶帝)는 격분하게 되나, 수 년 간이나 전국 각지에서 횡행하는 백련교(白蓮敎)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정신이 없던 터라 당장 군사적 동원을 감행할 처지는 못되었다. 


조선 조정은 청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대비책에 분주하게 되고 영국 정부도 나름대로 대응에 착수하였다. 마침 트라팔가(Trafalga)해전에서 넬슨(Nelson)제독이 지휘한 영국 함대가 나폴레옹의 프랑스, 스페인 연합 함대를 물리치고 국가적 위기에서 벗어나 한 숨을 돌린 영국 정부는, 이번 사태를 청국의 군사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고 인도양에 정박해 있던 전함을 황해로 급파하였다.



 청국이 전쟁 준비에 시간이 걸리자 조선군은 이에 대비할 시간을 충분히 벌면서 군사력 증강에 더욱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9년간이나 계속되어 국력을 크게 쇠퇴시킨 백련교도의 난을 가까스로 진압한 청국은 다시금 전열을 정비하고 조선에의 침공을 서둘렀다. 


마침내 정예 팔기군(八旗軍)을 앞세운 청국의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침략을 개시하자 조선군은 작전대로 청군과의 접전을 피하고 전술상 후퇴를 거듭했다. 조선군의 별다른 저항이 없자, 청군은 병자호란 당시의 전술을 그대로 답습하여 기동성 있는 기마부대를 선봉으로 남쪽으로 곧장 쉬지 않고 진격해 들어갔다. 청군의 주력부대가 빠른 속도로 돌진해 들어가 자연히 군수보급과 후방 지원부대와의 연결선이 길어지게 되자, 접전을 피하고 도처에 잠복해 있던 조선군은 드디어 작전을 개시하여 기동력 있는 소규모의 유격대로 청군의 보급과 지원을 철저히 차단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선군 유격대는 유리한 지형을 장악하고 매복해 기다리고 있다가, 좁은 길로 식량과 무기 등 다량의 군수물자를 우마로 운반하던 청군의 보급부대에 기습 공격하는 방법으로 청군의 후방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청천강에 도달해 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군의 주력부대와 처음으로 조우한 청군의 주력부대인 팔기군은 강의 도하를 준비하며 미처 도착하지 못한 보급부대를 기다리나, 조선군의 유격전술로 후방과의 연결이 두절되어 군량미의 조달조차 원활치 못하자 병자호란 당시처럼 도성만 점령해 버리면 모든 것을 간단히 끝낼 수 있다고 판단하여 속전속결의 방침을 세우고 도하작전을 서둘렀다. 


별기군을 위시한 조선의 3만 병력은, 200여 년 전, 파죽지세로 조선 영토를 유린했던 팔기군을, 강 하나를 사이로 목전에 두고 긴장감과 복수심이 섞인 흥분된 상태에서 앞으로 벌어질 전쟁을 상상하며 조용히 저물어 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밤을 기다렸다. 야음을 틈타 수만의 청군이 뗏목을 만들어 타고 일제히 도하를 개시하자, 조선군은 미리 기름칠을 해서 강 중간에 띄워둔 장작더미에 일제히 불화살을 쏴 밤을 대낮같이 밝혔다. 


갑작스레 사방이 밝아져 완전히 노출된 청군은 당황하여 우왕좌왕 하게 되고 어둠 속에서 적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꿰뚫게 된 조선군은 포병들의 대포 사격을 신호로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대포와 말까지 실은 청군의 뗏목은, 조선 포병의 집중 사격을 당하자 서로 부딪히고 뒤집어 지는 등 순식간에 적막하던 청천강 일대가 갑자기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명(明)제국을 제압하고 중원을 호령하던 여진족(女眞族)의 자랑인 팔기군은, 잘 훈련된 별기군의 우세한 화력에 방어 벽을 뚫기는커녕 강기슭에 도달해 보지도 못한 채 겨우 몇몇이 목숨만 부지한 채 허둥지둥 퇴각하고 말았다. 팔기군이 청천강에서 한 발짝도 진격할 수 있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청 조정은 해상로를 통해 곧바로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 해상 침공을 결정하고 천진(天眞)에서 황해 함대를 출항시켰다. 


인도양에서 서둘러 황해로 진입한 영국의 인도양 함대는 강화도 앞바다에서 청국의 황해 함대와 조우하고 격돌하게 되나 양국 함대간의 교전은 채 한 시간도 못 가 청국 함대의 전멸로 끝나 버렸다. 본래 유목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청국은 사실 단 한 차례의 제대로 치른 해전 경험도 갖고 있지 않은 데다가 우선 영국 전함과 화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단 다섯 척의 영국 전함에 접근조차 못하고 사거리가 우세한 화력에 밀려 구식 목선 수십 척이 모두 수장 당하는 참패로 끝나 버리고 만 것이었다.


 동절기가 닥치고 도저히 승산이 보이지 않자 청천강에 포진해 있던 팔기군도 막대한 인명피해만 남기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 패퇴하고 말았다. (1805년) 청국군의 패퇴소식이 전해지자 한양은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하는 백성들에 의해 온통 잔치 분위기에 휩싸였다. 정조는 친히 숭례문까지 나가 한양으로 개선한 별기군을 따뜻이 맞이하고, 조정의 백관들도 오랜만에 단결된 모습으로 승전을 자축하며 서로를 격려했다. 


영국은 청국의 재침을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강화도에 자국 전함과 해병대 1개 대대병력의 주둔을 요청하고 조선 조정으로부터 허락을 받아내어 강화도 초지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은 나폴레옹에 점령당한 유럽의 정세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한 상태인데다 지상군을 동원한 대규모의 전쟁을 수행할 형편이 여의치 않은 관계로, 청국에의 본격적인 침략은 일단 보류하기로 결정하고 노골적으로 침략 야욕을 드러내 놓지는 않았다. 


조청전쟁으로 병자호란 때 강제로 맺어진 청국과의 군신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게 된 조선은, 청국의 종주권을 부인하는 한편 공식적으로 영국과 독자적인 대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독립국으로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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