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
근대형 중세 병원과 사회 구조 (5) 이렇듯 환자는 50명 남짓한 중형 병원이었지만 판토크라토르 병원은 만만치 않은 고용인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막대한 고용 비용은 어디서 나왔으며 누가 이 병원을 재정적으로 관리했을까요? 병원 재정의 최종적인 권한은 판토크라토르 공동체의 長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공동체 관리자'(오이코노모스)직을 가진 네 명의 수도사의 조언을 들으면서 운영했습니다. 이들은 구세주 교회와 수도원 등을 운영했는데 그들에게는 재산 판매권, 토지 임대권, 자산 관리인 임명권, 회계사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이들은 요양원과 병원의 자금과 물자가 부족하지 않게 확충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들은 병원 운영에 있어서는 어떤 권한도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병원 운영의 권한은 노소코모스라는 '병원장'에게 있어 그들이 병원의 실제 운영을 감독했습니다. 그는 미조테로스라는 직책의 도움을 받으며 병원의 식량, 연료, 약재가 언제나 충분하게끔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 직책의 중요성 때문에 병원 규율에서는 이들에게 업무 관장에 있어 수도원에 그 이유를 설명하도록 하는 의무를 면제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 운영 측면에서 병원은 매우 독립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황립 병원이 이러할진대 다른 병원의 운영도 유사하게 운영되었습니다.
"돈은 받지만 운영은 저희가 알아서 할테니 관심 끄시죠?" "......!" 병원의 운영은 대략 이러하고, 다음으로 다루어야 할 부분은 진료와 치료 부분입니다.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 의학의 큰 영향을 받은 비잔틴 의사들이었지만 그들은 5-6세기를 거치면서 의학 이론에만 경도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경험을 중시하게 되었고 이는 의학도들의 교육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진료, 내복약 제조, 수술 방법의 개선, 병리학적인 측면에서의 해부학 접근 등의 새로운 변혁이 일어남에 따라 비잔틴의 의학은 상당 부분 자생적인 노력에 의해 발전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결과물로서 나왔던 것이 '뇨분석 진료'(Uroscopy)와 '맥박 진료'의 발전 그리고 다양한 수술 기법, 예를 들어 '무혈 신장 결석 제거 수술' - 이 수술법은 아무리 늦어도 10세기에 나타났던 것인데 서구 의학에서 다시 개발된 것은 1824년 1월 13일, Jean Civiale에 의해서였습니다. 좀 더 자세한 것은 천천히 다루도록 하지요.